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혁명 文化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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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혁명 때 붉은 소책자를 들고 시위하는 군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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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혁명 때 붉은 소책자를 들고 시위하는 군중들.


일반적이고 사전적인 의미로 문화 영역의 혁명을 말한 다. 혁명을 통하여 중화 인민 공화국을 수립한 모택동 (毛澤東, 1893~1976)이 1919년 5 4 운동 때 전개된 중 국 문화의 혁신 운동을 처음으로 '문화 혁명' 이라고 불 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는 문화 혁명은 1966년 5 월부터 1976년 10월까지 중국에서 전국적으로 일어났 던 대중 운동적인 정치 투쟁을 의미한다. 그리고 중국에 서는 이것을 공식적으로 위대한 무산 계급의 문화 대혁 명이라고 불렀다. 〔배 경〕 1840년 아편 전쟁 이래 혼란하고 낙후된 중국 을 통일하여 새로운 국가로서 사회주의 중화 인민 공화 국을 수립한 모택동은, 국가 건설과 발전을 위해 혁명과 전쟁에 못지않은 많은 어려운 과제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뒤떨어진 공업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 해 그가 무모하게 시도했던 대약진 운동(大躍進運動)이 실패로 돌아가 혼란을 야기시켰으며, 한편 계층간의 모 순이나 봉건 제도 혹은 자본주의의 부활에 대해 항상 위 구심을 갖고 있던 모택동은, 사회주의 교육 운동을 전개 하여 이를 영구 혁명적으로 추진하면서 1963년 농촌의 인민 공사(人民公社)를 실시하여 사상 유례없는 모범적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하였다. 그러나 야심에 찬 그 의 농촌 사회의 유토피아적 계획은 생산성의 저하 등을 초래하여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때 미국 등 자본주의 진영과의 '평화 공존' 이라는 타협의 길을 택한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과 이념 분쟁 이 시작되었고, 국경 분쟁으로까지 확대되어 위기감이 조성되었다. 한편 남쪽의 월남에서는 식민지 지배국이었 던 프랑스가 물러난 자리에 세력 균형의 파괴를 막으려 는 미국의 간섭으로 인하여 1965년에 폭격이 시작되었다. 이처럼 남과 북에서 미국과 소련의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한 모택동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 게 되었는데, 대약진 운동이나 인민 공사의 실시 이후 다 소 약화된 그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계급 투쟁을 통하 여 봉건 잔재와 자본주의를 청산하고 굳건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모택동은 정치적 · 경제적 · 이념적 요인에 의해 사회 적 계층이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는 계급 투 쟁을 위한 정치적 전복은 무력에 의해 결정되며, 경제적 혁명은 행정적인 조치나 재산의 국유화 및 생활의 집단 화를 통한 방법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요인은 당시 중국에서 별다른 문제는 아니었다. 여기에서 모택동은 가장 중요한 이념적인 투쟁은 구사상 이나 구관습이 무력으로써가 아니라 정신적 투쟁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사상의 사회주의화는 단 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영구한 교육 과정을 통해서만 가 능하다고 믿어 "자기 자신을 위해 싸우고, 수정주의를 비판해야 한다”(鬪已批修)고 요구하였다.
〔전개 과정〕 제1 단계는 1966년 8월 중공 중앙 8차 11중전회(中全會)로부터 1969년 4월 중공 제9차 전국 대표 대회까지로, 이 시기는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고 홍 위병(紅衛兵)의 난동으로 대혼란이 야기된 전형적인 문 화 혁명적 시기이다. 조금 앞서 1966년 5월 항주(杭州) 에서 열린 정치국 확대 회의에서 뒷날 문화 대혁명의 계 획 문서이며 이론적 근거가 된 '5 · 16 통지(通知)' 가 만 들어졌는데, 이 회의에서는 모택동의 주도하에 임표(林 彪, 1907~1971), 진백달(陳伯達) 등에 의해 앞으로의 투 쟁을 위한 좌경의 이론으로서 반혁명적 수정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을 작성한 이 문서를 승인하였다. 물론 이 문서 는 당 내부용 비밀 문서로서 공개되지 않았다.
1966년 8월 모택동은 중공 중앙 8차 11중전회에서 <사령부를 포격하라, 나의 대자보여!>를 발표하고 "무산 계급 문화 대혁명에 대한 결정 16조"를 통과시켰다. 이 결정이 규정하고 있는 문화 대혁명의 대상은 소위 '자본 주의의 길을 걷는 당의 권력자와 자산 계급 반동 학술의 권위' 였다. "일체의 소의 귀신과 뱀의 신을 폭로하라"는 구호 아래, 유일한 제1 부주석이며 국방부장인 임표와 모택동의 부인 강청(江靑)의 선동으로 전국적으로 조직 된 청소년의 홍위병의 난동이 시작되었다.
자본주의의 길을 걷고 있다는 '주자파' (走資派)와 '반 동 학술 권위' 에 대한 공격이 맹렬히 전개되면서 각급 당 기구 및 행정 기구가 파괴되었고 극좌의 이념이 전국 을 휩쓸었다. 이러한 경향은 인민 해방군에서도 크게 확 산되었고 국방부장인 임표가 주도하였기 때문에 전국은 대동란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와 같은 홍위병의 난동 에 인민 해방군은 직접 관여하지는 않고 사태를 관망하 면서 모택동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때 중국 인민 해방군 의 기관지인 <해방군보>(解放軍報)는 이 운동을 '위대한 무산 계급의 문화 대혁명' 이라고 규정하였다.
모택동의 무정부주의에 가까운 자의적 지시나 군부의 비호를 받은 수백만 명의 학생들은 홍위병으로서 대자보 (大字報, 서양인들은 이를 벽신문이라고 함)나 군중 시위 및 파괴 또는 모욕으로 소위 반혁명적 지식인, 학자, 당직 자, 행정가들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구사상 · 구문화 · 구 습관 · 구풍속 등 소위 '4구(舊)' 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것으로의 보강을 주장하였으며, 북경대학에서 시작된 대 자보를 전국에 확산시켰다. 또 이를 통해 각종 통지나 선 동을 확대하며 언론 · 출판 · 집회 · 시위의 자유 등을 주 장하였고 이를 누렸다.
모택동과 강청이 그들의 배후에 있었으므로 홍위병의 조직은 전국의 각급 학교로 확산되었다. 홍위병들은 혁 명의 경험을 교환하기 위해 수도 북경 및 전국 각지를 여 행하였으며, 홍위병의 완장을 찬 모택동은 1949년 10월 1일 중화 인민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한 천안문에서, 광 장을 메운 홍위병들의 환호에 답례하였다.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기 전, 당시 북경의 부시장이며 역사학자인 오호(吳呼)의 사극인 《해서파관》(海瑞罷官) 은 훗날 '4인방' (四人幇)의 한 사람이 된 장춘교(張春 橋) 등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1966년 말, 중국은 이미 총체적인 혼란에 빠져 당과 국가의 기구가 거의 파괴되었다. 즉 정치국, 중앙위원회, 지방 비서 등의 복무자들이 20~30%로 줄어들었고, 안전 · 교육 · 사법 등의 관료 기구는 마비되었으며, 1966 년 테러 기간 중 지식인 등 72만 9천 명이 무고하게 박 해를 받아 그중 3만 4천여 명이 죽음을 당하였다. 1967년 1월 모택동의 지시로 인민 해방군은 '좌파를 지원하 고, 공업 노동자를 지원하고, 농민을 지원하며, 해방군의 관리와 훈련을 시행하는' 이른바 3지 양군(三支兩軍)의 새로운 임무를 맡았다. 이것은 당시의 무정부 상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지금까지 관 망만 하던 인민 해방군을 투입한 것이다. 군의 개입으로 사태는 수습되어 갔으나 문화 대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설치된 혁명위원회 등은 인민 해방군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1959년 모택동의 노여움을 산 팽덕회(彭德懷, 1898~ 1974)의 후임으로 국방부장이 된 임표는 1962년 이후 《모택동 선집》(毛澤東選集)에서 핵심적인 경구나 잠언 등을 뽑아 붉은 소책자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1967년 이 후 《모택동 어록》(毛澤東語錄)으로 인쇄 · 배포되면서서양에서는 이 소책자를 '마오 성경' 이라고도 부른다모택동에 대한 엄청난 개인 숭배가 시작되었고 '최고의 붉은 태양 , '붉은 등불' , '붉은 노선' , '위대한 스승' , '위대한 사령관' , '위대한 조타수 , '망원경과 현미경' 등의 최고의 찬사가 쏟아졌다. 이 소책자는 중국의 전통 적인 유교 경전인 《논어》(論語)와 대치되는 것으로, 뒤 에 거의 10억 부나 발행 · 배포되었다고 한다. 1949년 조국을 해방시킨 인민 해방군은 이로써 대학, 고등 학교, 출판사, 은행, 공장, 백화점, 관청, 공항 등을 다시 한번 해방시킨 듯하였다.
1968년 10월 중공 중앙 제8차 12중전회가 개최되었 지만, 많은 위원과 후보 위원이 자격을 박탈당하거나 비 판을 받아 겨우 과반수를 초과하였다. 이 회의에서 모택 동은 "이번의 문화 대혁명으로 무산 계급의 전제를 공고 히 하며 자본주의의 부활을 방지하고, 사회주의를 건설 하는 것은 완전히 필요하며 시기에 적절하다" 고 강조했 다. 특히 이 회의에서 대약진의 실패 이후 중국 경제를 회생시키는 데 주력한 국가 주석 유소기(劉少奇, 1898~ 1969)가 '반도, 내간(內奸) 및 공적(公敵)' 이라는 죄명 으로 당에서 영원히 추방되고 모든 직위를 박탈당한 채, 1969년 감옥에서 쓸쓸히 죽어 갔다.
제2 단계는 1969년 제9차 전국 대표 대회로부터 1973년 8월 제10차 전국 대표 대회까지로, 모택동의 신 임을 받아 후계자로 여겨진 국방부장 임표의 전성기였고 특히 인민 해방군의 활동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문화 대 혁명이 시작된 이래, 혼란을 야기시키며 모택동을 지지 하였던 홍위병들은 이제 고향으로 또는 지방으로 내려가 라는(下放) 명령을 받았는데, 이것은 도시에서의 혁명 경험을 지방에도 전파시키며, 반대로 농촌과 공장에서 이론이 아닌 실제의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955년부터 1965년까지 대략 120만 명의 청소년들이 지방으로 갔으며, 1968년부터 1970년 4월 사이에는 무 려 500만 명, 1970년 5월부터 1973년 말까지는 300만 명이 보내진 것으로 보아 1955년부터 1975년 말까지 대략 1,720만 명이 지방으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청소년들이 토지의 개간과 관개 시설 등의 농업 분야 및 교육과 위생 분야에 공헌하였던 그 기간 중 학교 교육이 중단되었음은 물론 정치적 감각의 상실자나 청소 년 범죄자들도 생겨났는데, 이들은 모두 정치적으로 이 시대의 소모품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골에 보내 지지 않은 홍위병들은 빨리 그들의 이성을 회복하여 무 기를 버리고, 구속자를 석방하면서 일상 생활로 복귀하 였다.
1969년 4월, 중국 공산당 제9차 전국 대표자 대회가 많은 당원들의 불완전한 조직 생활과 동북 지방의 국경 인 진보도(珍寶島)에서 소련군과의 무력 충돌 문제를 주 요 의제로 하여 모택동의 주재하에 북경에서 개최되었 다. 임표는 무산 계급의 전제 정치하에서 계속 혁명의 필 요성을 강조한 정치 보고를 하고 공산당의 헌장을 개정 하면서 당의 중앙 위원을 선출하였다. 문화 대혁명의 위 대한 업적과 풍부한 공적이 평가되고 좌경의 혁명 노선 이 통과되었으며, 더 나아가서 임표는 투(鬪爭) · 비(批 判) · 개(改革)의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였다. 이 회의는 곧 문화 대혁명의 잘못된 이론과 진일보한 실천을 합법 화하려는 시도였고, 이 회의에서 임표, 강청 등은 중공 중앙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 후 전국적으로 전개된 투 · 비 · 개의 운동은, 새로 운 건립의 자세로 중국 공산당을 정비하며 유소기의 수 정주의 비판, 계급 투쟁의 좌경 이론 강화, 노동자 계층 의 상층 영역 점령, 기구를 간소화하고 당의 간부를 하방 시키며 '5 · 7 간부 학교' 를 통해 혁명 좌파 사상을 전파 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 운동 중 특히 심각했던 것은 소 위 교육 혁명이었다.
1970년 6월 폐교한 지 4년 만에 고등 학교의 입학이 허용되었으나 입학 시험을 통한 학 업 능력의 평가 없이 노동자, 농민, 병사의 임무가 '대학 에 가서, 대학을 관리하며, 모택동의 사상으로 대학을 개 조해야 한다' 고 규정하였다. 특히 1966년부터 1977년 10월까지 12년 동안 중국에서 대학원 교육은 완전히 중 지되었으며, 학위는 부르주아의 사치라고 일체 배격되었 고 해외 유학도 중지되었다. 전문성보다 이념, 즉 사회주 의 사상이 강조됨으로써 엄청난 교육과 전문성의 낙후를 면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1971년 장춘교는 해방 후 17 년 간 모택동의 교육 기본 노선이 관철되지 않았다면서 무산 계급의 전제 정치와 세계관을 자산 계급이 침해했 다고 주장하였다. 1970년 8월 여산에서 열린 제9차 2중전회에서는 헌 법 개정과 국민 경제가 논의되었는데, 이때 국방부장 임 표가 차츰 모택동과의 불화로 무장 쿠데타(571 工程紀要) 를 계획하여 모택동을 시해하려다 발각된 후 비행기로 망명하던 중 몽고 상공에서 추락하여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문화 대혁명 중 계속되어 온 권력 투 쟁의 한 면이며 아울러 문화 대혁명의 이론과 실천의 실 패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기도 하였다. 임표의 실각으로 군대 내에는 심각한 위기가 조성되었고 이제 군의 역할 은 당과 행정부의 민간 관료에게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이는 모택동을 위해 홍위병을 뒤에서 지원하였고 다시 홍위병을 억제하면서 권력을 잡았던 군대가 본연의 위치 로 되돌아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3 단계는 민간 관료인 주은래(周恩來, 1898~1976)의 지도하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시기와 4인방의 전권 시대를 말한다. 1973년 8월 임표의 실각과 제10차 전국 대표 대회로 문화 대혁명은 사실상 끝나야 했다. 노련한 행정가인 주은래의 사태 수습으로 정상화의 길을 걷고 있긴 하였지만, 이에 대해 불안을 느낀 강청 등 4인방은 다시 한번 모택동의 힘을 배경으로 정권을 잡으려 시도 함으로써 문화 대혁명은 4인방이 실각하는 1976년까지 계속되었다.
임표의 실각 후, 주은래는 정당이나 정부에 군인 대신 민간인을 기용하고 많은 지식인과 학자들을 복권시켰으 며, 문학 · 종교 영화 등 혁명 중 정지되었던 일들을 다 시 시작하였다. 이것은 경제의 회복, 외교 정책의 정상 화, 교육 정책 등에서 착실한 성과를 보였으며, 특히 1973년 3월 10일 등소평(鄧小平, 1904~1997)의 정치 복 귀는 가장 큰 사건이었다. 문화 대혁명으로 축출되었던 많은 관료들은 그들의 자리로 돌아왔으나, 그 당시 주은 래는 공개하지 않은 암과의 투쟁으로 그의 업무를 대부 분 등소평에게 맡기고 있었다. 주은래와 등소평의 현실 적 정책은 신좌파인 4인방들에게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 다. 이것은 아마도 1966년 8월, 1967년 4월, 1968년 5 월에 이어
1973년에 좌파의 네 번째 공격으로 문화 대 혁명 이후 시작된 것이다. 이들 좌파의 등장은 세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반조류(造反有理)의 표방 및 새 로운 세력의 등장과 대중 운동이었다. 4인방의 한 사람 인 왕홍문(王洪文)의 서열은 모택동과 주은래에 이어 주 덕(朱德)을 앞서 3위에, 장춘교와 강청은 5위, 6위이며, 왕흥문은 정치국원과 군대 내에서도 많은 자리를 차지하 였다. 1973년 7월 모택동은 공자를 존경하고 법가를 반대하 는 '존공반법' (尊孔反法)이라고 임표를 비판하면서, 그 해 8월 10차 전국 대표 대회에서 그를 반혁명 분자로 규 정하였다. 8월 <인민일보>는 공자 비판의 문장을 실으면 서 1974년 1월 강청이 편집한 <임표와 공맹(孔孟)의 도 (道)>를 가지고 공자와 임표를 비판하는 '비림비공' (批 林批孔)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공산당과 임표 간의 공자 존경과 공자 반대의 투쟁은 사회주의 사회의 진보와 퇴보의 문제이며, 혁명과 반혁명 간 두 노선의 투 쟁' 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는 이 운동을 추진하는 것은 '무산 계급 문화 대혁명의 성과를 공고히 하는 것' 이라 고 강조하였다. 1974년 1월 4인방이 북경에 주둔하는 군대와 당 기구에서 비림비공을 위해 동원에 열을 올리 며 선동하고 있을 당시 <인민일보>, <광명일보>, <홍기>, <해방군보> 등 당과 군의 기관지는 물론, 각종 학술 및 문학, 예술 잡지 등도 비림비공의 글들로 가득 찼다. 주 은래는 '영웅' 또는 '재상' 등으로 비유되어 공격을 받 았으며, 한고조의 황후인 여후(呂后)와 당의 고종 황후 인 측천무후(則天武后, 623~705)는 극히 찬양되어 강청 의 야심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었고, 특히 만리장성을 쌓 고 분서갱유를 실시하는 등 강력한 독재 정치를 시행한 진시황을 크게 찬양하고 수천 년의 중국 사상사를 유가 와 법가의 투쟁사로 규정하는 영사사학(影射史學)이 이 시대의 풍조를 이루었다.
따라서 역사 속의 사상가들은 모두 유가와 법가로 양 분되어 공격과 찬양을 받는 흑백 논리가 이 시대의 특징 이었다. 즉 역사상의 진보적이고 업적이 많은 사람들은 법가이며, 반대로 보수적이고 유심주의적인 경향이 강하 였던 사상가들은 유가로서 함께 매도되었다. 이 운동 기 간 중에는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 곡부에 살고 있는 그의 후손들이 쓰던 가구 등을 잡지의 사진으로 실어 욕설을 퍼붓는 등 어처구니없는 광기를 서슴지 않았으며, 공자 와 유교가 학문적이 아닌 대중 운동과 정치 운동으로 이 처럼 전국적인 비판을 받은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 었다.
1974년 10월 4일 모택동은 입원 치료 중인 주은래 총 리 대신 등소평을 국무원 부총리로 지명하였는데, 강청 등 4인방은 모택동에게 주은래, 등소평, 엽검영(葉劍英) 등을 비난하면서, 자기 당의 각료 조직을 제의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이로써 등소평은 제1 부총리 및 군사위원 회 부주석과 인민 해방군 참모장으로서 막강한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1975년 2월 주은래가 주재한 당· 군 · 정의 정치국 회의에서 진의(陳毅), 엽검영 등은 4인 방측의 강청, 진백달 등과 당의 영도 문제, 노(老)간부의 대우 문제, 군대의 안정 문제 등에 관한 오랜 논쟁 끝에 그들의 야심을 분쇄하고 사태를 정상화시켰는데, 이를 '2월 항쟁' 또는 '2월 역류(逆流)' 라고 한다.
주은래는 이미 병세가 위중한데도 불구하고 정치적으 로 임표의 반당 집단을 진압하고 등소평을 복권시켰으 며, 침체에 빠진 농촌의 인민 공사에 개인의 이익을 위한 사유지를 분배하는 등 경제적인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 다. 특히 중화 인민 공화국의 수립 당시부터 노련한 외교 적 능력을 보였으며, 서구 세계에 대해서도 폭 넓은 안목 을 갖고 있던 주은래는 1950년 한국 전쟁 이래 20년 이 상 적대적이었던 미국과의 접근을 시도하여 미국의 유명 한 외교관인 헨리 키신저를 통해 1972년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으로 양국 관계의 정상화를 시작하였다. 이보 다 조금 앞서 1971년 10월, 건국 이래의 숙원이었으나 미국의 거부권 행사로 불가능했던 국제 연합(UN) 가입 을 실현시켰으며 UN 안전 보장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 자 리를 확보함으로써 타이완의 국민당 정부가 UN에서 탈 퇴하고 그 자리를 넘겨받게 되었다.
문화 대혁명 중 가장 큰 타격을 받았던 문화 교육 면에 서도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전문성을 무시하였던 정책으 로부터 이념과 전문성을 함께 중요시하는 정책(又專又紅) 으로 정상화를 위해 박차를 가하였다. 1975년 1월 북경 에서 개최한 제4계 전국 인민 대표 대회 제1차 회의에서 주은래는 병석에서 쓴 <정부 공작 보고>를 통해 '금세기 내 농업, 공업, 국방, 과학 기술의 전면적 실현을 위한 사회주의 현대화' 정책을 강조하였다.
1975년 봄, 등소평의 등장이나 좌경 이념에서 탈피하 는 현대화 정책에 불안을 느꼈던 4인방은 경험주의의 고 취가 현재 당면한 주요 위험이라고 비난하면서 그 해 8 월, 모택동의 《수호전》(水滸傳) 비평을 인용하여 이 소 설 속의 주인공 송강(宋江)을 투항주의자라고 규정하면 서 사회 전반의 수정주의(修正主義)를 대중 매체를 동원 하여 맹렬히 비난하였다.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주은 래와 등소평의 실용적인 현대화 정책에 대한 비판인 것 이다. 같은 해 11월 모택동은 '등소평을 비판하고 우경 화하는 풍조에 대한 반격' 을 암시함으로써 정치 정세는 다시 한번 급진적 좌파, 즉 4인방에게 유리하게 전환되 었다. 당시 모택동은 '일체를 타도하자' 는 문화 대혁명 의 착오를 일부 인식하고 등소평을 부총리로 기용하였으 나, 그의 문화 대혁명의 착오를 시정하는 것은 용인하기 어려웠던 듯하다. 여기에 강청 등 4인방의 정치적 모략 이 작용하였음은 틀림없다. 4인방은 문화 대혁명에 불만 을 갖는 것은 우경화로 정세를 전복시키려는 야욕이라고 공격하면서 개혁파들을 '민주파' , 또는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주자파' 라고 불렀으며 주은래 총리가 제의한 "4개 현대화는 자본주의화이며 인공 위성이 하늘에 뜨면 붉은 기(紅旗)는 땅에 떨어지게 된다"고 한 실용주의 노선을 공격하였다.
1976년 1월 8일 주은래 총리가 사망하고 모택동의 지 지를 받는 화국봉(華國鋒)이 총리가 되자, 주은래 총리 를 추도하는 인민 군중들은 북경, 남경 등 주요 도시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애도의 시위를 계속하였으며, 4월 들 어 4인방의 강력한 금지에도 불구하고 학생 · 당 간부 · 노동자 · 해방군 등 100만의 군중들은 엄청난 양의 조화 (造花)를 놓고 추도의 시를 낭독하기도 하면서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서 항의, 애도의 시위를 벌였다. 4인방은 이들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이 난동의 책임을 등소평에게 지운 모택동은 그의 모든 직책을 박탈함으로써 문화 대 혁명 이후 두 번째로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이러한 사건 은 4인방에 대한 불신과 주은래, 등소평이 제창한 실용 주의적 현대화 정책이 그 시대의 역사적 조류였음을 보 여 주는 것이다.
1976년 9월 9일 중화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고 문화 대혁명을 이끌었던 모택동이 사망함으로써 새로운 시대 가 예고되었다. 이때 강청 등 4인방은 은밀히 정권을 장 악하려 하였으나 10월 6일 화국봉, 엽검영 등에 의해 체 포됨으로써 문화 대혁명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 다. 10월 12일 등소평은 광주로부터 다시 돌아와 1990 년대 후반의 중국 현대화라는 또 하나의 혁명적 시대를 이끌어 갈 준비를 시작하였으며, 강청 등 4인방을 체포 한 후 재판에 회부하고 문화 대혁명 중에 밀려났던 당 간 부와 행정 관료 및 학자와 지식인들을 복직시키면서 10 년 간의 대재앙을 치유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였다.
〔문화 혁명과 중국 천주교회〕 10년 간 지속된 문화 혁 명은 중국 천주교회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49년 공산화 이후, '자립 교회' 운동을 추진하던 중국 정부는 자치(自治) · 자양(自養) · 자전(自傳)의 삼자 운동(三自 運動)을 전개하여 종교 분야에 있어서 외국의 영향을 배 제하였다. 그리하여 1957년 7월 '자립 교회' 를 목표로 하는 '중국 천주교 애국회' 가 설립되고, 이듬해 중국 교 회가 자체적으로 주교를 선출함으로써, 중국 교회와 교 황청과의 관계는 실질적으로 단절되었다. 중국 교회와 교황청과의 단절은 또한 중국 교회 자체의 분열을 초래 하였다. 즉 애국 교회를 받아들이는 지상 교회와 그것을 거부하고 보편 교회를 지향하는 지 하 교회로 분열되었던 것이다. 지하 교회 활동은 불법으로 간주되어 탄 압받았고, 수많은 사제들이 징역형 또는 강제 노동에 내몰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6년에 발생 한 문화 혁명은 중국 교회에 또 한 번의 변화를 가져왔다. 문화 혁명 시 기에 중국 교회는 지상 · 지하 교회 를 막론하고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비록 '애국회' 에 속했다 하더라도 거의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신자들이 투옥되었고, 홍위병(紅衛 兵)들은 모든 교회를 폐쇄 · 파괴하 거나, 성서와 종교 서적들을 공개적 으로 불살랐다. 그리하여 모든 종교 활동이 금지되었고, 이제 중국의 유 형의 교회는 소멸되어 자취를 감추 게 되었다. 1976년 문화 혁명이 끝나자 중국 정부는 대내외적으 로 개방 정책을 채택하고 현대화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종교 자유화 정책도 시행하였다. 이에 종교 활동이 재개 되고, '중국 천주교 애국회' 도 1979년부터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80년에는 '중국 천주교 주교단' 과 '중국 천주교 교무위원회' 가 창설되어, 중국 교회는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황청과 의 관계, 지하 교회와의 문제는 여전히 중국 교회가 해결 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결 과〕 1975년 4인방 등의 좌파들은 10년 간의 문화 대혁명으로 '모택동 사상의 제도적 학습, 혁명 원리의 확산, 혁명 연극의 발전, 마르크스 이념의 대중화, 공 인 · 노동자 · 병사의 대학 교육, 청소년의 하방, 지방의 의술 확산, 적각의생(赤脚醫生), 반유교 투쟁, 노년과 청 소년의 혁명적 연결, 공인 · 농민 · 병사의 교육, 5 · 7 간 부 학교, 교육과 문화 영역에서 농업 · 공업 · 상업의 통 일된 모델' 등 커다란 성과를 가져왔다고 스스로 평하였 는데, 대부분이 바로 혁명이 끝나면서 부정적으로 평가 되었다.
한편 당의 입장이나 많은 평가자들은 문화 대혁명으로 국가와 인민은 엄중한 좌절과 손실을 입었으며, 군중들 은 잔혹한 박해를 받았고 당과 정부의 여러 제도는 파괴 되었으며, 인민의 수입이 5천억 원이나 손실을 보아 생 활 수준이 크게 낮아졌다고 평하였다. 특히 과학과 문화 및 교육 사업의 큰 피해로 선진국들에 비해 과학 기술이 더욱 뒤지는 결과를 가져왔고 역사와 문화 유산들도 크 게 파괴되었으며, 사회의 우량한 전통이나 도덕이 크게 손상되어 3대를 지나야 회복이 가능할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무정부주의와 좌파적 극단주의 등이 사회를 지배하였는데 이는 전국적으로 구조적인 혼란과 뒤죽박죽이 된 사회의 처참한 모습을 남겼다. 특히 외교 에 있어서도 건국 초기부터 주은래에 의해 미국, 소련에 맞서 제3 세계에 확립하였던 중국의 영향력과 이미지는 산산히 부서져 버렸으며, 교육 분야에 있어서 피해는 더 욱 커 이념을 강조하면서 전문적 능력과 직업적 기능을 무시하여 혼란 속에서 크게 뒤떨어졌던 한편, 이 동란에 동원되었던 수천만 명의 청소년들은 불필요한 일을 위해 희생된 한 시대의 소모적 세대였다.
혁명의 목표로서 주장했던 유소기주의에 대한 공격은 결국 실패하였고,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 역시 주체 세력 들의 관료화로 실패했다. 그들이 강조한 대중 노선이라 는 것도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몇 사람에 의해 좌우되었는 데, 등소평이 정계에서 두 번째로 쫓겨날 때, 인민의 이 름으로 박수를 보냈던 대중이 두 차례 그의 복귀에 대해 또다시 환영의 박수를 보내는 모순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영 향〕 위에서 본 여러 결과들은 문화 대혁명의 영향 으로 포함시킬 수도 있다. 문화와 사회를 파괴한 10년 간의 광란에 가까운 혁명을 통하여 중국의 인민 대중은 두 가지의 명백한 입장, 즉 10년 간의 권력 투쟁의 먼지 속에서 그들이 지향해야 할 길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첫 째로, 중국 인민들은 이제까지의 혁명적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현실과 세계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이미 그들이 지적할 수 있었던 여러 착오와 취약성을 확 대경으로 볼 수 있게 되었고 더 이상 모택동의 이념으로 부터 아무런 희망을 갖지 않게 되었다. 새 중국의 수립 후 30년 간 목표로 하였던 정책들이 이제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계급 투쟁은 우 상 숭배 같은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되었고, 계급의 적으 로 여겼던 유럽의 식민적 지배자, 일본 제국주의자, 지방 의 지주, 도시의 자본가들에 대한 생각도 달리 해야 했 다. 즉 그들에게는 이제 부르주아나 수정주의, 또는 싸워 야 할 적이나 내용이 달라진 것이다. 둘째로, 문화 대혁 명의 경험을 통해 중국의 인민 대중은 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 감각을 찾게 된 것이다. 이는 적어도 모택동 사 상의 모델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교훈을 얻게 된 것이 다. 중국인들의 모습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인들이 히틀러의 제3 제국 후에 가졌던 태도와 유사했으며 어떻 게 그렇게까지 될 수 있었는가에 대해 사람들은 회의하 게 되었다. 우연이 아닌 역사로서, 또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로서 문화 대혁명 기간 중의 부끄러운 일들을 회상하면서 그들은 새로운 역사 평가의 능력과 방향 감 각을 가지게 되었다. 문화 대혁명의 참담한 역사가 없었 다면 아마도 중국에는 그처럼 결정적인 개혁 과정은 없 었을지 모른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정열적으로 보 여 주기 시작한 '국가와 사회의 재정상화 및 힘찬 현대 화 과정' 은 아마도 불가능하였을지도 모른다.
〔의 의〕 중국 지도자가 규정한 '위대한 무산 계급의 문화 대혁명' 이라는 개념은 전개 과정이나 결과로 보아 모순 투성이였다. 그의 규모나 영향의 범위 외에는 위대 한 것은 없었으며, 특별히 무산 계급에 의해 무산 계급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일반적으로 문화와는 거리가 먼 것 으로 광범위하게 문화가 파괴되었을 뿐이며, 뚜렷한 목 표와 내용을 가진 혁명도 아니었다고 평가된다. 이 개념은 건국 초기부터 존재해 오던 혁명적 좌파, 즉 모택동, 임표, 강청 등의 극좌파와 유소기, 등소평으로 대표되는 실용주의적 노선 간의 대립과 관계되는 것이었 다. 한편 대외적으로 1960년대 초 이래 소련과의 이념 논쟁 및 국경 분쟁과 베트남에서의 미국 개입 등에서 오 는 불안 등이 겹쳐, 국가의 안전과 이상적인 사회주의 사 회를 건설하려 하였는데 이것은 1840년 아편 전쟁 이후 중국이 항상 추구해 온, 근대화를 위해 대외적 관계와 국 내의 정비를 위한 중국적인 농촌 사회의 이상적 실현 과 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는 중국 공산당의 평가나 객관적으로 보아 도 크게 실패한 것이었고 막대한 손실과 수십 년 간의 역 사적 퇴보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되었다. 중국의 장구한 역사적 과정에서 볼 때, 춘추 전국 시대를 통일한 진(秦) 왕조나 근 370년 간의 혼란을 극복한 6세기 말의 수(隋) 왕조가 겪은 역사의 중력과 도전에 비교할 수도 있을 것 이며, 서양의 침략과 왕조의 붕괴 이후 계속되어 온 혼란 의 극복, 대외 관계의 개방 조정, 근대화의 방향과 내용 을 위한 진통기이며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조정기였다고 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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