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마르코. 서울 출생. 한국에서 세 번째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고모 강 마리아의 권면으로 입교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20여 세까지는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 블랑(Blanc, 白) 주교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종현(鐘峴)의 한한학교(韓漢學校)에서 공부하던 중 1883년 4명의 신학생과 함께 페낭(Pinang) 신학교로 유학하였다. 그러나 열대 지방의 특이한 기후 풍토 때문에 1882년부터 3년 동안 유학 온 조선 신학생 21명 중 7명이 병들어 죽자 1886년부터 신학생들의 귀국이 시작되었다. 강도영은 1892년 페낭의 신학생들이 모두 귀국할 때 같이 귀국, 새로 설립된 용산(龍山)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1896년 4월 26일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주례로 약현(藥峴, 현 중림동) 성당에서 강성삼(姜聖參, 라우렌시오),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그 해 5월 20일에는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된 미리내의 초대 주임 신부로 부임, 선종할 때까지 34년 동안 그곳에서 사목하였다.
부임 당시 안성(安城) 일대에는 동학군(東學軍)과 의병들이 많이 몰려 있었고, 1896년의 민비 시해(閔妃弒害) 사건과 이에 이어 발생한 아관파천(俄館播遷) 등으로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선교에 전념하여 미리내 성당을 비롯하여 몇 개의 교회 건물을 건립하였고 한때 안성 · 양성(陽城) · 용인(龍仁) · 진위(振威) · 수원(水原) · 이천(利川) 등지까지 관할하였다. 또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와 페레올(Ferréol, 高) 주교가 묻혀 있는 산을 기증받아 교회 묘지로 조성하고, 1928년 김대건 신부 묘소 옆에 기념 경당을 건립하였으며, 외교인들에게 양잠(養蠶)과 농업 기술을 가르치는 등 교우 · 외교인을 가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사목하였다. 강도영 신부의 이러한 행동은 한말 애국 계몽(愛國啓蒙) 운동의 맥락을 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29년 3월 12일 공소 순방길에 걸린 염병(染病)으로 인해 67세로 선종하였다. 장례 미사에는 800여 명의 교우와 안성 군수를 포함한 100여 명의 외교인들이 참석하였으며, 34년 동안의 성직 생활 전부를 바친 미리내에 안장되었다. 외교인들은 강도영 신부의 공덕을 기리고자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건립하려 하였으나 교우들의 권고로 중단하였다. (→ 강성삼 ; 미리내 본당 ; 정규하) 〔尹善子〕
강도영 (1863~1929)
姜道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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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영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