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文益煥(1918~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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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한국 기독교 장로회 목사. 성서 신학자. 시 인. 호는 늦봄. 1976 년 이후 민주화 운동가 로 활동하였으며, 한국 현대사에서는 평화 운 동가, 통일 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생 애〕 1918년 6 월 1일 만주 북간도 화룡현 장재촌 남쪽의 명동(明東)에서 문재 린(文在麟)과 김신묵 (金信默)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간도에서 소학교와 중학교 과 정을 마쳤다. 조부 문치정(文治政) 때부터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갖기 시작한 후 부친 문재린이 목사가 될 정도로 신앙이 깊었던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일찍부터 목사가 될 것을 결심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일본 신학교에 입 학했으나, 졸업을 얼마 앞두고 귀국했다. 이어 조선신학 교(현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하여 1947년 졸업한 후 한국 기독교 장로회 목사가 되었으며, 그 후 미국 프린스턴 신 학교(Priceton Theological Seminary)에 진학하여 구약학을 전공하였고, 졸업과 동시에 귀국하여 1955년부터 한국 신학대학 교수로 재임하였다. 그러나 재임 중 발생한 학 내 분규의 확산으로 교수직을 사임한 그는, 1968년부터 한국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대표들로 구성된 성서 공 동 번역 책임 위원으로 임명되어 약 8년 동안 성서 번역 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특히 구약 및 시편 연구 에 심취하여 이를 바탕으로 문학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첫 시집 《새삼스런 하루》(1973)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성서 속의 언어와 의미에서 받은 영감을 시 창작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신앙과 시, 신학과 미학의 경계를 넘나들 며 독자적인 신앙시로 구축하였다. 즉 그는 구약성서의 히브리 정신에 바탕을 두고 거기에 한국적인 정신과 감 성을 융화시켜 얻어지는 새로운 언어와 리듬을 발굴하여 시 예술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한편 그는 진보적인 통일 의식과 국가관으로 1976년 군부 독재에 항거하는 '3 · 1 민주 구국 선언 사건' (즉 명 동 성당 시국 선언 사건)에 깊이 연루되어 수감된 데에 이 어 1978년에는 유신 헌법의 비민주성을 질타하는 성명 을 발표해 다시 수감됨으로써, 이후 20여 년 동안의 민 주화 투쟁에서 모두 6차례의 옥고를 치렀다. 이와 같이 1976년부터 시작된 그의 인권 운동은 사망하기 직전까 지 약 18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는데, 전반부에는 주로 군 사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으로, 후반부에는 통일 운동으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1989년 3월 25일에 는 통일의 길을 여는 일에 기여하겠다는 일념하에 정부 의 허락 없이 방북(訪北)함으로써 국내외 언론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하였다. '통일의 집' 이라는 현판을 대문 위에 늘 걸어 두고 살 정도로 통일에 대한 강한 집념을 가지고 살다가 '새로운 통일 운동체' 결성과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 모임' 을 준비하던 중 77세 때인 1994년 1 월 18일 급환으로 사망하여 경기도 남양주군 마석 모란 공원 묘지에 묻혔다.
〔학문과 사상〕 문익환은 성서를 번역한 것 외에도 수 많은 신학 논문과 저서, 문학 작품들을 남겼으며, 오랜 기간 동안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의 학문 과 사상은, <독립 신문> 기자로 활동하면서 독립 운동에 가담한 아버지 문재린 목사와 어머니 김신묵 권사의 인 간 사랑의 정신과 진보 사상, 그리고 구약성서에 담긴 '창조, 역사 예언, 시, 지혜' 에 대한 폭 넓은 이해와 비판 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의 가정적 배경은 매우 자유 롭고 관대하며 온건하고 중용적(中庸的)이었으므로, 문익환은 여러 차례에 걸친 옥고, 데모 참여, 단식 투쟁, 선동적 연설 등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도 좌 · 우 어 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았다. 즉 그의 신념은 '좌냐 우냐 는 물론이고,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것도 또한 아닌, 오 직 좌도 우도 다 같이' 라는 정신적 바탕 위에 기초되어 있다. 그는 항상 남북한 정부의 실체를 모두 인정하자고 주장하였기에 단신으로 방북하여 김일성과 포옹하는 일 도 거리낌없이 할 수 있었으며, 문민 정부 출범 후에도 이를 가능한 한 수용하려고 하였다. 평생을 민주화 운동 에 몸바쳤으나 오히려 민주화보다는 민족의 통일과 화해 를 우선으로 생각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분 열, 분파, 대결보다는 오히려 협력과 상호 공존을 보다 선호하였다.
구약성서를 통해 관찰하고 이해한 문익환의 역사 이해 는 하느님의 역사를 '약자의 해방, 보존의 역사 로 이해 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과 역사 신앙은 그가 말년 에 저술한 《히브리 민중사》에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데, 이를 통해 그의 신(神) 이해가 뚜렷이 정립된다. 성서의 신은 힘의 논리를 승상하는 제국주의의 신들과는 엄격하게 구별되는 '히브리인(고대 중동의 '하비루' 와 동일 시하는 견해를 따라감)의 신' 으로서 이해하였다. 이 신은 '야훼' 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분으로서 '엘' 신, 특히 '엘 · 사따이' (山神)와 일치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이 '야훼 · 엘' 을 바알에게서부터 밀려난 신이자 민중 해방 의 신으로 이해하였으며, '엘 · 사따이' 는 화전민의 신이 라고까지 이해하였다. 이와 같이 문익환 목사는 그의 신 앙의 정초(定礎)를 '힘없는 자(민중)의 편에 서시는 하느 님 신앙' 위에 놓았다. 즉 그는 히브리인의 하느님을 가 장 정확히 대변한 자들은 바로 구약의 예언자들이라고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언자(預言者)들은 이 러한 하느님의 역사(민중 해방의 역사)를 해석하는 자들인 동시에, 이러한 야훼 이념으로 역사를 만들어 가는 자들 (makers of histor)이었다. 문익환의 생애는 이러한 예언 자 정신을 실천하는 '행동하는 신학자 , '시(詩)를 사는 시인' 으로서의 삶으로 점철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문익환은 예언자들의 시 세계, 시편 시인들 및 이스라 엘 지혜자들의 시 세계를 두루 섭렵하면서 성서의 시 세 계에 심취하였다. 또 죽마고우이자 시인이었던 윤동주 (尹東柱)의 시 세계를 사모한 그는, 윤동주 시인처럼 고 통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서정 시인으로서 분단 민족의 아픔을 맑고 깨끗하게 묘사하고자 함으로써 위대한 통일 노래꾼으로 인식되었다.
〔운동가로서의 성향〕 문익환은 단순히 구약학을 전공 한 신학자라기보다는 민주화 운동가, 평화 운동가, 그리 고 통일 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실천적인 신학자였다. 군 사 정권의 비민주성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의 핵심부로 활동한 그는, 1976년 3월 1일 명동 성당에서 구국 선언 문을 초안하여 발표함으로써 아내 박용길(朴容吉), 장남 호근(昊瑾), 동생 문동환(文東煥)과 함께 중앙 정보부로 연행되어 구속 · 수감되었고, 이어 이듬해에는 나라의 민 족과 장래를 위한 25일 간의 옥중 단식을 함으로써 군사 정권의 비민주성을 폭로 · 비판하여 재수감되었다. 그리 고 출옥한 지 얼마 후 '내란 음모죄' 로 또다시 수감되었다. 따라서 그가 '고난받는 사람을 위한 갈릴리 교회' 를 세운 후에 담임 목사가 된 것도 민주화 투쟁 운동의 맥락 안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그의 민주화 운동은 통일 운동과 평화(민족 화해) 운동 으로 발전해 갔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1984년에 '민주 통일 국민 회의' 의장이, 1985년에는 '통일 민중 운동 연합' 의장이 된 문익환은, 1989년에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직접 통일 정책을 논의하였고, 1991년에는 범민련 남측 본부 결성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데 이어 1993년에는 범민족 대회 대회장을 맡았다. 그는 '국토 · 민족 · 역사' 의 통일을 표방하였으며, 특히 전적 으로 민중에 의한 평화 통일을 추구하였다. 그러므로 그 는 남북의 체제를 모두 인정하는 연방제 방식의 통일까 지 수용하였다. 그가 행한 방북 사건이라는 돌출 행위는 민족 자결적인 통일 표방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나치 치하에서 투쟁하였던 독일의 니묄러(M. Niemöler) 목사 가 통일 운동으로 1950년에 소련을 방문한 돌출 행위와 는 성격 면에서 다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문익환 목사 의 통일 운동은 민중에 의한, 그리고 민족간의 화해 및 증오를 몰아내는 (좌우를 다 포괄하는) 근본적 평화를 통한 통일을 이루려는 의도였다. 그가 노벨 평화상 후보 로 추천되기까지 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그의 정신에 대 한 세계적 응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두 번째 시집 《꿈을 비는 마음》(1978)에서 "통일을 이루지 못하 면, 우선 평화 공존이라도 하자" 라고 제의한 것은 곧 평 화에의 기원이 가득 차 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 참고문헌 문익환, <예언자와 역사>, 《신학 연구》 2집(1956), 한국신학대학, pp. 4~17/ 一, <예언 운동의 개척자들>, 《기독교 사 상》 59~63호(1962. 11~1963. 3), 기독교서회/ ㅡ, <이스라엘 전승사 의 신학>, 《신학 연구》7집(1960~1961), pp. 39~51/ ㅡ, <구약의 구속 신앙과 창조 신앙>, 《신학 연구》 8집(1984), pp. 78~92 ㅡ <구속사 와 창조사>, 《신학 연구》 10집(1967), pp. 45~70/ ㅡ, 《히브리 민중 사》, 삼민사, 1990/ ㅡ, 《새삼스런 하루》, 월간 문학사, 1973/ ㅡ, 《꿈을 비는 마음》, 화다출판사, 1978/ ㅡ,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 실천문학사, 1984/ ㅡ, 《두 하늘 한 하늘》, 창작과 비평사, 1994/ ㅡ, 《옥중 일기》, 삼민사, 1991/ 독교 대백과 사전》 6, 기독 교문사, 1982, pp. 550~551/ <평화 신문> 267호(1994. 1. 30), 19면. 〔金二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