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뮈텔 문서> - 文書
〔프〕Documents de Mgr. Mu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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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 보고서, 공문서, 성직자와 신자들의 사문서, 전보, 안내장, 각종 메모와 명함 등으로 이루어진 <뮈텔 문서>
제8대 조선교구장인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조선 선교사로 활동하던 시기에 수집해 놓은 문서군(文書群) 을 총괄하여 부르는 호칭. 총 13,451건에 이르며, 그 종 류는 뮈텔 주교 자신이 받은 서한(공한 및 사한)과 보고 서, 교회 안의 공문서(公文書), 성직자와 신자들의 사문 서(私文書), 외교 문서와 신문 기사, 전보, 안내장, 각종 메모와 명함, 초대장 등 매우 다양하다. 〔문서 종류와 구분〕 <뮈텔 문서> 안에 들어 있는 각종 문서들이 작성된 시기는 그가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1877년부터 사망하는 1933년까지에 해당한다. 그러나 문서들의 대부분은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기 시작한 1880년에서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 지도자로 임명되어 귀국하기 전인 1885년까지 5년 간, 그리고 조선교구 장으로 임명되어 다시 조선에 입국한 1891년에서 사망 할 때까지 42년 간 등 총 47년 동안에 집중되어 있다.
이 문서군은 다양한 문서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종류 별로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 작성된 '언어별' 로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중에서 유럽어로 기록된 구문(歐文) 문서가 12,164건으로, 프랑스어 문서 9,518건, 라틴어 문서 2,068건, 영어 문서 571건, 독일어 문서 4건, 이탈 리아어 문서 2건, 스페인어 문서 1건 등이다. 다음으로 동양어로 작성되어 있는 동문(東文) 문서가 1,287건으 로, 한글 문서 390건, 국한문 혼용 문서 126건, 한문 문 서 716건, 일본어 문서 55건 등이다. 이처럼 프랑스어 로 된 문서가 많은 이유는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전교 담 당자들이 주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성직자들이었고, 뮈텔 주교 자신도 프랑스인이었기 때문이다. 또 라틴어 문서가 많은 이유는 당시 천주교회의 공식 문서가 주로 라틴어로 작성되었고, 한국인 성직자들이 라틴어로 된 서한과 사목 보고서를 교구장에게 보냈기 때문이다. 동 문 문서 중에서는 한문으로 작성된 문서가 많은데, 그 대 부분이 구한말에 일어난 교안(敎案)이나 여타의 사건들 과 관련된 사한이나 공한, 고목(告目), 공문서, 진정서, 호소문, 통문 등이다.
다음으로 이들 문서들을 다시 '시대별' 로 구분해 보 면, 우선 프랑스어로 된 문서는 1870년대 초부터 있으며, 1890년대 이후 그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라틴어 문서는 1890년대부터 나타나지만 그 수가 적었다가, 일제 시대에 들어오면서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한편 영 어 문서는 당시 한국에 체류하던 미 · 영계 외교관이나 일반 인사들과 관련된 문서들인데 그 수는 많지 않다. 동 문 문서 중에서 한문 문서는 주로 1880년대에서 1910 년대까지 작성된 것이 많으며, 한글 문서는 1880년대와 1920년대에 작성된 것이 대부분이다.
셋째로 '문서 종류별' 로는 일반 공문서와 사문서, 그 리고 교회 문서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에서 공문서는 교회측과 정부 관서 사이에 교환된 문서, 정부 관서에서 프랑스 공사관으로 보낸 공문, 정부 각 관서 간에 주고받 은 관청 문서류들이다. 사문서에는 정부 관료가 성직자 에게 보낸 문서, 천주교인이 성직자에게 보낸 문서, 개인 이 정부 관료에게 보낸 문서, 개인 사이에 주고받거나 일 반 민중들에게 보낸 문서들이 있다. 그리고 교회 문서는 대부분이 교무 연락 관계의 문서로 사한과 보고서, 연락 문, 전보, 공한 등이다. 구문 문서는 종류별로 분석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동문 문서의 경우에는 공문서가 약 400건, 사문서가 약 650건, 교회 문서가 약 200건으로 조사되고 있다.
뮈텔 문서의 수취인(受取人)은 그 종류에 따라 구분되 는데, 먼저 구문 문서의 경우에는 대부분 뮈텔 주교 또는 종현 천주당(즉 명동 성당)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교회측 에서 발송하거나 받은 공사 문서, 교회 문서들도 뮈텔 주 교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이 많다. 다음으로 동문 문서 의 경우에는 총 1,287건 중에서 수취인이 뮈텔 주교인 문서가 357건, 서울교구 부주교로 재임(1921~1926)하 던 드브레(Deverd, 俞世俊) 주교 앞으로 된 문서가 118 건, 그 밖의 성직자 앞으로 된 문서가 92건이다. 그리고 정부 관서로 보내진 문서가 129건, 개인 앞으로 보내진 문서가 19건, 프랑스 공사에게 보내진 문서가 24건이 된다. 548건은 수취인 불명의 문서들이다. 구문 문서들 은 대부분 원본 그대로 소장되어 있는 반면에, 동문 문서 중에서는 원본으로 남아 있는 것이 743건이고, 사본으 로 남아 있는 것이 410건이다. 아울러 <독립신문>을 비 롯하여 <황성신문>, <제국신문>, <대한일보>, <한성신보> 등에서 발췌한 기사 자료도 74건이 된다.
〔주요 내용과 가치〕 <뮈텔 문서> 안의 내용들은 그 종 류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중에서 도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각 지역에 파견되어 활동하던 성직자들의 서한과 연말 보고서로, 뮈텔 주교 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다시 한국에 입국한 1890년부 터 1911년까지는 이 문서들을 통해 전국 본당들의 현황 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후에도 비록 1911년에 대 구교구 지역이, 1920년에 원산교구 지역이 서울교구에 서 분리되어 나가기는 하지만, 적어도 1933년 뮈텔 주 교가 사망하기 전까지는 각 지역 교회사는 물론 한국 천 주교회사 전체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1886년에 체결된 한불수호조약(韓佛修好條 約)이 비준된 이듬해부터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 때까지는 교인과 일반 민중 사이의 분쟁 보고 문서와 교 안 관련 문서, 외교 관계 문서들이 특히 눈에 띈다. 이 무렵에 자주 등장하는 신문 기사 발췌본은 주로 분쟁 소 요 기사와 교회를 비방하는 기사 등을 담은 것들이다. 뿐 만 아니라 이와 관련하여 교회의 공문서, 성직자 파견 요 청 문서, 프랑스 공사관 관계 외교 문서, 정부의 공문서 등도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1910년의 합병 이후에는 일제 총독부의 지령이나 포고령, 교회와 총독부와의 관 계 문서들이 나타난다. 특히 이 중에서도 주목되는 것으 로는 1886년의 한불조약 체결을 위해 프랑스와 한국 대 표 사이에 이루어진 협상 자료들, 1890년대 말에서 시 작되어 1902년에 교안으로 발전한 해서교안(海西敎案) 자료들, 1901년의 제주교안(濟州敎 案) 자료들, 이러한 분쟁들을 해결하 기 위하여 교회와 정부 사이에 체결 된 1899년의 교민조약(敎民條約), , 1901년의 교민 화의 약정(敎民和議 約定), 1904년 선교조약(宣敎條約) 의 조약문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동 학(東學) 농민 운동의 전개 과정, 을 미사변(乙未事變)과 아관파천(俄館 播遷)의 내용, 한말의 역사와 관련된 자료들도 다른 곳에서 찾기 어려운 것들이다.
이와 같이 <뮈텔 문서>는 1880년 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의 한국 천 주교회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됨은 물론, 한말과 일제 초기의 한국 근대 사를 연구하는 데도 필요한 자료가 된다. 또 반세기 이상 이나 서울에 체류하던 교회 책임자가 수집한 원사료 그 대로라는 점에서 그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 고 있다. 그러나 문서 중의 상당량이 교회측 자료이고, 성직자나 교인들이 장상인 교구장에게 보낸 문서와 호소 문, 진정서 등이 많으므로 객관적인 측면에서 비판 작업 을 거쳐 이용해야만 할 것이다. 아울러 이 문서들은 뮈텔 주교 자신이 쓴 <뮈텔 주교 일기>(Journal de Mgr. Mutel,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와 상관 관계를 지니고 있으므로 서로 내용을 비교 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보관 과정과 현황〕 <뮈텔 문서>는 뮈텔 주교가 생전 에 교회 내의 문서와 교회 밖의 문서로 구분하여 연도별 로 정리한 뒤, 한지로 포장하여 100개의 종이 상자에 보 관하고 있었다. 본래 이 문서 상자들은 서울교구청 안에 있던 주교 집무실에 있었으나, 그의 사후에 유품들과 함 께 명동 대성당 지하실로 옮겨져 보관되어 온 탓에 다행 히 6 · 25 전쟁 때에도 손상되지 않았다. 이 문서가 세상 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65년에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최 석우(崔奭祐, 안드레아) 신부가 지하실에서 문서 상자를 발견하고 서울대교구의 허락을 얻어 동 연구소로 이관하 면서였다. 이때 최석우 신부는 그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 여 교회사가 이원순(李元淳) 교수에게 문서 정리를 의뢰 하였고, 서로 협의한 끝에 문서군의 명칭을 '뮈텔 문서' 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1966년에 문서를 검토한 뒤 이 듬해부터 관련 연구자들의 협조 아래 분류를 시작하였으 며, 동문 문서 분류가 완료된 1969년에 이를 학계에 발 표하였다. 그 후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는 구문 문서들에 대한 분류 작업을 계속하여 1차 분류를 완료하였으며, 지금까지 전체 문서들의 세분 분류 작업과 색인 작업을 추진해 오고 있다. (→ 뮈텔 ; <뮈텔 주교 일기>)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뮈텔 문서>/ 李元淳, <未公開史料 Mutel 文書>, 《韓國史研究》 3집(1969. 3), 韓國史研究會 〔李元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