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란 '찬양받는 이' 라는 뜻이다. 그의 활동과 업적은 코란과 역사 기록들 속에 보존되어 있는데, 그에 대한 전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이븐 이스하크(Ibn Ishaq, +768)가 쓴 《무함마드전》이고, 그 원본에 손질을 한 이븐 히(Ibn Hishām, +833)의 것과 와키디(Wāqidi, +822)의 《전쟁의 서》(Kitab al-Maghāzi)가 초기 전기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무함마드의 언행을 모은 하디스(Hadith) 집(集)으로는 부하리(Bukhāri, +870)의 것과 무슬림(Muslim, +874)의 것이 가장 유명하다.
〔초기 생애〕 571년 4월 12일 메카에 사는 쿠라이쉬(Quraysh) 부족의 하쉼(Hashim) 가문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무함마드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망한 아버지 압달라(Abdallah)에 이어 어머니 아미나(Āmina)도 6세 되던 해 세상을 떠나자 할아버지 아브드 알 무탈리브(Abdal-Muttālib)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2년 후인 8세 때 할아버지마저 사망하자 그는 하쉼 가문의 가장이었던 숙부 아부 탈리브(Abū Tālib)에 의해 양육되었다. 불우한 소년시절을 보냈지만 평범한 젊은이로 성장한 무함마드는, 메카 상인이 파견하는 대상(隊商)의 대리인으로 참가해 시리아와 예멘까지 여행하였으며, 이 일을 수완 있고 성실하게 수행하여 메카 사람들로부터 근면하고 정직하다고 인정되어 '아민' (성실한 사람)이란 별칭으로 불려졌다. 무함마드는 자신을 고용하고 있던 부유한 미망인 카디자(Khadijah)와 25세에 결혼하였다. 이때 카디자의 나이가 40세였다고 전해지나 그녀는 무함마드가 가장 신뢰하는 반려자였고, 그의 가르침을 믿고 신자가 된 최초의 사람이었다.
〔예언자 시기〕 메카 포교 시기(610~62) : 안정되고 여유있는 생활을 하게 된 무함마드는 메카 근교의 히라(Hira)산 동굴에서 종교적 사색과 명상에 잠기곤 하였다. 그가 40세 되던 610년 히라 산중에 있던 어느 날 밤-무슬림들은 라마단(Ramadān) 달의 이 밤을 "운명지어진 권능의 밤"이라고 부른다-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창조주인 주님의 이름으로 읊으라. 그분은 인간을 핏덩이에서 만들어 내셨다."(《코란》 96, 1-5)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신의 계시는 무함마드에게 내려지기 시작하였다. 그가 받은 계시는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받았던 계시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즉 '알라(Allāh, 하느님)는 유일하다. 영원하고 낳지도 태어나지도 않으며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는 가장 자비롭고 가장 자애로운 분이다. 전지전능하고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며 보양자(保養者)이고 심판의 날의 주재자이다. 인간은 그에게만 경배를 드려야 하며, 그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한다. 이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천국에 갈 것이며 이를 무시하는 자에게는 무서운 지옥(불)의 형벌이 내려질 것' 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를 따르던 초창기 추종자들의 수는 매우 적었다. 부인 카디자와 사촌 동생 알리, 친구 아부 바크르, 그리고 해방 노예 자이드 등 그의 가까운 측근들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계시가 내리기 시작하고 3년이 지났을 때, 신은 무함마드에게 대중 앞에 나가 알라의 뜻을 전하고 지옥에서의 형벌을 경고해 줄 것을 명하였다. 이로써 그는 복음의 전달자이자 심판의 날과 죄에 대한 징벌을 알리는 경고자가 되었으며, 신이 파견한 사자(使者, Rasūl)이자 최후의 예언자(Nabī)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당시 사회의 기존 가치관에 반(反)하는 것이었다. 그는 다신교적 우상 숭배를 배격하고 고리 대금 · 도박 · 음주 · 난혼 등의 고대 관습과 전통을 버리고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기존의 종교관과 사회 가치관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내용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메카 지배층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하지만, 무함마드가 이들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하고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러한 종교적 · 사회적인 이유보다는 경제적 · 정치적인 이유가 더 컸다. 무함마드가 설교하는 새로운 사회 정의와 윤리관은 메카의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신의 섭리에 순종하고 정의로운 복지 사회를 이룩하자는 것으로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매혹적인 주장이었다. 점차 무함마드에게 모여드는 동조자수가 늘어나자 이 종교 운동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고려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후일 정치적으로 조직화되고 무함마드가 권위 있는 자가 되어 메카 사회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할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다. 즉 쿠라이쉬 부족의 지배 계층은 이 종교 운동의 정치 세력화를 사전에 봉쇄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경제적 이유로는 무함마드가 주창하는 일신교(一神敎)에서는 전통적으로 지속되어 오던 메카 순례 행사가 없어져야 할 것이고, 이것은 메카의 막대한 순례 수입원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는 부(富)의 가치관에 관한 견해 차이였다. 무함마드의 교설에 따르면, 메카 대상 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물들은 모두가 신의 것이며 그들은 단지 이것의 신탁인(信託人)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었다. 그는 재화의 축적이나 비도덕적 상행위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메카의 저층민과 젊은이들에게 호소력이 있었으며 그들이 무함마드를 지지하고 추종하게 된 첫 번째 원인이었다.
이러한 여러 요인들 때문에 메카인들은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박해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하쉼 가문의 가장 아부 탈리브에게는 무함마드가 스스로 종교 운동을 포기하도록 설득하거나 저지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고, 무함마드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상업적 보복이 뒤따랐다. 아부 탈리브는 이슬람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가문의 명예를 걸고 무함마드의 안전을 지켜 주었다. 그러나 무슬림들에 대한 메카 지배층의 박해는 날로 심해져, 615년 무함마드의 추종자 82명은 에티오피아의 아비시니아로 이주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포교 10년째가 되던 619년에는 역경 속에서도 마음 의 기둥이 되어 주었던 숙부 아부 탈리브가 죽었고 가장 훌륭한 내조자였던 카디자도 세상을 떠나 무함마드는 실의와 절망 속에 놓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하쉼 가문의 새로운 가장이 된 아부 라합은 무함마드에 대한 보호권을 포기하였다. 메카를 떠나 새로운 기반을 찾아야 했던 그는, 새 선교지를 메카의 동쪽 60km 고지에 있는 비옥한 오아시스 지역 타이프로 정하였으나 냉담한 반응과 돌 세례만을 받았을 뿐 결과는 처참한 실패였다. 이와 같이 메카 포교 10년 간은 이슬람 전도가 성공할 것 같지않는 박해와 수난의 시기였다.
그러나 620년, 어둠의 좌절 속에 빠져 있던 그 앞에 메카 북방 480km 떨어진 야스리브(Yathrib)에서 6명의 순례객이 메카에 왔다가 무함마드의 설교를 들은 후 깊은 종교적 감명을 받게 되었다. 그들 중 5명이 이듬해 순례 때 야스리브의 또 다른 유력 인사 7명과 함께 메카로 와서 무함마드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내용의 아카바(al-'Aqaba) 서약을 맺었다. 그리고 이어서 622년 6월 순례에는 75명(남 73, 여 2)의 야스리브 사람들이 아카바 계곡에서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알라와 그의 사자(使者)인 무함마드를 위해 싸울 것을 맹세하는 두 번째 아카바 서약을 하였다. 그 해 무함마드는 신으로부터 이주에 대한 계시를 받고 무슬림 모두가 야스리브로 옮겨 가는 이주, 즉 히즈라(Hijrah)를 9월 24일에 단행하였다. 이슬람 역사에서는 이때를 이슬람 국가가 태동하는 시점으로 보고, 622년을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메디나 움마 창건 시기(622~632) : 무함마드가 메카의 암살단과 추적자들을 피해 무사히 야스리브에 도착한 후, 이 도시는 메디나(Medina, 예언자의 도시)로 개명되었다. 메디나 사람들이 무함마드를 받아들인 것은 6세기 초부터 거의 1세기 동안 계속되어 온 내부 분쟁 때문이었다. 메디나에는 세 유대 부족을 포함하여 11개 씨족들이 있었는데, 일정 토지에서 산출되는 식량 수급 문제와 생존을 위한 씨족간의 심한 경쟁과 반목 때문에 이를 해결해 줄 불편 공정(不偏公正)한 조정자를 찾고 있었다. 이런 시점에서 야스리브의 순례객들이 무함마드의 인품과 설교를 듣게 되었고 무함마드가 그들의 중재자로서 적임자라 판단하였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메시아 신앙과 유일신 사상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에 그의 교설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무함마드는 메카로부터 자신을 따라 이주한 무하지룬(Muhājirūn, 이주자들)과 메디나에서 그를 지지하며 받아들인 원주민들인 안사르(Ansār, 지원자들)를 형제애로 묶어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움마(Ummah)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메디나 헌장>을 만들어 채택하고 후일 이슬람 대제국으로 번성해 갈 이슬람 국가의 기초를 닦았다. 메디나인들로서도 움마 건설은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세기 가까운 혼란기를 청산하고 처음으로 그들 스스로 화합한 정치 연합을 형성한 것이다.
메디나에서 움마 건설에 성공한 무함마드는 메카의 대상인들과 세 차례 중요한 전쟁을 하였는데, 메디나는 시리아에서 메카로 가는 통상로 상에 있었으므로 충돌은 불가피하였다. 사실상 메카와의 불화나 반목은 어떤 형태로든 청산되어야만 할 선결 과제였다. 그들이 히자즈 일대에 세력을 뻗치고 있는 한, 무함마드의 선교 운동은 한정된 것이 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무함마드는 정치적 · 경제적 압력에 의해서만 메카 정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 첫 번째 교전은 624년 바드르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불과 300명 남짓한 무슬림 군대는 1천명에 이르는 메카 군대를 완벽하게 패배시킴으로써 이 전투의 승리로 무함마드의 지위는 크게 격상되었다. 전투에 참가한 무슬림들에게는 기적적인 이 승리가 곧바로 신앙이 되었으며, 승리의 소식이 전해지자 주변의 유목민들은 무슬림에 참여할 뜻을 보내 왔다. 무함마드의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위신은 높아져 명실공히 움마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고, 메디나의 전 아랍인은 공동 운명체 속에 굳게 결속되었다.
그 후 1년 만인 625년 3월, 복수의 결전을 준비한 메카 쪽에서는 메디나 북방 약 4~5km 지점인 우후드에서 전투를 벌였다. 아부 소피얀이 이끈 메카군 3천 명과 무슬림군 700명이 대결하였던 이 전투에서 무함마드는 75명의 무슬림을 잃고 자신도 부상을 입는 패배를 당하였다. 그 후 2년 뒤, 메카의 대상인들은 사막의 유목민과 메디나에서 쫓겨난 유대인들과 결탁하여 약 1만 명 규모의 대연합군을 조직하고 627년 3월에 메디나 원정에 나섰는데, 무장 기병대 600명을 앞세운 메카측 대군은 메디나를 포위 공격하면 쉽사리 대승을 거두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페르시아 출신의 한 병사의 제의를 받아들여 메디나 외곽에 방어용 참호를 파서 대비했던 전략이 주효하여 메카군 기병대의 선제 공격이 무산되고 말았다. 오히려 무함마드의 군대는 1개월 가까이 메카 연합군의 공격을 저지시킬 수 있었고 끝내는 분란이 일어난 메카 연합군은 퇴각하고 말았다. 칸다크(참호) 전투라고 불리는 이 전투 이후 무함마드의 권위는 더욱 신장되었다. 메카와는 후다이비야 조약으로 휴전이 이루어졌고 주변의 유대인과 유목 아랍족들과 차례로 동맹을 맺거나 우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제 이슬람 공동체는 아랍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으며, 메카의 쿠라이쉬 부족의 권세를 크게 앞지르게 되었다.
630년 무함마드는 무슬림 군대 1만 명을 거느리고 메카 원정에 나섰으나, 대망해 오던 메카 입성은 거의 무혈로 이루어졌고 카아바 신전의 여러 우상들은 모두 폐기 되었으며, 카아바는 이슬람의 성전이 되었다. 메카의 이슬람화는 곧 전 아라비아 반도의 이슬람화를 의미하였다. 아랍 부족 중 가장 강성했던 쿠라이쉬 부족이 무슬림화한 것은 또한 아라비아 반도 거의 모든 부족들의 이슬람화를 가져왔으며, 이로써 움마는 이제 단순한 메디나 공동체가 아니라 전 아라비아를 지배하는 이슬람 공동체가 되었다.
632년 무함마드는 대순례단을 인솔하고 메카를 순례하였는데, 이때 행한 최후의 설교에서 그는 자신의 사후에도 분열되지 말 것을 당부하였고, 신은 유일하며 신자들은 형제라는 것을 재차 확인하였다. 또한 여성의 지위에 유의하고, 피의 복수와 이자의 폐지를 선언하였다. 메디나로 돌아온 3개월 후인 6월 8일에 무함마드는 6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무함마드에 대한 이슬람의 견해〕 무슬림들은 예언자인 무함마드가 출현한 이유를 《코란》에 근거하여 믿고 있다. 《코란》에 의하면, 인류는 본래 한 움마였는데 서로 다투고 대립하면서 여러 다른 공동체로 분열되었다고 한다. 신은 인간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해 주고 올바른 길로 그들을 인도해 주기 위해 각 공동체에 신의 사자와 예언자를 보냈다. 그런데 어느 공동체는 처음부터 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신이 보낸 사자를 거부하였으며, 그 때문에 그들은 벌을 받아 지상에서 멸망하였다. 반면 어느 공동체는 신의 사자를 따르고 신에게 귀의하는 바른 집단이 되었다. 그러나 후자의 공동체에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분쟁이 일어나고, 진리는 순수성을 잃거나 은폐되고 개조되었다. 때로는 신의 은혜를 독점하여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상을 낳거나, 또는 인간에 지나지 않는 신의 사자를 신격화하여 믿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오류들을 올바르게 하고 새로운 경고들을 전하기 위해 무함마드가 보내졌다. 그렇지만 그가 전한 계시와 경고들은 메카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그가 가져온 경전, 《코란》은 이전의 경전들인 모세의 오경과 다윗의 시편, 예수의 복음서를 확증해 주고 보완해 주는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코란이 순정(純正)의 경전임을 거듭 강조하였다.
종교적 지위 : 이슬람이란 아브라함의 신앙에 기초하고 그 종교 전통을 이어받은 종교이다. 아브라함은 순수한 일신교도, 하니프(Hanif)였다. 신에게 절대 복종하였고 신의 뜻에 모든 것을 신탁하던 독신자였다. 이슬람은 이러한 신앙 위에 세워진 종교이다. 그래서 이슬람의 어의는 '신의 명령에 복종하고 신의 의지에 귀의하는 것'이다. 《코란》에 언급된 무함마드의 지위는 예언자이자 신의 사자(Rasul allah)이다. 서양에서는 그를 '예언자' 로 일컫고 있지만 무슬림 세계에서 더 널리 쓰이고 있는 일반적 호칭은 '신의 사자' 이다. 메카 계시 초기에는 계시의 전달자, 경고자로 등장하였지만 곧 이어서 예언자로 불려졌다. 코란에서 언급된 예언자의 수는 28명인데 모두가 동등한 지위이다. 다시 말해 무함마드는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과 똑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그가 '최후의 예언자' 라는 점이다. 무함마드를 통한 계시에서 신은 앞선 경전들을 순화 · 보완 · 종합하여 종교를 완전하게 하였으며, 무함마드는 예수의 뒤를 이어이 땅에 보내진 신의 사자라고 한다. 그리고 이제 종교는 그를 매개로 하여 '이슬람' 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계시, 더 이상의 사자는 필요하지 않으며 무함마드가 그 마지막이라고 무슬림들은 믿는다. 이것은 “알라(AIlāh)께서는 유일한 존재" 라는 유일신 신앙에 다
음가는 그들의 믿음이다.
사회 · 정치적 위치 : 움마에서의 그의 지위는 <메디나 헌장>에 잘 나타나 있다. "공동체 내의 분쟁은 알라께, 그리고 알라의 사자에게 맡겨진다"와 "무하지룬을 한 단위로, 안사르(메디나의 8개 씨족)를 한 단위로 하여 몸값을 부담한다"는 이 두 조항에서 볼 수 있듯이 움마 형성 초기의 무함마드의 정치적 지위는 무한지룬의 장(Sayyid)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분쟁의 조정자 · 중재자였던 그는 차차 움마의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고, 바드르 전투를 비롯한 여러 군사 행동과 원정에서 군 지휘권도 장악하였다. 군사적 승리와 이러한 군(軍) 지도자(qāid)로서의 지위는 그의 정치적 권위를 한층 증대시켰다. 따라서 생애 말기, 메디나 움마에서의 그의 종교적 지위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는 국가 형태를 갖춘 이슬람 움마의 입법 · 사법 · 행정 · 군사 모든 측면의 실제 권력을 행사하는 움마의 통수권자가 되었다.
업적 : 무함마드가 남긴 가장 두드러진 정치적 업적은 종교와 함께 국가라는 개념을 가진 이슬람 공동체, 즉 움마를 건설한 일이다. 이 공동체는 정교 합일(正敎合一)의 이슬람 정부 체제를 갖추고 있었으며,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 통치가 이루어졌고, 어려운 국사 결정은 슈우라(shura, 협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슬람을 통치 원리와 기반으로 삼고 있는 이런 체제하에서는 구성원들이 종래 가지고 있던 부족 연대 의식이나 종족에 대한 충성심, 즉 집단 감정을 초월해야 했다. 그들은 샤리아(Shanah, 이슬람법)에 의해 통치되는 종교 국가의 일원이 된 것이다. 국가의 결속력은 지하드(jihad, 聖戰) 정신에 의해 강화되었으며, 그 결과 이슬람 움마는 무함마드 생전에 이미 전 아라비아 반도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사후 불과 20년 후에는 페르시아의 사산(Sasan) 왕조를 무너뜨렸고, 비잔틴 로마 제국에 속해 있던 시리아 · 이집트 지역을 병합했다. 또 그의 사후 100년째 되는 때에는 인도의 편잡(Punjab)에서 피레네(Pyrénées) 산맥에 이르는,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Samarkand)에서 모로코(Morocco)에 이르는 이슬람 대제국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그는 정교 일치 국가 개념을 가진 이슬람 움마를 창건하여 오늘날 10억 무슬림의 세계가 있게 한 정치인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업적 못지않은 사회적 업적도 있다. 그는 이슬람 이전 시대(jahiliya, 자힐리야 시대), 즉 고대 아랍 유목민 사회에 만연되어 있던 악습과 부도덕한 전통을 혁신한 사회 개혁 운동가였다. 미신과 우상 숭배 사상에 종지부를 찍었고 신생 여아의 생매장 · 음주 · 난혼 · 도박 등 구시대의 부도덕한 생활 행태들을 종식시켰으며, 사회 윤리 · 도덕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하였다. 특히 그 시대까지 상호 안전 보장을 위해 사회 규율로 지켜지고 있던 동태 복수법(lextalio)의 피의 복수를 금하고 보상금이나 속전으로 대체되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개인 재산과 생명의 신성함, 존엄성을 강조하였으며, 여인의 상속권 · 결혼권 등 가족과 사회에서의 여권 존중과 지위 보장을 주장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무함마드가 《코란》에 근거하여 만민 평등 사상을 주창하였다는 점이다. 그가 사망하던 632년, 소위 '고별의 순례' 에서 무함마드는 사유 재산의 신성함, 유산 상속 문제, 이자의 금지, 살인 복수의 금지, 부부간의 권리, 노예 처우와 해방 문제 등 인간 상호간에 필요한 평화 지침을 제창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간 모두는 인종 · 민족 · 국가 · 피부색 · 계급 · 신분 · 언어가 다름에 관계없이 신 앞에 평등하다는 인간 평등 선언을 하였으며, 인간의 우열은 선행을 실천하고 신을 경외하는 정도에서 판단된다고 가르쳤다. 또
겸손이 교만보다 우위에 있으며 관대함 · 덕 · 인내가 무엇인지도 보여 주었다. 그는 박애와 인도주의의 실천가이기도 하였다. 20년 간 박해와 함께 자신의 생명까지 위협하였던 적대자들을 받아들였고 신의 용서를 빌어 주었다. 그가 주창한 형제애와 평등 사상은 아마도 이슬람이 세계화되고 보편적 종교로 급성장하는 데 가장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무함마드는 인간이 내세뿐 아니라 현세에도 행복하게 사는 길을 가르쳤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며, 알라가 창조한 모든 피조물은 인간에게 유용하게 쓰이고 봉사하기 위해 창조된 것임을 가르침으로써 인간이 곧 지상에서의 신의 대리자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어느 정도의 금욕과 자아 수련이야말로 인간이 현세를 사는 정도(正道)라고 하였다. 또한, 만물은 알라에게 속하고 인간은 단지 신의 재물에 대한 관리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부(富)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렸다. 그가 가졌던 인품인 인자 · 중용· 용맹 · 인내 등과, 그가 알라의 사자로서, 그리고 가족과 교우들 속의 한 구성원으로서, 사회 · 종교 개혁자, 정
치가, 행정가, 군인으로서 걸어온 인생은 모든 무슬림들이 따라야 하는 인생의 표본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그의 언행이 담긴 《하디스》(Hadith)를 《코란》 다음가는 교리서로 채택하고 있으며, 《하디스》에 언급된 내용들은 곧 무슬림 신앙과 실천의 원리이다. 〔평 가〕 무함마드는 자신이 신의 소명을 받은 예언자 이상의 존재가 아니라고 스스로 말하였다. 《코란》에도 "무함마드는 사자(rasul)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니···"(3,147)라고 이를 명백히 하였다. 이는 무함마드의 인성(人性)을 강조한 것으로 그는 신의 뜻에 복종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는 메카 정복 이후 절대 군주가 될 수도 있었으나 평범한 통치자에 머물렀다. 정교 일치 체제에 근거하여 신권 정치를 펴는 황제적 성격의 통치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예언자, 신이 보낸 사자라는 지위를 빌려 영적 권위나 초인간적인 힘을 과시하며 인간들 위에 군림하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옥좌 대신 마룻바닥에 앉았었고, 대추야자와 보리 빵을 즐겨 먹던 소박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 마호메트 ; → 근본주의, 이슬람교의 ; 모스크 ; 무슬림 ; 이슬람교)
※ 참고문헌 'Abd ar-Rahman 'Azzam, The Life of the Prophet Muhammad, Glasgow Superprint Graphics Ltd., 1979/ Frederick Mathewson Denny, An Introduction to Islam, New York, 1985/ H.A.R. Gibb, Mohammedanism, 2nd ed., Oxford, 1953/ Ibrahim Hassan, Islam, Beirut, 1967/ Ibrāhim al-Ibyāry, Munddab as-Sīyrah an-Qahirah, 1979/ as- Siyrah an-Nabawyyah Ibn Hihām, Taqiq Muhammad Fahmy as-Sīrjāny, al- Qāhirah, 1978/ Ismail Kashmiri, Prophet of lslam Muhammad and Some of His Traditions, Cairo, 1967/ Philip. K. Hitti, Islam, Away ofLife, Univ., of Minnesota Press, Minneapolis, 1969/ P.M. Holt · Ann K.S. Lambton · Bernard Lewis, The Cambridge History of Islam, Cambridge Univ. Press, 1979/ W. Montgomery Watt, Muhammad at Medina, Oxford, 1958.〔孫主永〕
무함마드 Muhammmad(57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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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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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천사에게 신의 계시를 받는 무함마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