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뮈텔 주교 일기> - 主敎日記
〔프〕Journal de Mgr. Mu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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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제8대 조선교구장인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자신 이 교구장으로 임명된 소식에 접한 1890년 8월 4일부터 사망(1933년 1월 23일)하기 직전인 1932년 12월 31일까 지 42년 동안 거의 매일같이 작성한 일기. 그 분량은 6,000여 쪽에 이르며, 뮈텔주교의 개인 사정과 교회 안 팎의 주요한 사건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보관과 번역 작업〕 뮈텔 주교는 주교로 임명되기 이 전에도 일기를 썼지만, 현존하는 것은 주교 재임 당시의 일기뿐이다. 이 일기는 그가 사망한 뒤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를 거쳐 1942년 한국인 노기남(盧基南, 바 오로) 주교가 서울교구장을 승계한 이후에도 계속 명동 주교관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해방 후인 1948년 충청남도 지역이 독립 포교지로 설정 됨과 동시에 그 사목이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되면서 라리보 주교가 책임자가 되었고, 1958년에는 이 포교지 가 대전교구로 승격되면서 이전까지 서울교구 소속으로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모두 대전교구로 이적(移籍)되 었다. 이때 일부 연로한 선교사들만이 용산의 옛 예수성 심신학교에 남아 있게 되었는데, 이를 기해 명동 주교관 에 보관되어 오던 뮈텔 주교의 일기와 몇몇 중요한 자료 들이 용산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프랑스 파리의 외방전교 회 본부의 고문서고로 옮겨져 보관되었던 것 같다.
그 후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최석우(崔奭祐, 안드레아) 신부는 이 일기가 지닌 교회사 자료로서의 가치와 중요 성을 인식하고, 1983년 파리 외방전교회 한국 지부장으 로 있던 펠리스(Marcel Pélisse, 裴世英) 신부의 협조를 얻 어 복사본 일부를 입수하였고, 1984년에는 파리 외방전 교회 고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던 일기 전체를 마이크로 필름으로 인수하였다. 그러나 뮈텔 주교의 필체는 원문 그대로 판독하기가 쉽지 않아 마이크로필름을 인화한 뒤 에 다시 원문을 판독하여 타자로 정서하는 작업을 거쳐 야만 하였다. 이 판독과 정서 작업은 벨기에 샤미스트 (Samist)로서 당시 전주교구에서 사목하고 있던 디디에 세르스트반스(Didier t'Serstevens, 池正煥) 신부가 맡아 1984년 말에 완료하였다. 동시에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는 한글 번역 작업에 착수하여 1986년 9월에 《뮈텔 주교 일기》 제1권(1890~1895)을, 1993년 5~6월에는 제2 권(1896~1900)과 제3권(1901~1905)을 간행하였으며, 이 후에도 번역 작업을 계속해 오고 있다.
〔내용과 사료적 가치〕 뮈텔 주교는 1890년에 조선교 구장으로 임명되고 주교로 성성되어 이듬해 2월에 다시 조선에 입국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대구교구(大邱 敎區)가 분리되는 1911년 4월까지는 조선교구장으로, 이후에는 서울교구장으로 재임하였으며, 1920년 8월에 는 다시 서울교구에서 원산교구(元山敎區)를 분리 독립 시켰다. 그 동안 한국 천주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공인받 고 눈에 띄는 성장을 가져오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천 주교를 적대시하는 관리나 일반 민중, 프로테스탄트 교 회들로부터 사사로운 저항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한말 의 갖가지 정치적 · 사회적 상황과 일제의 합병으로 인한 한민족의 아픔을 함께 겪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아래에서 뮈텔 주교는 자신의 신변 사 정은 물론 한국 천주교회의 중요한 사건들, 한말에 활동 하던 서양 외교관들, 조선의 정세와 주변 여건 등 폭 넓 은 내용들을 일기에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그 내용과 사 료적 가치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하 나는 당시의 한국 천주교회와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 는 조선의 외교에 관한 것이며, 세 번째는 조선의 정치 · 사회에 관련된 내용이다.
첫째로 뮈텔 주교 일기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사실 은 그 동안에 전개되어 나간 한국 천주교회사와 관련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뮈텔 주교 자신의 교구장 임명 과 부임, 선교사들의 파견과 본당의 증설, 인사 이동과 사목 방문, 각 지역 공소들의 현황과 변모 과정, 교세의 확대와 전교 과정, 1911년과 1920년의 대구교구 · 원산 교구 설정, 1927년과 1928년의 평양(平壤) · 연길(延 吉) 지목구 설정 등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가 된 다. 다음으로 신학교의 변모와 사제 서품, 약현 성당과 명동 대성당 등 교회 건축물의 건립 과정, 샬트르 성 바 오로 수녀회의 변모와 1909년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한 국 진출과 정착 과정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며, 아울 러 계성학교 · 남대문상업학교(현 동성고등학교) · 가명학 교 등 교육 기관의 설립과 변모, 양로원이나 보육원을 통 한 사회 활동, <경향신문> · 《경향잡지》 등 언론 출판 사 업,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諡福) 조사와 시복식, 순교자 들의 유해 발굴, 한말의 각종 교안(敎案)과 그 해결 과정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조선의 외교 문제와 관련된 내용들로는 먼 저 프랑스 공사를 위시한 주한 외교 사절들의 동향과 그 성향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 던 외국인 고문들,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나 열강의 침 탈에 대한 이해와 조선 안의 사정 , 서양 함대의 내한, 일 본과 청나라의 외교 문제와 청일전쟁(淸日戰爭), 일본과 러시아의 외교 관계 등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특 히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義和團) 사건과 이로 인해 체결된 1901년의 북경 의정서(北京議定書) 1905년의 을사조약(乙巳條約)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일어난 외교 문제 등도 살펴볼 수가 있다.
세 번째로 조선의 정치 · 사회와 관련된 내용으로는, 위에서 말한 청일전쟁과 을사조약 외에도 1894년의 갑 오개혁(甲午改革)과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 명성 황후 시해 사건〔乙未事變〕과 의병들의 봉기, 독립 협회 의 조직과 독립문 건립,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죽 음, 경부선 · 경의선 · 경인선 철도의 부설, 1904년의 러 일전쟁, 1910년의 한일합병, 1919년의 3 · 1 운동, 일 제 총독부의 탄압과 개혁령 등 한말과 일제 초기에 이르 는 갖가지 역사적인 사건들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 다. 특히 3 · 1 운동 당시 여기에 참여하였던 용산 예수 성심신학교 학생들이 제적되고, 동시에 얼마 동안 신학 교 자체가 폐교되었던 사실, 그리고 1910년 말 일제가 독립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이른바 '105인 사 건' 의 발단이 된 천주교 신자 안명근(安明根)의 체포가 뮈텔 주교의 헌병대 제보로 이루어졌다는 사실 등은 한 국 천주교 신자들의 항일 운동에 대한 증언이자, 지금까 지 알려지지 않은 한국 독립 운동사의 한 부분이라는 의 미를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뮈텔 주교 일기>는 당시의 한국 천주교회 사뿐만 아니라 한말과 일제 시대의 한국사 연구에도 중 요한 자료가 된다. 또 그 일기의 내용은 뮈텔 주교가 파리 외방전교회에 보낸 연말 보고서, 즉 이 보고서가 수록 되어 있는 동 전교회 발행의 《연보》(Compte Rendu), 한국 교회사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는 <뮈텔 문서>(Documents de Mgr. Mutel) , 그리고 <경향신문>, 《경향잡지》 등과 상 관 관계를 지니고 있으므로 이들의 내용을 상호 비교 검토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 뮈텔 ; <뮈텔 문서>)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Ⅰ~Ⅲ, 천주교 명동 교회/ 崔奭祐, <뮈텔 주교의 일기 해제>, 《교회와 역사》 103호(1984. 1), 한국교회사연구소, p. 12. 〔車基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