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인 文榮仁(1777~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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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의 동정 순교자. 세례 명은 비비안나.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다섯 딸 중의 셋째 로 태어나 7세 때인 1783년에 궁녀로 선발되어 궁궐에 들어갔다. 어린 나이 때부터 궁에서 성장하게 된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5세 되던 해에 관례 대로 머리를 올렸고, 글씨에 재주가 있었으므로 문서 쓰 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 무렵에 이미 모친과 언니들은 천 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교리를 실천하고 있었다. 그러므 로 그녀가 궁에서 나와 잠시 집에 들릴 때면 입교를 권유 하곤 하였으며, 이때마다 그녀는 훗날 궁에서 나오게 되 면 천주교를 봉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다가 1797 년에 갑자기 중한 병에 들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궁에서 나오자마자 약속한 대로 집을 드나들던 노인에게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주문모(周文謨, 야고 보)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후 비비안나는 여회장 강완숙(姜完淑, 골롬바)을 도 와 활동하는 한편, 양근(楊根)의 정약종(丁若鍾, 아우구 스티노)을 찾아가 교리를 배우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매일 기도하고 교회 서적을 읽는 데만 전심하였으며,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며 그분들의 생애를 본받기 위해 노 력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점차 그녀의 마음 한곳에서는 순교에 대한 원의가 자라나게 되었다. 당시 궁에서는 자 주 의원을 보내 그녀의 병을 치료하고 다시 궁으로 데려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의원이 올 때마다 병이 다시 도졌 다가는 의원이 돌아가면 씻은 듯이 병이 낫곤 하였으므 로, 궁에서는 마침내 그녀의 병을 고치는 것을 포기하였 다. 이때부터 비비안나는 마음놓고 천주교의 모든 덕행 을 닦는 데 전심하게 되었고, 주문모 신부의 시중을 들면 서 모범적인 헌신과 효성으로 자신의 직분을 다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고 주문모 신부가 다른 곳 으로 피신하자 비비안나는 집으로 돌아가 순교할 날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김섬아(수산 나)를 체포하려고 돌아다니던 포졸들이 그녀의 집으로 들이닥치게 되자, 서슴없이 천주교 신자임을 밝히고 포 도청으로 끌려갔다. 포도청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는 동 안 비비안나는 잠시 마음이 약해졌으나, 이내 신앙을 고 백하고 형조로 이송되었다. 이때 형리들이 그녀의 항구 함에 화가 나서 다리를 몹시 쳤는데, 증언에 의하면 다리 에서 나온 피가 이내 꽃으로 변하여 공중으로 떠올랐다 고 한다. 이후 사형 판결을 받은 비비안나는 강완숙 등 8 명의 교우들과 함께 서소문(西小門) 밖으로 끌려 나갔 다. 그 와중에서도 그녀는 군중들을 물리치려는 군졸들 을 오히려 책망하였고, 형장에 이르러서는 즐거운 낯으 로 칼날을 받았으니, 이때가 1801년 7월 2일(음 5월 22 일)로 나이는 25세였다. 비비안나가 순교한 뒤 교우들은 한결같이, '성녀 마르타처럼 그녀의 목에서 나온 피가 젖과 같이 희었다' 고 전하였다. (→ 강완숙 ; 신유박해)
※ 참고문헌  《純實錄》 《邪學懲義》 李基慶 편, 《闢衛編》 李晚 采 편, 《闢衛編》/ 《달레 교회사》 上/尹敏求, <辛未年(1811) 조선 천주 교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 보낸 편지에 대한 연구>, 《水原가톨릭大學 論文集》 2집, 수원 가톨릭대학, 1990. 〔車基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