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처, 토마스 Müntzer, Thomas(1489~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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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스 뮌처.

도마스 뮌처.


독일의 급진적인 종교 · 사회 개혁 운동가. 종교 개혁 당시 신비주의에 깊이 빠져 있던 과격파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작센 지방 츠비카우(Zwickau)의 성직자였다. 뮌처의 활동은 유럽 근대사에서 사회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그는 처음에는 루터를 추종하였으나 곧 그와 결별하고 과격한 사회 혁명을 주장하였으며, 성서의 권위보다는 성령의 내적인 빛이 우월하다고 강조하였다. 중요한 신학 저술로는 《독일 교회 직》(Deutsches Kirchenamt), 《독일 프로테스탄트 미사》(Deutschen evangelischen Messe), 《잘못된 신앙을 파헤침》(Ausgedriückte Entblöβungdes falschen Glaubens) 등이 있다. 〔생 애〕 1489년 하르츠(Harz) 산맥의 슈톨베르크 (Stolberg)에서 태어난 것 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 나, 어린 시절 크베들린부르크(Quedlinburg)에서 라틴어 학교를 다닌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1506년 라이프치 히(Leipzig) 대학을 거쳐 1512년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Frankfurt an der Oder)에 입학하여 신학사 및 문학 석사 학위를 획득하였는데, 뮌처는 라틴어 · 그리스어 · 히브 리어 등의 고전어학 및 고전 문헌 특히 신구약 성서에 조 예가 깊었다고 한다. 1513년에는 할레(Halle) 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하다가 사제 서품을 받고 1516~1517년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소속인 아셰르슬레벤(Aschersleben) 의 수도원 원장이 되었으며, 1518년부터 루터의 개혁 사상에 매료되었다. 1519년 라이프치히에서 이루어진 루터와 에크(J. Eck, 1486~1543)의 논쟁에 자주 참석하였던 그는 이곳에서 루 터를 만나 그의 추천으로 1520년부터 츠비카우의 교회 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루터의 추종자로 여겨졌던 그는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의 종교 개혁 노선 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성서보다 신이 내리는 내적 빛 에 진정한 권위가 있다고 믿으면서 가톨릭 교회의 입장 만이 아니라 루터파의 개혁 이념에도 반대하였으며 슈트 로흐(N. Stroch)의 영향을 받아 '츠비카우의 예언자들' 이 라고 알려진 과격한 개혁 집단의 지도자가 되었다. 폭력 혁명 : 폭력 혁명을 선동한 뮌처는 1521년 츠비 카우에서 추방되어 프라하로 도피하였으며, 그곳에서 15세기 보헤미아의 후스의 추종자들과 어울려 자신의 의견을 설득하였다. 이듬해 노르트하우젠(Nordhausen)에 서 루터 지지자들과 견해 차이로 싸우고 난 후, 그곳에서 추방당한 뮌처는 글라우하(Glauha)로 가 설교를 통해 수 많은 추종자들을 모았다. 이곳에서 오틸리에(Ottilie von Gersen) 수녀를 만나 결혼한 그는 1523년에 만스펠트 광 산 지역 근처의 알슈테트(Allscdt)의 작센 공동체 목사가 되었으며,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적 · 전례적 · 정치 적 저술들을 집필하였다. 뮌처 신학의 혁명적 요소는 반(反)그리스도교적인 지 상의 정부가 정복되어야 한다는 관념과 평민들이 신의 도구로서 이와 같은 변화를 수행해야 한다는 논리를 연 결시킨 데 있었다. 그는 재산이 없는 평민들이야말로 순 진 무구한 무지 때문에 오히려 신의 뜻을 펴 보일 수 있 는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1523년 루터의 친구이자 동료 인 카를슈타트(Andreas Karlstadt, 1480~1541)는 이러한 과 격한 개혁에 동조하여 곧 뮌처와 연합하였고, 뮌처는 자 신이 탄압받는 자들의 대변자임을 자처하면서 공공연하 게 모든 기성 권위에 대해 반대할 것을 설교하였다. 그리 고 이러한 그의 종교적 · 사회적 혁명 사상은 중부 및 남 부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농민 전쟁 : 1524년 여름 스바비아(Swabia)에서 시작 된 농민 반란은 점차 폭력과 무질서가 증폭되는 가운데 이듬해에는 중부 및 남부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뮌처가 주도한 뮌하우젠(Mülhausen)은 중부 독일에서 반 란의 중심지가 되었다. 1525년 초에 농민 반란 지도자 들은 12개 항목의 개혁안을 요구하였고, 뮌처의 독단적 인 교리를 따른 반란군은 그 해 4월과 5월에 걸쳐 승리 를 거두었다. 이 봉기에는 여러 도시들과 군소 제후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함으로써 뮌처와 그 추종자들의 기세는 더욱 높았다. 그러나 5월 말경 프랑켄하우젠(Frankenhausen) 전투에서 우세한 장비와 군기로 무장한 제후군에 의해 허무하게 격파당하였다. 이때 사로잡힌 뮌처는 고 문을 받은 뒤, 5월 27일 제후들의 뮐하우젠 병영에서 재 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역사적 의의 및 평가〕 뮌처의 개혁 운동은 농민 전쟁 의 종말과 함께 끝났으나 그의 주장은 사회 혁명의 상징 과 사상적 원천으로 남았다. 그래서 그의 사상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합리주의에 의해서도 탄압될 수 없었으 며 19세기에 이르러서는 학문적으로 재해석되기도 하였 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뮌처를 19세기 및 20세기 의 계급 투쟁을 거쳐 사회주의에 이르기까지의 사회 혁 명 전통의 출발점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뮌처의 사상은 정치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 사상사적 위상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 농민 전쟁) ※ 참고문헌  Schriften und Briefe von Thomas Miinter, 1968/ M. Bensing, Thomas Müntzer, 1965/ W. Elliger, Thomas Miintzer, 1960/ E.W. Gritsch, Reformer Without a Church : The Life and Thought of Thomas Müntzer(1488?~1525), 1967/ A. Meusel, Thomas Müntzer und seine Zeit, 1952. 〔車河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