뮈텔, 귀스타브 샤를 마리 Mutel, Gustave-Charles-Marie(1854~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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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교.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 제8대 조선 대목구장. 제8대 서울 대목구장.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한국 이 름은 민덕효(閔德孝). 1854년 3월 8일 프랑스 랑그르오트-마른(Langres-Haute-Marne) 주(州) 둘러방(Doulevant) 군의 블뤼머리(Blumery)에서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과 누나가 있었고, 동생은 대학 다닐 때 사망하였다. 그의 부모는 자작농으로 부지런히 농사 를 지으며 넉넉한 생활을 영위하였고 자식들에게도 농사 일을 가르쳤는데, 뮈텔은 아버지의 농사일을 돕던 이 시 절을 만년까지 즐겨 회상하였다. 세 형제들은 처음에 외 삼촌이 교장으로 있던 주앙빌(Joinville) 중학교에서, 그 후에는 랑그르(Langres) 소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당 시 랑그르 소신학교는 선교사 양성소였다. 어디에서나 근면하고 뛰어난 학생이라는 평을 받았던 뮈텔도 거기서 선발되어 1873년 10월 4일 삭발자로서 파리 외방전교 회 신학교에 들어갔다. 1877년 2월 4일 뮈텔은 사제로 서품되는 동시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병인박해(1866) 이후 10년 동안 단 한 명의 선교사도 없었던 한국에 2명의 선교사가 입 국한 것은 그가 서품받기 1년 전의 일이었고, 한 달 전에 는 배편으로 2명의 선교사가 한국으로 출발하였었다. 뮈 텔 신부는 한국 선교사로 임명됨과 동시에 한국 순교자 들에 대한 시복 수속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학생 신 분으로 로마 대표부에 잠시 체류하였을 때 이미 이에 관 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으나, 시복 수속이 진행 중인 통 킹(Tonkin)에서 실무적인 일을 더 배우고자 잠시 그곳에 서 몇 달 동안 머무른 후 만주로 떠나 그 해 11월 요동 지방의 차쿠(岔溝)란 작은 마을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눈이 많이 내리기 때문에 선교사들에게는 노트르담 데 네즈(Notre Dame des neiges, 눈의 성모)란 별명으로 불리던 교우촌이었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두세(C.E. Doucet, 1853~ 1917) 신부와 로베르(A.P. Robert, 1853~1922) 신부가 리델 (F.C. Ridel, 1830~1884) 주교와 함께 한국으로 떠난 후였 기 때문에 그는 좀더 일찍 도착하여 리델 주교를 따라가 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는 동안 한국어와 한문을 열심히 공부하 였는데, 마침 《한불자전》의 편집이 끝나 있었으므로 그 는 그것을 말 공부 삼아 완전히 다 필사하고는 끝에 "인 내는 일을 완성한다"는 의미 있는 서명을 남겼다. 그러 는 동안 한국에서 체포된 리델 주교가 추방되어 만주로 돌아왔고 이어 드게트(V.M. Deguette, 1848~1889) 신부도 같은 신세가 되어 만주로 돌아왔다.
뮈텔 신부는 3년을 기다린 끝에 1880년 5월 리우빌 (A. Liouville, 1855~1893) 신부와 함께 한국 입국을 시도하 였으나 실패하였고, 10월 24일 다시 입국을 시도하였 다. 이번에는 권치문(權致文, 타대오)의 안내로 입국에 성공한 그들은, 황해 연안에서 조선 신자의 배로 갈아타 고 11월 11일 황해도 장연(長淵)에 상륙하여 인근의 한 교우 옹기촌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뮈텔 신부는 이듬해 초 배천〔白川〕으로 피신하였으나 인근의 소요로 3월에 다시 서울로 피신하였다. 당시 한국에는 새로 도착한 2 명의 선교사 외에 3명의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었으나 모 두 지방에 있었으므로, 뮈텔 신부는 서울에 남아 서울과 경기도의 공소들을 순방하며 성사를 주었고, 가을에는 멀리 강원도와 황해도 지방까지 순회하였다.
뮈텔 신부는 성사를집전하는 일 외에도 교구의 재무 를 담당하였다. 이미 파리를 떠날때 임무가 주어진 순교 자들에 대한 시복 심사는 사정상 1882년 5월 11일에야 시작될 수 있었다. 이후 1885년 파리로 소환될 때까지 뮈텔 신부는 판사의 자격으로 82차례에 걸쳐 42명으로 부터 증언을 듣고 심사를 하였다. 그는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을 만족스럽게 해냈다. 한국의 관습도 잘 알고 있었 고, 고상한 말을 구사했으며, 풍채도 좋았던 그는 1885 년 초 신학교의 지도자로 소환되자 그 해 5월 배편으로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프랑스로 돌아갔다. 나가사 키까지는 상투를 하고 한복을 입은 채로 갔다.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5년 동안 지도자로 있으면서 교리 신학과 전례를 가르쳤고, 참사회의 서기와 일 본 · 한국 · 만주 세 포교지의 경리 일도 담당하였던 뮈텔 신부는, 맡은 일에 충실하고 또 모든 일에 있어서 매우 규칙적이었던 까닭에 지원자들에게는 진정한 선교사의 모델로 비쳤다. 파리에 있는 동안에도 그의 마음은 늘 한 국에 있었고, 그의 큰 기쁨은 한국 포교지에 대한 소식을 듣는 것이었다. 1890년 2월 21일 블랑(J. Blanc, 1844~ 1890) 주교가 사망했다는 전보가 파리에 도착하였다. 뮈 텔 신부는 블랑 주교를 계승하게 되어 그리던 한국에 다 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의 교구장직은 향후 43년 간 지 속되는데 처음 21년은 조선 대목구장으로, 다음 22년은 서울 대목구장으로 재직하였다.
〔조선 대목구장(1890~1911)〕 1890년 8월 4일 교황청 으로부터 밀로(Milo)의 명의 주교로서 조선 대목구장에 임명되었다는 전보를 받은 뮈텔 신부는, 그 해 9월 21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성당에서 파리 대교구장 리샤르 (Richard) 추기경으로부터 주교로 성성되었다. 이때 그는 '순교자들의 꽃을 피워라' (Florete flores martyrum)를 주교 문장의 표어로 택하였는데, 그가 일생을 통하여 이룩한 최대의 업적도 이 표어의 실현의 결과였다. 12월 8일 로 마로 가서 교황 레오 13세를 알현하고 12월 14일 마르 세유 항을 떠나 1891년 2월 19일 부산에 도착한 뮈텔 주교는 다시 배편으로 제물포를 거쳐 2월 23일 오후에 모든 신부와 교우들이 운집한 가운데 대환영을 받으면서 서울에 입성하였다. 그 동안 한국은 너무나 변해 있었다. 이제는 숨는 것도, 상복을 입는 것도 필요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의 주교직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백일하에 시 작될 수 있었다.
뮈텔 주교의 교구장으로서의 43년 간의 활동과 업적 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목적에서 제시 된 정신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파리 외방전교 회의 목적은 첫째, 적합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성직자로 양성하는 일, 둘째는 새 신자들을 적절히 돌보는 일, 셋 째는 외교인들의 개종을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그 순위가 다똑같은 것이 아니다. 첫째 일 은 둘째보다 우선하고, 다시 이것은 셋째 일보다 우선해 야 하며, 이 순서가 바뀌어서는 절대로 안되었다. 뮈텔 주교가 부임한 즉시 방인 성직자 양성부터 주력하였고 또 용산 신학교 건물부터 지으려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입 교우들을 적절히 돌보는 일이란 당시로서는 해마 다 봄 · 가을로 교우들을 방문하고 그들에게 성사를 주는 것이었다. 뮈텔 주교가 부임할 당시의 신자수는 17,000 명에 불과하였으나 그 후 해마다 평균 4,000~5,00명 씩 폭발적으로 증가함으로써 20년이 지난 1910년에는 그 수가 무려 73,500명에 달하였다. 이것은 셋째 목적 에 기울인 노력의 결과라기보다는 선교에 매우 유리하였 던 시기 자체에서 얻은 성과라고 여겨진다. 어쨌든 뮈텔 주교에게는 해마다 급증하는 신자들까지 고려한 성사 집 전이 외교인을 개종시키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더 중요 하였다. 실제로 그는 이에 대비하여 1910년까지 선교사 를 20명에서 50명으로 증원시키고 한국인 신부도 18명 을 배출시켰다.
뮈텔 주교는 선교사들을 격려하고 교우들과 직접 접촉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여 가능한 한 자주 또 오랫동안 사목 방문을 하였다. 또한 이러한 사목 방문으 로 본당을 분할하여 새 본당을 설립하는 데 필요한 정확 한 지식을 얻었다. 이 시기는 본당 발전의 시기로 특징지 울 수 있을 정도로 새 본당들이 많이 생겨났다. 1890년 13개 본당에 불과하던 것이 1910년까지 무려 36개 본 당으로 늘었고, 지역적으로도 남쪽으로는 제주도 남단에 서부터 북쪽으로는 멀리 국경을 넘어 간도(間島)에 이르 기까지 크게 확대되었다. 본당 발전은 동시에 성당 건축 을 촉진시키는 계기도 되었다. 초라한 한국식 성당에서 처음으로 웅장한 서양식 건물이 건축되기 시작하였는데, 1892년의 약현(藥峴, 현 중림동) 성당에 이어 1898년에 는 뮈텔 주교의 숙원이던 종현(鐘峴, 현 명동)의 주교좌 성당이 완공되었다. 그는 순교자들의 승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에서 그의 표어가 실 현되기 시작하는 것을 보는 듯 감회가 깊었을 것이다.
뮈텔 주교는 간접 선교의 일환으로 교육과 언론에도 관심을 보였다. 당시 교회가 경영하는 많은 초등학교의 신자 교사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독자적으로 사범 학교를 경영할 수밖에 없었다. 이 교육 사업을 맡아 줄 수도회를 물색하고자 뮈텔 주교는 1908년 일본과 유 럽 각국을 두루 방문하였고 간신히 독일의 상트 오틸리 엔의 베네딕도 수도회로부터 한국 진출의 승낙을 얻어냈 다. 베네딕도회 회원들은 곧 서울에 진출하여 수도원부 터 설립하였는데, 이것은 한국 최초의 남자 수도원이라 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이어 그들은 1910년에 실업 학교 인 숭공학교(崇工學校)를, 이듬해에는 사범 학교인 숭신 학교(崇信學校)를 개교하였다. 그러나 숭신학교는 일제 의 탄압으로 2년 만에 문을 닫았고, 숭공학교도 재정난 으로 점차 그 유지마저 어려워지게 되었다. 1906년에 간행하기 시작한 <경향신문>은 순한글로 된 주간지였는 데 신자들만이 아니고 미신자들까지, 나아가 해외에까지 많은 독자를 확보함으로써 한때는 그 장래가 유망해 보 였으나, 이것 역시 일제의 언론 탄압에 못 이겨 4년 만인 1910년에 폐간되고 말았다.
이 시기는 복음 전파에 유리한 시기였으나 한편 이를 방해한 장애들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전쟁과 도처 에서 계속된 반란과 소요가 큰 장애였다. 특히 청일전쟁 으로 이어진 갑오농민전쟁은 교회에 많은 희생을 초래하 였고, 여기에 교안(敎案)이라는 또 다른 장애까지 겹쳤 다. 한불조약의 결과로 선교사들의 조건은 향상되었으나 한국인 신자들의 조건이 향상된 것은 조금도 없었다. 개항지 밖에서는 선교사들도 본당을 설립하는 데 필요한 토지를 구입할 수 없었고 건물을 세울 수조차 없었다. 이런 이유로 지방에서는 선교사와 지방 관리 사이에, 일반 주민과 신자 사이에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이것이 교회 사에서는 사군난(私窘難)으로 불리고 민족사에서는 교 안으로 불리는 사건들이다. 그 두드러진 사례가 19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제주교안과 1903년 황해도에서 일어 난 해서교안(海西敎案)이다.
뮈텔 주교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1894년 노불동맹(露佛同盟)이 체결된 후 뮈텔 주교와 한국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반로 (反露)에서 친로(親露)로 기울어졌는데, 그것은 동시에 배일(排日)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친로 배일' 의 정치적 배경에서 뮈텔 주교는 청일전쟁 이후 고종(高宗) 에게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도록 권유하였으며(俄館播 遷), 1904년에는 헤이그(Hague)로 보낼 밀사를 고종에 게 추천하고 그들의 파견을 위하여 중국 상해에 피신 중 이던 파블로프(Pavlov) 러시아 공사와 서신까지 교환하 였다. 청일전쟁 이후 한국에 일본과 러시아 두 세력만 남 게 되자 고종은 이 두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제3국인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이려 하였고, 뮈텔 주교도 이 점에 서 의견을 같이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문제로 뮈텔 주교 는 1895년 이래 고종을 세 번이나 만났으며 때마침 방 한한 보몽(Beaumont) 프랑스 제독을 고종에게 소개하기 까지 하였다. 한편 보몽 제독은 프랑스 정부에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건의하였으나, 매우 적극적이었던 뮈텔 주교 의 입장과는 달리 프랑스 정부는 이 문제로 한국에 개입 하기를 꺼렸다. 그 후 러일전쟁에서의 러시아의 패전은 뮈텔 주교의 친로 입장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고, 1909 년에 일어난 안중근(安重根, 토마스)의 의거는 뮈텔 주 교로 하여금 친일 입장으로 전환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 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10년에는 한일합병으로 민 족사에서 새로운 시기가 시작되었고, 또 1년 후에는 뮈 텔 주교가 서울 대목구장으로 그 직책이 바뀌면서 교회 사를 위해서도 나름대로 새 시기가 시작되었다.
〔서울 대목구장(1911~1933)〕 뮈텔 주교는 광범한 조선 대목구의 분할을 로마에 건의하였는데, 그 결과 1911년 4월 8일 남부의 경상도와 전라도 두 지방이 대구 대목구 로 독립되는 동시에 그 사목 역시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 임되었다. 한편 종래의 조선 대목구는 서울 대목구로 그 명칭이 바꿔에 따라 뮈텔 주교는 자동적으로 서울 대목 구장이 되었다. 당시 한국 교회의 총 신자수는 76,000 명이었는데 그중 3분의 1 정도가 대구 대목구로 소속됨 에 따라 서울 대목구의 신자수는 52,000명으로 줄었다.
뮈텔 주교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재직한 20년 동안은 선교사상 하나의 황금 시대였던 반면에, 서울 대목구장 으로서의 20년은 무엇보다도 종교열과 개종열의 감소로 성장이 급격히 둔화된 시기였다. 이러한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은 한일합병이라는 정치적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제 한국인들은 점차 종교에 무관심해졌고 정치적 자유 와 새로운 생계의 길을 찾아 조국을 떠났다. 그래서 천주 교 신자들을 포함한 해외로의 민족 대이민 시대가 시작 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 전과 이에 따른 프랑스 선교사 11명의 군 입대는 신자들 의 성사 집전마저 어렵게 만들었다. 3 · 1 운동과 같은 민족 운동으로 야기된 정치적 상황도 개종 운동에 유리 하게 작용하지 않았으며, 이어 1920년대에 나타난 정신 적 타락과 물질적 가치의 추구로 인한 세속화의 물결은 냉담자를 급속히 증가시켰다. 선교사들은 한결같이 새로 운 영세 입교자가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수가 도 무지 증가하지 않고 있다고 한탄하였다. 실제로 신자수 는 1911년의 52,000명에서 1922년에는 53,574명, 1931년에는 52,949명으로 20년 동안 제자리 걸음을 하였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고자 뮈텔 주교는 교구 분할을 생각한 것 같다. 특히 평안도와 함경도는 가장 낙 후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독립시키는 일이 시 급하였으나, 파리 외방전교회로서는 이 지역까지 감당할 인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선교 단체를 초 청할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이미 서울에 진출하여 교육 사업을 벌이고 있던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독립된 포교 지를 맡고 싶어하였으므로 뮈텔 주교는 그들에게 함경도 지방을 위촉하였는데, 그 결과 1920년에 이 지역이 원 산 대목구로 독립하였다. 한편 평안도 지역은 1923년부 터 미국의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하였는데 이 지역도 4년 후인 1927년에 평양 지목구로 독립하였다. 그런데 중앙의 5개 도(道)도 역시 아직 방대하였기에 뮈텔 주교는 젊은 보좌 주교에게 일임하고자 1920년에 드브레(E.A.J. Devred, 1877~1926) 신부를 계승권을 가진 보좌 주교로 택 하였다. 그러나 6년 만에 과로로 사망하자 라리보(A.J. Larribeau, 1883~1974) 신부를 그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이러한 뮈텔 주교의 업적이 인정을 받아 1921년에는 교황 탑전 시종(榻前侍從), 교황궁 고등 성직자, 로마 백 작이란 명예직에 임명되었고 1926년에는 라시아라 (Ratiara)의 명의 대주교로 승격되었으며, 이보다 앞서 1925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국가 최고의 1등 훈장인 레종 도뇌르(Légion d'honneur) 훈장을 받았다. 특히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한 것은 1925년 로마에서 거행된 한국 교회 79위 순교자들의 시복식이었는데, 그날 그는 진정 으로 한국 순교자들의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 시복의 결실을 위해 선교 생활 시초부터 순교자들에 관한 증언을 듣고 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번역하는 일에 전념해 왔다. 1894년 정부 문서들을 파기 소각할 때 <황 사영 백서> 원문을 찾아내 프랑스어로 옮겨 학계에 공개 한 일(Lettre d'Alexandre Hoang à Mgr. de Gouvea, Evêque de Pékin, Hongkong, 1925),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순교록인 《기해일기》의 가장 오랜 사본을 찾아내어 1905년에 간 행한 일, 1922년부터 매일 도시락을 싸 들고 규장각(奎 章閣)을 찾아가 《조선 왕조 실록》(朝鮮王朝實錄), 《승정 원 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綠) 등으로부터 순 교자들에 관한 관변측 기록을 발췌하여 프랑스어로 옮겨 출판한 일(Documents relatifs aux Martyrs de Corée de 1839 et 1846, Hongkong, Nazareth, 1924 ; Documents relatifs aux Martyrs de Corée de 1866, Hongkong, Nazareth, 1925) 등은 그 두드러 진 성과들이었다. 그는 쿠랑(M. Courant)이 《조선 서지》 (Bibliographie coréenne)를 펴내는 데에도 적지 않은 자료 와 조언을 제공해 주었다. 이런 점에서 뮈텔 주교는 교회 행정가인 동시에 역사학자요 한학자(漢學者)였다. 그는 순교자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교구사에 관한 자료들도 광 범위하게 수집하고 보관할 줄 알았다. 그가 수집한 교구 문서들은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데, <뮈텔 문서>라는 이름으로 정리된 이 문서들은 선교사들이 교 구장에게 보낸 서한들을 위시해서 교안과 관련된 정부 문서와 프랑스 공사관의 외교 문서, 시복 재판에 관한 문 서들, 심지어 전보와 명함에 이르기까지 총 13,000여 건에 달한다. 또 그는 자료를 수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교구장이 되면서부터 사망하기 직전까지 40여 년 동안 교구 일지를 남겨야 한다는 철저한 역사 의식에서 매일 일기를 적어서 남겼다(Journal de Mgr. Mutel, 1890~1932).
뮈텔 주교의 일기는 1932년 12월 31일로 끝난다. 1933년은 뮈텔 주교가 한국 나이로 80세가 되는 해였는 데, 이해 1월 12일 목요일 아침 관례대로 성체 조배를 위해 반시간을 추운 성당에서 보낸 뮈텔 주교는 여기서 그만 감기에 걸렸고, 이 유행성 독감은 일주일 후 노인성 독감으로 악화되었다. 이로 인해 결국 뮈텔 대주교는 1 월 23일 아침에 숨을 거두었고, 3일 후 용산 성직자 묘 지에 묻혔다.
〔평 가〕 뮈텔 주교가 산 시대는 영혼을 구하는 것을 최 고로 여긴 보수적인 사상이 풍미한 시대로 프랑스가 특 히 그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뮈텔 주교 역시 당시의 정 신을 따라 영혼을 구하는 일을 최고의 임무로 생각하였 고, 실제로도 한국인의 영혼을 하나라도 더 구하기 위하 여 죽을 고생을 마다지 않았고 용기 있게 사목에 헌신하 였다. 그러한 그에게 영혼만이 아니고 인간 전체의 구원 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리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시대 의 사람으로 그치고 말았다.
오직 영혼의 구원이라는 정신은 뮈텔 주교로 하여금 방인 성직자 양성에서 본말을 전도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서 교회를 현지인에게 맡기기 위해 현지인을 지도자 로 양성하는 것이 그 본래의 목적이었는 데도 뮈텔 주교 처럼 의식이 뒤져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인 성직자 를 단지 영혼을 구하는 데 필요한 조수로밖에는 생각하 지 않았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한국인 주교의 탄생이 늦 어졌다. 이웃 중국과 일본에서는 이미 현지인 주교들이 탄생하였는데도 뮈텔 주교는 1928년에 황해도를 감목 대리구로 설정하는 데 그쳤다.
영혼을 구해야 한다는 뮈텔 주교의 일념은 정치 분야 에 적용됨으로써 일제에 제대로 항거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는 정부의 탄압이 있다 할지라도 선교만 할 수 있다면 이에 아랑곳없이 선교를 계속하여 하나의 영혼이라도 더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입장이 결국 뮈텔 주교로 하여금 정치를 방관하게 하고 심지어 는 식민 세력까지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뮈텔 주교는 일제에 충분히 대항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몇 가지 부 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뮈텔 대주교는 파리 외방전교 회와 한국 교회가 낳은 위대한 주교의 한 사람으로 평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민덕효 ; → <뮈텔 문서> ; <뮈텔 주교 일기>)
※ 참고문헌  Mgr. Larribeau, Un grand Evêque Missionnaire, S. Exc. Mgr Gustave Mutel, Missions-Etrangères, Paris, 1931/ Nécrologe de Mgr Mutel, Compte Rendu de 1934, Paris, 1935, pp. 235~242/ Le Catholicisme en Corée, Hongkong, 1925/ 최석우, <귀스타브 뮈텔 : 순교자의 꽃을 피어나게 하라>, 《나의 교회 나의 역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pp. 100~112/ 김정옥, <일제하 프랑스 선교사의 활동>, 《교회사 연 구》 5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pp. 233~247/ 이병호, <프랑스 선교 사들의 영성과 한국 교회>, 《교회사 연구》 5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pp. 373~397/ 최석우, <일제하 한국 천주교회의 독립 운동>, 《교 회사 연구》 1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pp. 37~58. 〔崔奭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