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美國

I. 가톨릭 교회의 정착 정

II. 가톨릭 교회의 성장 · III. 가톨릭 교회의 발전과 현재 · 〔영〕United States of America

글자 크기
5
스페인 정복자들과 함께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인디언들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1 / 16

스페인 정복자들과 함께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인디언들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북아메리카 대륙 48개 주와 알래스카, 하와이 등 외부 2개 주로 구성된 연방 공화국. 본토에 속한 영토는 북쪽 으로 캐나다, 서쪽으로 태평양, 남쪽으로 멕시코 · 멕시 코 만 · 플로리다 해협, 동쪽으로는 대서양과 접해 있다. 알래스카 주는 북아메리카 대륙의 북서쪽 끝에 있으며, 하와이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다. 미국은 여러 민족군 (民族群)으로 구성된 다민족 사회인데, 백인이 전체 인 구의 85%, 흑인이 12%, 그 외에 아시아인과 아메리카 인디언을 비롯한 소수 민족들이 3%를 차지하고 있다. 면적은 937만 2,571k㎡(5대호 제외)이고, 인구는 2억 6,305만 7,000명(1995)이며, 수도는 워싱턴(Washington, D.C.)이다. 공용어는 영어이며, 그리스도교가 전체 인구 의 85.3%를 차지하는데, 그중 반 이상이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고, 16~17세기 스페인 · 프랑스 등 유럽 제국 (諸國)의 식민지 정책으로 전해진 가톨릭은 전 인구의 23% 정도를 점하고 있다.
I . 가톨릭 교회의 정착 과정
〔식민지 시대〕 아메리카 대륙은 1492년 콜럼버스(C. Columbus, 1451~1506)에 의해 발견된 이래 식민지를 개척 하려는 유럽 제국의 발길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중 특히 1493년 교황 알렉산델 6세에 의해 포르투갈과 스페 인 사이의 영토 분쟁이 마무리되면서 아메리카 선교권을 갖게 된 스페인이 이 지역의 선교에 보다 적극적이었다.
스페인은 1512년 플로리다를 발견한 이후 멕시코 만 연안을 포함하여 캘리포니아에까지 식민지를 확대하였 고, 16세기 말부터는 프랑스인들이 캐나다로부터 미시 시피 강 하구의 뉴올리언스(New Orleans)까지 이동해 왔 다. 이때 함께 들어온 스페인과 프랑스의 프란치스코 수 도회, 도미니코 수도회, 예수회(1570년 이후) 선교사들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동부 지역은 1607년 영국이 버지니아에 제임스 타운을 건설한 이래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이주한 사람들 이 주로 영국 국교회의 비국교파 신자 및 스코틀랜드, 아 일랜드의 장로교 신자여서 종교적으로 프로테스탄트적 성향이 강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가톨릭은 박해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남동부 : 미국 최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1565년 플로리다의 세인트오거스틴(St. Augustine)에 설립된 놈브 레 데 디오스(Nombre de Dios) 교회였다. 1549년 도미니 코회에서 원주민에 대한 선교를 시작하였지만 실패한 후, 1565년 예수회 선교사들이 세인트오거스틴에 도착 하면서 정식으로 선교 활동이 시작되었다. 교회가 설립 된 후 예수회와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은 플로리다 인디 언들 사이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는데, 특히 프란치스코 회 선교사들이 인디언 선교에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그 러나 프랑스 스페인과의 전쟁 결과, 1763년에 플로리 다가 영국령이 되면서 가톨릭의 선교 활동은 큰 타격을 받았고, 대부분의 선교지는 파괴되거나 방치되었다. 한 편 16세기 말부터 1762~1800년을 제외한 1803년까 지 프랑스령이었던 루이지애나(Louisiana)에는 초기에 이 주한 프랑스인과 1775년에 캐나다의 아카디아(Acadia) 로부터 추방되어 이곳에 정주한 프랑스인들의 영향으로 가톨릭 신자가 많았다. 이곳에서는 예수회 회원들이 인 디언을 사목하고, 카푸친(Capuchin)회에서 정착민들을 사목하였는데, 1763년 예수회 회원이 추방되면서 선교 활동도 쇠퇴하였다.
남서부 : 뉴멕시코 주, 애리조나 주, 캘리포니아 주가 포함되는 남서부는 17세기 이래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뉴멕시코에는 1609년 스페인에 의하여 산타페시가 건설 되고, 이곳을 거점으로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은 상당수 의 인디언들을 개종시켰다. 애리조나에서는 17세기 말 부터 예수회 회원들이 활동하였으며, 1768년부터 1828 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할 때까지는 프란치스 코회가 예수회를 대신해 활동하였다.
서부 : 북부 캘리포니아에 스페인이 들어온 것은 18세 기 중반경이었다. 즉 스페인은 1768년 알래스카로부터 남진하는 러시아를 막기 위해 군대와 선교사들을 이 지 방에 파견하였던 것이다.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세라(J. Serra)와 그의 후계자들은 샌디에이고와 샌프란시스코 사 이에 21개의 선교지를 설립했으며, 이 선교지를 중심으 로 캘리포니아 연안의 많은 도시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 다. 이러한 활동으로 서부에서만 1769~1834년 사이에 10만 명 이상의 인디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중서부 : 북아메리카 대륙 중앙부는 16세기 말부터 프 랑스의 식민지였지만, 프랑스인의 관심은 오로지 모피에 만 있어서 정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과 동행한 선교 사들이 인디언들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하였지만 성과 가 없었고, 오히려 그들에게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프란치스코회 파딜라(Juan de Padilla)가 1542년에 캔자스 (Kansas)에서, 1642년과 1646년에는 예수회 회원들이 뉴욕에서 순교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가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린 것은 독립 전쟁 후 사람들이 애팔래치아 산 맥(Appalachian Mts.)을 넘어서 오하이오와 미시시피 계곡 을 개척하고 비옥한 농지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동부 : 1776년 미국이 독립을 선언하였을 때, 합중국 의 근간을 이룬 동부 지역은 종교적으로 프로테스탄트가 주류를 이루었다. 뉴잉글랜드에는 1620년 메이플라워 (Mayflower)호를 타고 온 분리주의자들인 필그림(Pilgrim) 교도들이 플리머스(Plymouth)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1623년에는 청교도들이 매사추세츠 식민지를 건설함으 로써 메릴랜드(Maryland)와 펜실베이니아를 제외한 동부 지역에는 가톨릭 신자가 거의 전무하였다. 다만 뉴욕, 뉴 저지, 버지니아에 소그룹으로 존재하였고, 소수의 프란 치스코회 회원과 예수회 회원들이 그들이 있는 곳을 순 회하면서 사목하였다. 펜실베이니아의 경우는 독일인 사 제가 독일에서 이민 온 농민들을 사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메릴랜드는 당시 가톨릭 교회에 있어 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1634년 가톨릭 신자인 영국의 볼티모어 남작 칼버트(Cecil Calvert, Baron Baltimore, 1606~ 1675)에 의해 개척된 메릴랜드는 완전한 종교 관용책을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에 이주한 가톨릭 신자는 소 수였지만, 총독과 고관 중에는 가톨릭 신자가 많았고, 이 후 20년 간 메릴랜드 식민지에서의 가톨릭의 영향은 상 당히 컸다. 그러나 1654년 청교도가 메릴랜드의 정권을 장악하자 가톨릭 신자에 대한 처벌법이 도입되어, 가톨 릭은 소수파로 명맥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한편 비슷한 종교 정책이 가톨릭 신자가 총독으로 있던 뉴욕에서도 1683~1687년에 채택되었는데, 1689년 월리엄 3세가 즉위하면서 이러한 관용책은 철폐되었다. 그리하여 동부 13개 식민지의 대부분은 가톨릭을 적대시하였다.
〔독립과 가톨릭의 초기 활동〕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반발한 동부 13개 주는 1774년과 1775년 두 차례에 걸 쳐 대륙 회의를 개최하고 마침내 1776년 7월 4일 독립 을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영국과의 독립 전쟁이 시작되 었고, 1783년에는 파리 평화 조약에서 독립이 승인되었 다. 이후 합중국은 1787년에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이듬해 각 주의 비준을 받아 1789년에 이를 공포함으로 써 아메리카 합중국이라는 새로운 공화국을 탄생시켰다. 독립 당시 미국의 가톨릭 인구는 약 25,000명으로 전 인구의 1%에 불과하였는데, 이 중 대부분은 메릴랜드와 펜실베이니아에 거주하였고, 뉴잉글랜드, 뉴욕, 버지니 아,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에 소수의 신자들이 산재해 있 었다. 이들을 위해 사목 활동을 한 23명의 사제는 모두 1773년 교황 글레멘스 14세(1769~1774)에 의해 해산된 예수회 회원이었다. 더욱이 독립 선언 전까지 동부 지역 에는 종교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다가 독립 선언과 함께 1776년 9월 18일에는 펜실베이니아에서, 11월 17일에 는 메릴랜드에서 종교의 자유를 포함한 가톨릭 신자의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인정되었다.
동부 13개 주는 교회 조직상 1686년 이래 런던 대목 구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훗날 런던 대목이 된 탈보트 (JamesTalbot)가 영국에서 미국 교회를 관할하는 것이 불 가능하다고 여기자, 영국과의 거리 문제 · 정치적인 문 제 · 신자의 점증 등으로 독자적인 교계 제도를 희망하던 미국 사제들은 1783년 루이스(John Lewis)를 장상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교황청은 프랑스에 있던 합중국 대 표 플랭클린의 의견에 따라 별도로 1784년 6월 9일에 전 예수회 회원 캐롤(J. Carroll, 1735~1815)을 북아메리카 13개 주 선교 책임자로 임명하였고, 1789년에 볼티모어 (Baltimore) 교구가 설정되자 그를 초대 주교로 임명하였 다. 당시에는 뉴올리언스와 플로리다만이 쿠바의 산티아 고 교구에, 디트로이트의 일부 지역이 캐나다의 퀘백 (Quebec) 교구에 속해 있었다. 캐롤은 보편적인 종교 관 용책과 정교 분리를 지지하였으며, 아메리카인의 민주적 기풍에 부합하는 교회 조직을 도입하려고 노력하였다. 이후 미국의 교계 제도는 좀더 체계화되어 볼티모어 교 구는 1808년에 대교구로 승격되었고, 보스턴, 뉴욕, 필 라델피아, 바스타운(Bardstown, 현재의 Louisville)은 교구로 설정되어 볼티모어 대교구에 속하였다. 이들은 후에 다 시 재분할되어, 1840년경에는 볼티모어 외에 15개 교구 와 500명의 성직자가 미국 내에서 활동하였다.
미국이 독립한 후, 가톨릭 교회는 대체로 신국가의 시 민 생활에 융화하고자 노력하였으며, 교육 · 양호 · 후생 시설 등을 설립해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다. 특히 프랑스 혁명으로 미국에 건너온 생 쉴피스 회원(Sulpician)은 변 경 지역에서의 선교 사목과 신학교 설립 등으로 미국 가 톨릭 교회에 커다란 힘이 되었다. 이들은 1791년에 볼 티모어 최초의 신학교인 세인트 메리 신학교(St. Mary Seminary)를 건립하였는데, 이 학교는 1809년에 에미츠 버그(Emmitsburg)에 설립된 성 마리아 신학교와 약 2년 뒤에 바스타운에 설립된 성 토마스 신학교와 함께 미국 성직자 양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와 함께 일반 교육 기관도 설립 · 운영하였는데, 1791년 조지타 운(Georgetown)에 설립된 학교는 후에 미국 최초의 가톨 릭 대학교가 되었고, 1799년에는 소녀들을 위한 중등 학교를 방문 수녀회(Visitation) 수녀들이 조지타운에 개 설하였으며, 같은 해 쉴피스 회원들은 볼티모어에 남학 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800~1810년 사이에는 세톤 (Elizabeth Ann Bayley Seton)과 미국 최초의 수도회인 성 요셉의 자비 수녀회(The Sisters of Charity of St. Joseph)가 에 미츠버그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1821년 세톤이 사망할 때까지 에미츠버그, 필라델피아, 뉴욕, 볼티모어 등에서 50개의 학교를 책임지고 있었다. 이후 레레토 수 녀회(The Sisters of Leretto) 를 비롯하여 1812년에 나자렛 의 자비 수녀회(The Sisters of Charity of Nazareth)가 창설되 어 교육 · 고아 · 의료 사업 등을 수행하였다. 그 결과 1840년대에는 가톨릭계 초등학교가 200개가 넘었고, 고등 교육 기관으로는 1789년 존스타운 칼리지(Johnstown College)가 설립된 이래 1850~1866년 사이에 55 개의 칼리지가 새로 세워졌다.
그러나 초창기 교회 때는 조직적인 활동이 결여되어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 국가적인 감정과 몇몇 사제들의 독립 활동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필라델피아 의 몇몇 독일 신자들은 1796년 그들의 민족 본당인 '삼 위 일체' 본당을 세웠으면서도 1802년까지 주교로부터 임명된 사목자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1820년에는 호간 (W. Hogan) 신부가 평신자 평의원들의 도움으로 필라델 피아의 성 마리아 주교좌 성당을 무단 점거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이와 유사한 일들이 뉴욕, 볼티모어, 버펄 로, 찰스턴, 뉴올리언스 등지에서 교회의 평화를 파괴하 였지만, 이 같은 위험은 점차 교회법의 강화, 시민법의 변화 등으로 감소되었다.
II . 가톨릭 교회의 성장
〔미국의 발전과 가톨릭〕 19세기는 합중국의 영토가 점차 확장되는 시기였다. 1803년에 프랑스로부터 루이 지애나를 매입함으로써 국토의 면적은 2배로 늘어났고, 1812년에는 변경 지방을 괴롭히던 영국에 전쟁을 선포 하여 이 전쟁에서의 승리로 국민적 결속을 강화하였다. 이제 미국인들은 서부의 넓은 영토로 관심을 돌려 신생 공화국의 팽창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1845년에는 텍사스를 병합하였고, 다음해에는 영국과의 조약으로 현재의 아이다호, 워싱턴, 오리건 주를 병합하 였으며, 1848년에는 멕시코와의 전쟁이 종결되면서 남 서부에 약 80만㎢ 걸친 광대한 땅을 얻었다. 그 결과 1824~1848년 사이에 미국의 영토는 오늘날과 거의 비 슷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서부로 영토가 확장 되면서 미국은 서부 개척 시대를 맞았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히 인디언과 새 로운 접촉을 갖게 되 었고, 인디언들은 점 차 이주민 세력에 밀 려 자신들의 거주지 를 잃어 갔다. 이들 에 대한 가톨릭의 선 교 활동은 1763년 프랑스의 예수회 회 원이 추방된 후 행해 지지 않다가 이 지역 이 합중국으로 병합 된 후, 예수회를 비 롯한 독일의 베네딕도회, 성심회(聖心會) 등 여러 선교 회가 이들 속에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19세기는 영토의 확장뿐만 아니라 유럽으로부터 이주 자가 격증하던 시기로, 1820년대 이래로 증가된 이민 중에는 가톨릭 신자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1820년에 19만 5,000명이던 가톨릭 신자가 1870년에 는 450만 4,000명으로 증가하였다. 주로 아일랜드인과 독일인이었던 이주민들은 동부와 중서부 도시에 집중적 으로 정착하였다. 가톨릭 신자들의 대량 이주로 1850년 당시 가톨릭 교회는 하나의 교파로서는 아메리카 최대의 종교 단체가 되었으며, 각 지역에서 점차 세력을 확장해 갈 수 있었다.
남서부의 경우 1848년 이후 프랑스 선교사 라미(John Baptist Lamy, 1814~1888)가 뉴멕시코의 대목(代牧)으로 임명되었고, 그와 프랑스로부터 파견된 선교사들의 노력 으로 이 지역 교회는 대단히 신장되었다. 1875년 산타 페가 대교구로 되면서 라미는 초대 대주교로 임명되었 다. 서부의 경우는 비록 프로테스탄트가 주류를 이루었 지만, 1848년 캘리포니아가 미국령이 되고 이듬해에는 금광이 발견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금광과 시가지에는 아일랜드인, 밭과 포도원에는 이탈리 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생활하였으며, 포르투갈인은 어 업에 종사하였는데, 사목은 주로 아일랜드인 사제가 담 당하였다. 19세기 말에는 수백만 명의 멕시코인들이 북 상하여 광산 · 농장 · 철도에서 일하게 되면서 스페인계 가톨릭의 영향이 강화되었다. 중서부의 개척지에는 프로 테스탄트가 우세하였지만, 가톨릭 신자들은 신시내티 (Cincinnati), 세인트루이스, 밀워키, 시카고 등의 대도시 와 켄터키의 농촌에 착실히 정착하였다. 19세기에는 5 대호 주변의 공업 도시에 슬라브계와 이탈리아계의 가톨 릭 이민이, 그 외 도시에는 독일계와 아일랜드계 주민이 이주해 왔다. 동부에서도 유럽으로부터 가톨릭 신자가 대량 이주해 오면서 가톨릭은 유력한 존재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장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의 총 신자수는 가톨릭을 능가하였고, 아메리카 문화의 기조는 프로테스탄트적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이민의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였던 사실은 이미 정착해 있던 프로테스탄트 주민들 사이에 위기감을 초래하여, 잠재되어 있던 가톨 릭에 대한 편견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반가톨릭을 표 방하는 주간지가 간행되었고, 공화국의 종교적 관용주의 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탄압도 가해졌다. 1850년대까 지 미국 토착인 모임(Native American Party)의 지도 아래 곳곳(보스턴, 필라델피아, 맨체스터, 배스, 루이빌)에서 성 당 · 수도원 · 기타 교회 시설들이 약탈 · 파괴되고, 사제 에게 가해와 학살이 행해졌으며, 19세기 말에는 미국인 보호 협회(American Protective Association)가 성립되어 가 톨릭 신자들을 관직에서 배제시키기까지 하였다.
〔남북 전쟁과 흑인 선교〕 1848년경 미국은 대서양에 서 태평양에 이르는 광대한 대륙 국가가 되었다. 그러자 곧바로 이 광대한 영토를 하나로 묶어 놓을 국가적 통일 의 문제에 부닥치게 되었다. 뉴잉글랜드와 서부의 대립 관계도 뚜렷하게 나타났지만, 연방에 가장 위협적인 것 은 남북의 대립이었다. 남북을 분열 시킨 중요한 요인은 노예 제도였는 데, 미국이 서쪽으로 팽창해 감에 따 라 노예 제도와 신설 준주(準州)에 노예 제도를 확대하는 문제를 둘러싸 고 북부와 남부 사이에 긴장이 고조 되었다. 흑인 노예는 1619년부터 1861년 남북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매년 수천 명씩 아메리카로 이주해 왔는데, 백인들은 그들의 반란이 두 려워 그들을 모든 교육으로부터 제외 시켰을 뿐만 아니라 노예를 가축과 동일시하고, 그들에게서 영혼의 존재 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태는 1863년 1월 1일 링컨이 노예 해방을 선언할 때까지 계 속되었다.
남북 전쟁 전에도 특히 남부의 몇몇 가톨릭 지주들은 흑인에게 자유를 부여하였다. 찰스턴의 주교 잉글란드(J. England, 1786~1842)는 모든 편견을 타파하고 흑인 학교를 세웠으며, 1819년에는 흑인 여자들을 위한 수도회를 세 우려는 시도도 있었다. 1828년에는 섭리의 헌신 동정회 (Oblate Sisters ofProvidence) , 1842년에는 성가족 여자 수 도회가 창립되어 흑인 선교를 담당하였고, 오로지 흑인 에게 봉사하는 사제 수도회로 런던의 밀힐(Mill Hill) 성 요셉 외방전교회(St. Joseph's Society for Foreign Missions)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가톨릭 신자들은 그 거주 지역에 따라 남북으로 나뉘어 싸웠고, 수녀들은 쌍방의 진영에서 간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전쟁으로 인해 400만 명의 노예들 중 10만 명 정도가 해방되었는데, 이 가운데 6만여 명이 가톨릭 신자였다. 이들은 루이지애나에 가장 많이 밀집되어 있었고, 메릴 랜드에는 약 16,000명이 있었다. 이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가 1866년 10월 7~21일에 열린 볼티모어의 제2 차 전국 공의회에서 다루어지기는 하였지만 실천적인 효 과는 거의 거두지 못하였고, 인종 차별은 19세기를 거쳐 20세기까지 계속 강화되었다.
그러나 20세기가 되면서, 흑인에 대한 선교 노력도 질 적인 변화를 가져와 1920년에는 신언회(神言會)가 그린 빌(Greenvile)에 흑인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세워, 1924년에 최초의 흑인 사제를 배출하였다. 또 성체 동 정회(Sisters of the Blessed Sacrament)는 뉴올리언스에 최초 의 흑인 대학인 사베리오 대학(Xavier University)을 창립 하였다. 이와 함께 1947년에는 세인트루이스의 추기경 로터(Joseph Rotter)에 의해 인종 차별을 개선하려는 노력 이 시작되었고, 1948년에는 워싱턴의 보일(Patrick O' Boyle), 1953년에는 랄라이프(Raleigh)의 주교 워터스 (VicentWaters)에 의해 이러한 노력은 계속 이어졌다.
〔볼티모어 전국 공의회〕 대혼란의 시대가 지나자, 가 톨릭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의 재건에 착수하였다. 이 미 남북 전쟁 이전에도 가톨릭 교회는 교세의 증가에 따 라 1829~1849년 사이에 7번의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 고, 1846년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를 미 국의 주보로 선포하였다. 또 1846년에는 오리건 시티 (Oregon City)와 세인트루이스, 뉴올리언스, 신시내티, 뉴 욕이 대교구로 승격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주교들은 1852년 5월 9일 전 교구가 참석한 가운데 최초의 전국 공의회를 볼티모어에 서 개최하였다. 이 공의회에서 주교들은 본당 생활, 교회 의 전례와 기념식 문제, 교회 기금의 관리, 그리스도교 교의의 가르침 등에 관한 법규를 제정하였다. 그리고 1866년 10월 7~21일에는 제2차 전국 공의회를 개최 하여 몇몇 교의의 오류들을 단죄하고, 교구 조직과 교육, 성직자 양성, 교회 재산의 경영, 교구의 의무와 일반 교 육에 관한 규범을 세웠다.
이러한 교회 재건 노력은 계속 되어, 1884년 11월 9일부터 12월 7일까지 개최된 제3 차 전국 공의회에서는, 미국에서 종교 교육의 기본적 수 단으로 채택된 볼티모어 교리서의 준비, 모든 본당 내에 초등학교를 설립할 것을 요청한 가톨릭 교육 방식의 합 법화, 1889년에 워싱턴에 가톨릭 대학을 설립할 것, 그 리고 6개의 의무 축일을 제정할 것을 결정하였다. 세 차 례의 공의회로 미국의 가톨릭 교회는 점차 체계화되어 갔고, 교황청은 1893년 1월 24일 이래 워싱턴에 교황 사절을 상주시켰다.
〔산업화와 아메리카니즘〕 남북 전쟁 이후 미국 사회는 급속도의 산업 혁명을 경험하였고, 이에 따라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풍요와 번영의 시대를 맞게 되었 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극심한 빈곤과 부패, 그리고 계 급간의 갈등이 나타났고, 기업간에 치열한 경쟁이 전개 되어 독점과 기업 통합 현상이 나타났다. 1880년대에 들어 독점 기업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연방 정 부는 1887년 주간 통상 규제법과 1890년 셔먼 독점 금 지법(Sherman Antitrust Act)을 제정하여 독점을 규제하려 고 하였다. 노동자들도 전국 노동자 연합, 노동 기사단, 노동 총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FL) 등을 결성 하여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움직임을 벌여 나 갔다. 그리고 독점적인 대기업의 횡포와 정부의 부패에 분개한 개혁자들은 대대적인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미국인이 국내적으로 사회 개혁의 문제에 몰두하고 있 는 동안, 유럽의 강대국들은 전세계에 걸쳐 영토와 이권 을 확대해 가는 제국주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에 미국도 그와 같은 시대적인 조류에 편승하여 1898년 스 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필리핀을 할양받았고, 푸에르토리 코(Puerto Rico)와 괌을 미국 영토로 편입하였다. 중국에 대해서는 '문호 개방 정책' 을 선언하였으며, 라틴 아메 리카에서는 이른바 '달러 외교 를 추진하여 이 지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이러한 시대적인 변화에 영향을 받은 가톨릭 교회는,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그 내부에서 아메리카적인 가 톨릭 교회의 실현을 촉진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아 메리카니즘' (Americanism)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움직임 은, 첫째 교회는 사람들을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규 율과 교리를 완화해야 하고, 둘째 완덕을 목표로 하는 사 람은 교회의 지도는 불필요하고 성령의 인도로 족하며, 셋째 행동적인 덕이 수동적인 덕보다 중요하고, 넷째 자 유를 속박하는 수도 서원은 시대에 어울리지 않으며, 완 덕에 이르는 데 방해만 될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당시 사회에 적극적인 자세로 적응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엘리오트(Walter Elliott) 신부가 1891년에 썼던 《이작 헥커의 생애》(Life of lsaac Hecker)가 프랑스어로 번역되면 서부터 시작된 아메리카니즘은 미국과 유럽에서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아메리카니즘을 반대하는 사람 들은 이것을 세속과 타협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이에 동 조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였다. 결국 1899년 1월 교황 레 오 13세가 <테스템 베네볼렌시에>(Testern Benevolentiae) 를 발표하여 이 설이 오류임을 밝히면서 일단락된 이 사 건은, 미국 내 교회의 한 입장이 최초로 세계적으로 문제 화되었던 사건이었다. <테스템 베네볼렌시에>에 의해 미 국 교회의 사회 운동은 어느 정도 제동이 걸렸지만, 이 때문에 가톨릭 교회의 적극적인 사회 활동이 쇠퇴한 것 은 아니었다. 이때 아메리카니즘을 주장한 사람은 세인 트 폴 대주교인 아이어란트(J. Ireland, 1838~1918)와 아메 리카 가톨릭 대학의 초대 학장이었던 킨(John J. Keane, 1839~1918) 주교였고, 보수적인 입장에서 이에 반대를 한 사람은 로체스터의 대주교인 맥퀘이드(Bernard John McQuaid, 1823~1909)와 뉴욕 대주교 코리간(Michael Augustine Corrigan, 1839~1902) 등이었다.
이와 함께 이주민과 관련된 교회 내부의 충돌도 있었 다. 20세기 초, 남이탈리아, 헝가리, 슬라브계 제국(주로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으로부터 대량의 가톨릭 신자가 이주함에 따라 미국의 가톨릭 인구는 더욱 증가하였다. 그들은 각각 자신들과 같은 민족인 사제의 지도하에 자 신들의 성당과 학교를 짓고, 독자적인 생활을 구축하였 다. 이 때문에 기존의 가톨릭 신자 및 주교 · 사제와 충돌 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충돌 속에서 그들은 독자적인 교 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1897년에 창설된 폴란드 민족 아메리카 가톨릭 교회(Polish National Catholic Church of America)와 1914년에 창설된 리투아니아 민족 아메리카 가톨릭 교회(Lithuanian National Catholic Church of America) 가 그 예이며, 일부 우크라이나 가톨릭 신자는 1891년 에 창설된 동방 정교회(American Carpatho-Russian Orthodox Greek Catholic Church)에 합류하였다.
Ⅲ 가톨릭 교회의 발전과 현재
〔새 시대의 도래와 주교 회의〕 1900년에는 미국의 총 인구 7,600만 명 가운데 가톨릭 신자가 1 200만 명이었 고, 14개 지방에 82개 교구와 12,000명의 사제와 40여 개의 수도 단체가 있었다. 이러한 발전에 힘입어 미국 교 회는 1908년 6월 29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반포된 사도 헌장 <사피엔티 콘실리오>(Sapienti Consilio)에 의해 선교지에서 벗어났고, 이후 자체의 공헌 사업을 증가시 켰다. 그리하여 현재 미국 교회는 인류 복음화성의 주요 한 기부국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미국 최초의 선교 신 학교가 1909년에 테크니(Techny)에 세워졌고, 최초의 아메리카 선교회인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1911년에 설립 되어 1918년 최초로 사제들을 중국에 파견하였다. 그리 하여 미국의 남녀 수도회는 1920년대부터 아시아, 아프 리카, 오세아니아, 라틴 아메리카로 활동 영역을 넓혀 많 은 나라에서 선교 활동에 종사하였다.
한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국 교회 는 가톨릭 신자들의 활동 조직을 통합 · 조정하기 위하여 1917년에 '전국 가톨릭 전시 회의' (戰時會議, National Catholic War Council)를 결성하였다. 이 기관은 1919년에 사회 부흥과 개혁을 위해 전국 가톨릭 복지 회의(National Catholic Welfare Council)로 개편되었는데, 여기에는 8개의 국(局, department)과 14개의 특별 위원회가 있어 교육 · 출판 · 외국 선교 · 전례 등 가톨릭 교회의 모든 활동을 총괄하였다. 그리고 1922년에는 다시 전국 가톨릭 복지 협의회(National Catholic Welfare Conference)로 개편되어 아 메리카 주교단의 중심적인 활동 기관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법률에 의해서 이민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이민에 의한 신자수의 증가는 감소하였다. 즉 1924년에 제정된 이민법에 의하면 미국에 거주하는 외국 태생의 인구를 출생국별로 분류하여 출생국별 인구의 2%에 해 당하는 수로 이민을 제한하였다. 그런데 1890년으로 기 준을 잡음으로써 이 이민법은 앵글로 색슨 및 프로테스 탄트 이민들에게 유리한 반면 가톨릭 신자에게는 불리한 법이었다. 그러나 출산과 개종에 의한 신자수는 계속 증 가하였고, 신학교 · 대학 · 성당 등도 많이 건설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백인 및 프로테스탄트 우월주의' 를 슬로건으로 내건 KKK(Ku Klux Klan)단이 재조직되면서 반(反)가톨릭 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1915년 조지아 주 에서 재조직된 이 단체는 전후 남부에서는 흑인을, 중서 부에서는 가톨릭계 이민을 박해하면서 서서히 그 세력을 뻗쳐 나갔다. 그리하여 1928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가 톨릭 신자 스미스(Alfred E. Smith)를 낙선시킬 정도로 세 력이 커졌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1930년대 중반까지 이 어졌다. 그리고 1947년에는 반가톨릭적 정서를 지닌 POAU(Protestants and other Americans United)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한편 미국에 있어서 1920년대는 '영원한 번영' 으로 표현되는 경제의 번영기였다. 그러나 1929년부터 시작 된 경제 공황은 미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어, 1932 년 말에는 전체 노동력의 3분의 1이 일자리를 잃었고, 생산고는 1929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가톨릭 회도 공황의 영향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시대에 부합 하는 자신의 역할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 기에 노동 조합 운동에 앞장섰고, 조합 지도자 양성 학교 를 세웠는데, 이러한 노동 사목은 19세기 이래로 미국 교회의 중요한 활동 분야였으며, 가톨릭인들은 언제나 노동 조합 구성원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다. 이와 함 께 영화의 윤리적 평가를 행하여 공표하는 단체(Legion of Decency)를 1934년에 설립하여 미국의 영화 산업에 영향을 미쳤으며, 정치적으로 루스벨트(Roosevelt, 1882~ 1945) 대통령을 지지하여 루스벨트는 많은 가톨릭 신자 들을 공직에 앉힘으로써 보답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교회는 변화와 발전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우선 가톨릭 신자는 1940~1960년 사이에 2,100만 명에서 4,200 만 명으로 증가하였고, 사제 · 수도 지원자도 매우 많았 다. 이러한 증가 현상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남아메리카, 유럽, 캐나다 등에서 건너온 가톨릭 이주민의 영향이 컸 다. 이들은 미국 교회의 교세를 증진시키기에 충분하였 고, 이후 사회의 발전에 힘입어 사회적 · 경제적 지위를 높여 나갔다. 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교회의 쇄 신 문제가 제기되었고, 미국 최초의 가톨릭 신자 대통령 인 케네디(J.F. Kennedy, 1917~1963)의 출현은 반가톨릭 운 동을 정치적인 영역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인 구가 도시로부터 교외로 이동함에 따라 사목 활동의 중 심으로서 본당의 역할이 감소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사회적인 변화에도 영향을 받아 1960년대 중반부터 세속화를 촉진하는 사회 변혁의 움직임, 흑인 민권 운동, 베트남 전쟁 등으로 사회적 격동이 증폭되자, 가톨릭 청 년들은 평화 부대(Peace Corps)에 참가한다든지 국내의 빈곤자에 대한 봉사 활동을 통해 그들의 이상주의를 구 체화하였고, 반전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한편 미국 교회는 1967년에 기구 개편을 단행하여 새 로운 체제를 갖추었다. 즉 1922년에 세워진 전국 가톨 릭 복지 협의회를 전국 가톨릭 주교 협의회(National Conference of Catholic Bishops)와 그 사무국인 합중국 가톨릭 협의회(United States Catholic Conference)로 개편하였다. 주 교 협의회의 간사 중에는 진보적인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 때문에 여러 가지 사회 · 정치 문제를 주제로 하는 일 련의 교서가 주교단에서 나와, 국제적으로도 주목을 받 았다. 교서에서 언급된 문제는 사회와 교회에 있어서 여 성의 역할, 가톨릭 교회에서 본 미국 경제의 양상, 핵 시 대의 전쟁과 평화 등이었다.
1980년대가 되면서 미국 가톨릭 교회 속에는 다양한 정치적 · 사상적 입장이 나타나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한 전례 쇄신을 비판하는 자도 있었고, 소수 이지만 전례 쇄신에 반대하여 가톨릭 전통주의 운동을 전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와 함께 이 시기에 미국 교 회에 나타난 흥미 있는 현상은 영성에 대한 광범위한 관 심이다. 성서 연구, 카리스마 쇄신 운동, 결혼 생활을 재 생시키는 매리지 엔카운터(M.E.) 본당 쇄신 등의 그룹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여러 수도회에서 경영하는 '피정의 집' 에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형 태의 묵상회에 참여하고 있다.
〔현 황〕 1986년 미국 교회 통계에 의하면, 미국의 가 톨릭 신자수는 5,355만 명이고, 성장 비율은 1961~ 1970년에는 15%가 증가한 데 비해, 1971~1980년에 는 5%가 증가하여 약간 정체되었다. 그러나 갤럽의 여 론 조사에 의하면, 오늘날에도 30세 이하의 미국인 중 29%는 가톨릭을 모든 종파 가운데에서 특히 호감이 가 는 종파로 인식하고 있다. 가톨릭 신자의 인구 비율은 지 역에 따라 다르지만, 대서양 연안의 북동부와 중부가 가 장 높고, 동남부가 가장 낮다. 미국 가톨릭 신자 중 약 50만 명이 가톨릭 동방 교회에 속해 있고, 아메리카 인 디언의 약 25%인 26만 4,000명과 흑인의 4%인 99만 3,000명이 가톨릭 신자이다. 필리핀, 베트남, 하이티로 부터 오는 최근의 이민 속에도 가톨릭 신자가 많다. 가톨 릭 신자의 80%는 도시 혹은 그 근교에 살고 있으며, 중 서부의 전원 지대에도 많다. 생활 수준은 대다수가 중류 또는 상류 계층에 속하며, 신자의 73%가 고등학교, 14%가 대학 교육을 받았다. 1995년의 통계에 따르면 가톨릭 교회에서 운영하는 대학은 235개, 중 · 고등학교 는 1,350개, 초등학교는 7,210개이며, 이외에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는 시설로는 602개의 병원과 다수의 노인 의 집, 양호 시설이 있다. 1995년 현재 미국에는 6,019 만 605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으며, 교구 190, 본당 19,723개에, 추기경 8, 대주교 46, 주교 343, 사제 49,947(교구 소속 32,834, 수도회 소속 16,717), 종신 부제 10,929, 수사 6,578, 수녀 92,107명이 있다.
〔미국 교회와 한국〕 미국 교회가 한국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1923년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평양 지방의 사목을 담당하면서부터이다. 그 뒤 1924년 메리놀 수녀 회가 진출하여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활동을 도왔고, 1927년 평양교구가 설정되면서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이 지방의 사목을 정식으로 담당하였다. 그러나 1941년 일 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미국과 일본이 전쟁 상태에 돌입 하자 미국인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추방당하였다. 얼마 뒤 다시 한국에 진출한 메리놀회 사제와 수녀들은 현재 까지 활발한 사도직 활동을 통해 한국 교회의 성장에 커 다란 공헌을 하고 있다.
한편 미주 지역에 한인의 수가 증가하면서 이들에 대 한 사목적 배려가 요청되자 한국 교회에서는 1960년대 후반 미국에 본당을 설립하고 이들에 대한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미주 한인 교회는 1996년 말 현재 한인 교포 신자 61,283명, 한인 교회 76, 공소 21개에, 한인 사제 65, 한인 담당 외국인 사제 13, 한인 수녀 51명이 있다. (→ 아메리카니즘 ; 메리놀 외방 전교 회 ; 메리놀 수녀회)
※ 참고문헌  J.B. Tennelly, American Indian Missions (U.S.), 1, pp. 402~407/ G.P. Fogarty, Americanism, 《EC》, pp. 40~421 Claude Folhen, 《EU》 8, pp. 867~872, 882~883/ 《EU》 Les chiffres du Monde 1994, p. 211/ Petit Robert Dictionnaire Universel Des Noms Propres 2, Paris, 1988, pp. 608~610/ 미국사 연구회, 《미국 역사의 기본 사료》, 소나무, 1992, pp. 413~449/ 시바쵸프 · 야츠코프, 《현대 미국 의 역사》, 과학과 사상, 1993, pp. 301~329/ 이보형 엮음, 《미국 역사의 새 발견》, 소나무, 1991, pp. 11~36/ 이주영, 《미국사》, 대한교과서주 식회사, 증보판, 1995, pp. 1~3, 40~58, 71~76/ C.V. 우드와드, 박무성 역, 《미국사 개론》, 법문사, 1981, pp. 158~169/ 앙드레 모로아, 신용석 역, 《미국사》, 기린원, 1994, pp. 9~21, 98~105/ 케네스 C. 데이비스, 진 병호 역, 《미국의 역사》, 고려원미디어, 1992, pp. 222~242/《브리태니 커 세계 대백과 사전》 8, pp. 193, 227~2331 《한국 천주교회 연감》, 한 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 《한국 천주교회 통계 1996》, 한국천주교 중앙협 의회, 1995/ 1996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方相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