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투쟁 文化鬪爭
〔독〕Kulturkamp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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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문화 투쟁을 주도한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
독일의 재상(宰相)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k, 1815~ 1898)가 가톨릭 교회를 국가 통제 아래 두기 위해 1871~ 1887년에 프로이센과 전 독일 지방에 걸쳐 벌였던 교회 와 국가 사이의 투쟁. '문화 투쟁' 이라는 말은 프로이센 의 과학자이며 자유주의 정치가인 피르호(R. Virchow)가 1873년 1월 17일 프로이센 주 의회에서 가톨릭 신자와 의 싸움은 '인간성을 위한 위대한 투쟁의 성격' 을 띤다 고 선언한 뒤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배경 : 1871년부터 1890년까지 재상을 역임하였던 비스마르크는 독일 제국의 건설을 위해 대내외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국회 내에는 반대파도 있었다. 진보 당(進步黨) 의원들과 함께 비스마르크 정책에 반대한 군 소 당파 중에는 사회주의자들, 하노버 왕국 부흥파, 폴란 드 민족주의자들, 알자스-로렌의 병합을 반대하는 의원 들이 있었다. 특히 상당수의 남부 독일 출신 의원들은 전 통적인 영방(領邦) 자치권을 지키고자 하였고, 프로테스 탄트 세력인 프로이센 중심의 국가 정책은 프로테스탄트 중심의 종교적 불관용 방침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하였다. 가톨릭의 입장을 대변했던 중앙당(中央黨)이 1871년 연방 국회에서 58석을 차지하자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던 비스마르크는 가톨릭 신자들이 독일 제국에 충성하지 않 는다는 불신을 더 갖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국가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과 연관되어 있었는데, 이는 독일 제 국이 성립되기 전인 1864년 교황 비오 9세(1846~1878) 가 국가의 교회에 대한 간섭을 비난한 것이라든가, 제1 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에서 교황 무류성의 교의가 결정됨으로써 국가에 대한 교황권의 우월성을 강조한 것 등이었다. 이러한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인 독일의 중 앙당은 비스마르크의 중앙 집권 정책에 반대하였다. 그러자 비스마르크는 제국을 자신의 창조물로 여기고 그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두 제국의 적으로 몰아세웠 다. 비스마르크는 중간파의 지도자 빈트호르스트(Ludwig Windthorst, 1812~1891)에 대해서 "누구나 사랑할 사람과 미워할 사람이 필요한데 나는 사랑하는 아내와 미워할 빈트호르스트를 갖고 있다" 고 말할 정도였다. 가톨릭 교 회를 탄압하려는 비스마르크의 의도는 의회의 다수 의원 들로부터 지지를 얻었고,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이나 보수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가톨릭 신자들이 애국심을 갖고 있지 않으며 교황의 지시를 따르는 자들로서 독일 독립이나 통일에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또 다수 의 보수주의자들은 완고한 루터파였는데 항시 교황청과 투쟁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근 대 문명의 자유주의적인 면과 물질 문명적인 면을 강조 하는 입장에서 가톨릭 교회를 반대한 진보파가 결과적으 로는 비스마르크를 지지하였다. 5월법의 제정 : 교회와 국가 사이의 투쟁은 교육에 관 한 권리를 둘러싸고 시작되었다. 1871년 7월 비스마르 크는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아 프로이센의 교육과 교 회 문제를 담당한 문화부 내의 가톨릭국(局)을 폐쇄하 고, 11월에는 성직자들이 설교 도중 정치에 관한 견해를 발표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1872년 3월에는 모든 종 교 학교가 국가 감찰을 받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6월 에는 종교 과목 교사들을 국립 학교에서 쫓아내기까지 하였다. 또한 예수회를 독일에서 추방하고, 12월에는 교 황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이에 가톨릭측이 교 사의 선택권 및 자격 부여의 권리를 주장하자 비스마르 크는 국가가 성직자 양성과 자격 심사를 해야 한다고 주 장하였다. 프로이센 의회에서도 1873년 5월과 1874년 5월에 이른바 '5월법' 이라는 반(反)가톨릭법을 통과시 켰는데, 이 법의 두드러진 특징은 프로이센의 가톨릭 교 회 소속 성직자들은 반드시 독일 시민이고 독일 대학 출 신이어야 하며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신학교는 국가 통제하에 놓이고 폴란드인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특별 조치로서는 모든 종교적 가 르침이 독일어로 행해져야 했다. 1875년 독일 전역에서 종교 의식 없이 거행되는 혼인을 의무화함으로써 이 투 쟁은 절정에 달하였다. 프로이센의 가톨릭 주교들은 교 황청의 승인 아래, 5월법에 반대하고 그것을 따르지 않 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프로이센 정부는 반대파 성직자 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투옥하거나 추방하였다. 이와 같은 가혹한 조치로 그 한 해 동안에 주교 6명이 투옥되 고 1,300개 이상의 성당이 폐쇄되었다. 〔가톨릭의 대항〕 독일 가톨릭 신자들은 일제히 일치 단결하여 반정부 투쟁을 벌였다. 교황 및 주교들의 행위 에 고무된 그들은 독일 전역에 걸쳐 조직적으로 대항하 였고, 의회 내의 중앙당 역시 종교적 자유 및 사회 개혁 을 주장하면서 반가톨릭 입법의 철회를 요구하였다. 그 리고 그들은 1874년에 치러진 선거에서 가톨릭 신자들 의 압도적인 지지로 의석이 60석에서 90석으로 늘었다. 이러한 가운데 반정부 운동은 점차 확대되어 일부 보 수파들조차 반종교적 입법에 반대하기에 이르렀고, 실리 주의자였던 비스마르크는 마침내 문화 투쟁을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다른 정책까지도 문화 투 쟁으로 위태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마르크스주의 의 위협이 점차 증대되어 가톨릭 중앙당의 지원이 필요 하게 되었다. 1878년 새 교황 레오 13세(1878~1903)의 즉위로 타협은 쉽게 이루어졌으며, 1880년에는 비스마 르크의 제안으로 프로이센 의회가 '5월법' 의 운영에 있 어서 정부의 재량권을 위임받았다. 이후 교황청과의 외 교 관계는 재개되었고, 1886년에 반가톨릭 입법 중 최 악의 것들이 공식적으로는 모두 철회되었다. 문화 투쟁 은 실패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가톨릭 당(黨) 의 세력을 증대시켜 정치적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데 기 여한 결과가 되었다. (→ 독일)
※ 참고문헌 Otto von Bismarck, Reflections and Reminiscences, Eng. trans. vol. 3, 1968/ E. Evans, The German Center Party(1870 ~ 1933), 1981/ Erich Eyck, Bismarck and the German Empire, Eng. trans. 2nd ed., 1964/ L. Gall, Bismarck, The White Revolutionary, vols. 2, 1986/ Georges Goyau, Bismarck et l'eglise, le culturkampf(1870 ~ 1887), vols. 4, 1911~1913/ Werner Richter, Bismarck, Eng. trans., 1964/ Michael Stiirmer, Regierung und Reichstag im Bismarckstaat (1871 ~ 1880), 1974/ A.J.P. Taylor, Bismarck, The Man and the Statesman, 1955/ B. Waller, Bismarck, 1985. 〔車河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