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막 본당
文幕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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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원주교구 소속 본당.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문막리 432-2 소재. 1958년 9월 10일 학성동 본당 관할 공소 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사도 성 베드로. 관 할 구역은 원주시 문막읍 전역과 부론면(富論面) 일부이 며, 관할 공소는 부론, 손곡(蓀谷) 2개소. 〔교 세〕 1959 년 397명, 1963년 619명, 1966년 848명, 1971년 770명, 1975년 725명, 1980년 897명, 1985년 805 명, 1990년 748명, 1995년 901명. 〔역대 신부〕 초대 이응현(李應鉉) 테오도로(1958. 9~1961. 7), 2대 이정규 (李正奎) 비오(1961. 7 ~1966. 10), 3대 델라니(R. Delaney, 도) 리카르도(1966. 10~1968.2), 4대 켈리(P.Kelly, 경) 베 드로(1968. 2~1969. 12), 5대 맥파든(M. McFadden, 남) 미 카엘(1969. 12~1972. 2), 6대 오라흘린(M. O'Loughin, 오) 미카엘(1972.2~1973.6), , 7대 맥파든(1973.6~1975.6), 8대 오라흘린(1975. 7~1978. 10), 9대 콘웨이(P. Conway, 구) 파트리치오(1978. 10~1980. 1), 10대 켈리(J. Kelly, 이) 예 레미야(1980. 1~1981. 9), 11대 켈리(P. Kelly, 경) 베드로 (1981. 9~1982. 6), 12대 김종인(金鍾仁) 마태오(1982. 6~1983. 5), 13대 장석윤(張錫潤) 비오(1983. 5~1985. 6) 14대 노세현(盧世賢) 마티아(1985. 6~1987. 9), 15대 이 영섭(李永燮) 프란치스코(1987. 9~1992. 1), 16대 류충희 (柳忠熙) 대철 베드로(1992. 1~1996. 2), 17대 김창수(金 昌洙) 안드레아(1996. 2~현재). 〔공소 시대〕 문막 본당의 관할 구역인 부론면 일대는 일찍부터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서 신앙 생활을 하 던 곳으로,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부론면 손곡리 서지 (西芝)에 살던 최해성(崔海成, 요한)이 체포되어 1839 년 10월 6일 원주 감옥에서 순교하였다는 기록으로 보 아 이미 그 이전부터 신자들이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후의 복음사는 오랫동안 교회사에 나타나지 않 는다. 그러다가 박해가 끝나면서 다시 신앙 공동체가 형 성되었는데, 당시 문막 지역을 처음 방문한 성직자는 경 상도와 강원도 일대를 담당하던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였다. 그는 1882년에 처음 이곳을 방문하고는 문막 (현 부론면 法泉里의 장들)과 그 이웃의 부엉골(현 경기도 여 주군 강천면 釜坪里) 공동체를 공소로 설정하였고, 1883년 의 두 공소 신자수는 각각 37명이었다.
1885년 10월 28일자로 예수성심신학교가 설립된 부 엉골 공소에는 그 해 입국한 마라발(J. Maraval, 徐若瑟) 신부가 신학교 교수로 상주하면서 인근의 신자들을 돌본 반면에, 문막 공소는 1885년 이후 드게트(Deguette, 崔東 鎭) 신부가 담당한 강원도 이천의 염산리(廉山里) 본당 (望沓 본당의 전신) 관할 밑에 들어갔다. 이때 문막 공소의 신자수는 36명, 부엉골 공소의 신자수는 47명이었다. 그러나 1887년 3월 부엉골의 신학교가 서울 용산으로 이전되면서 이 두 공소는 다시 드게트 신부가 관할하게 되었고, 동시에 원심이 공소(여주군 강천면 道全里)가 새로 설립되면서 문막 즉 장들[壯坪] 공소의 신자수는 20명 으로 줄어들었다.
한편 1888년에 풍수원(豊水院) 본당이 신설되었으나 문막 일대의 공소들은 계속 염산리 본당에 속하였다가 이듬해는 르 비엘(Le Viel, 申三德) 신부가 부엉골에, 1890년에는 우도(Oudot, 吳保祿) 신부가 원심이에 임시 로 정착하면서 문막 인근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해 주었다. 또 1891년과 1892~1893년에는 풍수원 본당 의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신부가 장들 · 원심이 공소 를, 1892~1893년에는 마르탱(Martin, 沈良) 신부가 부 엉골 본당을 맡았으며, 1894년에는 부이용(Boullion, 任 加爾) 신부가 부엉골 본당을 담당하면서 인근의 모든 공 소들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때 신자수는 부엉골 96명, 원심이 81명, 장들 45명이었으나 이 공소들은 부이용 신부가 1896년 9월 17일 본당을 충북 장호원(長湖院, 즉 감곡)으로 이전한 뒤에는 일시 풍수원 본당 소속이 되 었다. 그리고 르 메르 신부가 풍수원 본당을 정규하(鄭 圭夏, 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넘겨주고 원주(현 원동) 본당을 설립하면서 소속이 원주 본당으로 바뀌었다. 그 후 부엉골 공소는 신자들의 이주로 1900년대 초에 폐쇄 되었지만, 장들과 원심이 공소는 계속 유지되어 1924년 에는 신자수가 각각 26명, 167명이었다. 또 1900년대 초에는 밤상골(현 문막읍 磻溪里)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 었고, 두둑말(현 부론면 興湖里)은 공소로 설정되었다.
〔본당 설립과 변모〕 원주 본당 관할 아래 있던 장들 공 소는 그 후 '부론 공소' 로 개칭되었는데, 8 · 15 광복 당 시까지 30여 명의 신자수를 유지하다가 한국 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이주 · 정착함에 따라 80여 명으로 증가하였 다. 반면에 1900년대 초에 형성되었던 문막 지역의 신 자 공동체는 그 후 와해되었고, 1938년경에 다시 문막 으로 전입해 온 신자 몇 세대가 박일준의 집에 모여 집회 를 갖기 시작하였다. 그 후 원주 본당 주임 정규량(鄭圭 良, 레오) 신부에 의해 공소(회장 박순원)로 설정되었는 데, 그 무렵 공소 신자수는 50명 가량이었으나, 꾸준히 증가하여 광복 이후 원주 본당의 디어리(Deey, 李) 신부 가 사목할 당시에는 90여 명을 기록하였다. 이후 문막 공소에서는 신자수가 100명 정도에 이르면서 1948년 현 본당 소재지에 공소 강당을 건립하였으나 전쟁 중에 전소되고 말았다. 이에 디어리 신부는 1956년에 양대석 (梁大錫, 알로이시오) 보좌 신부로 하여금 문막 본당의 설립을 위해 성당 건립을 적극 추진하도록 하여 이듬해 성당 및 사제관을 건립하였으나, 즉시 본당 설립이 이루 어지지는 않았다.
디어리 신부에 이어 원주 본당의 주임이 된 양대석 신 부는 신자수가 증가하자 본당 분할을 계획하고, 우선 1957년 6월 1일에 학성동(鶴城洞) 본당을 분리하였으 며, 그 결과 문막 공소는 새 본당 관할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9월 10일 문막 본당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이응 현(테오도로)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본당 승격 이후 신자들은 농촌 지역에 본당이 위치하 여 제약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착과 지역 복음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2대 이정규 신부 재임시인 1962년에는 손곡 공소를 설립하였고, 이듬해 1월 26일 에는 부론 공소의 강당을 신축 기공하면서 이전 강당의 자재로 손곡 공소의 강당을 건립하였으며, 1964년 5월 2일에는 부론 강당(57평)을 완공하고 초대 춘천교구장 퀸란(Quinlan, 具仁蘭)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하 였다. 이어 1965년 3월 22일 춘천교구에서 원주교구가 분리 신설됨에 따라 문막 본당도 새 교구로 소속이 변경 되었다. 그 해 12월 9일 문막 신용 협동 조합을 설립하 였으며, 이듬해 9월 7일에는 성모회를 발족시켰다. 또 1969년 9월 7일에는 가톨릭 교리 신학원(현 가톨릭대학 교 사회 교육원) 출신의 이천호(바오로)가 본당에 와서 4 대 켈리 신부 및 5대 맥파든 신부를 도와 여러 단체들을 조직하고 본당 주보를 발간하는 등 침체되어 가는 본당 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맥파든 신부는 문막 변전소 옆의 대지 1,500평을 매입하여 인근 주민들을 대상으로 비영리 양돈 사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 후 본당은 오랫동안의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그러다가 10대 켈리 신부 재임시인 1980년 9월 21일 부론 공소에 어린이 집을 개원하였고, 1981년 2월에는 미리 내 성모 성심 수녀회 수녀들을 초청하였으며, 13대 장석 윤신부 때인 1984년에는 성모유치원을 설립하였다. 15대 이영섭 신부는 1988년에 수녀원을 신축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본당 전 신자들이 합심하여 성모 동굴을 건 립하였다. 16대 류충희 신부는 1992년에 성당 종탑 및 지붕 개축 공사를 실시하였고, 1994년에는 성서 40주간 을 마련하였으며, 17대 김창수 신부 부임 이후에는 소공 동체 활성화의 일환으로 구역 · 반장 모임을 강화하고 본 당의 신심 및 활동 단체들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노력하 였다.
현재 본당에는 사목 협의회를 중심으로 레지오 마리애 4개 쁘레시디움을 비롯하여 성모회, 교사회, 성가대, 남 성 장년층의 친교 및 신심 강화 단체인 베드로회, 60세 이상 할머니들의 친목 및 신심 단체인 안나회 등이 있다. 또 본당 신자들의 친목 도모와 신심 강화 활동, 체육 대 회, 척사 대회, 야외 미사, 성지 순례 등을 정기적으로 실시해 오고 있다. 그 동안 본당은 이농 현상으로 한때 쇠퇴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관 할 구역 안에 공업 단지 및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 영 동 고속도로의 확장, 1995년 3월 1일에 있은 문막읍 승 격 등으로 인해 점차 교세가 신장되면서 재정 자립과 활 성화를 꾀하게 되었다. (→ 원주교구 ; 부엉골 ; 원동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본당별 교세 통계표>(필사본), 한국 교회사연구소 소장/ 천주교 명동 교회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I ~Ⅲ, 천주교 명동 교회, 1986~1993/ 천주교 감곡 교회, 《甘谷本堂九十年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원주교구 30년 사편찬위 원회, 《原州教區三十年史》, 천주교 원주교구, 1996. 〔李裕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