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 신앙 彌勒信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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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 미륵보살 반가상(삼국 시대,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 .
미래불(未來佛)인 미륵보살(彌勒菩薩) 또는 미륵불 (彌勒佛)에 대한 불교 신앙. '미륵' 이란 산스크리트어의 마이트레야(Maitreya), 팔리어의 메테야(Metteya)를 뜻한 다. 중국에서는 자비(慈悲)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어 자 씨(慈氏) 또는 자존(慈尊)이라고 번역한다. 현재불인 석 가에 이어 다음 대의 부처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석가의 일생보처(一生補處)의 보살이라고도 칭한다. 〔개 설〕 《미륵하생성불경》(彌勒下生成佛經)과 《관미 륵보살상생도솔천경》 (觀彌勒菩 薩上生兜率天經)에 의하 면 미륵은 석가의 입멸(入滅) 후 56억 7천만 년이 지난 뒤, 도솔천(兜率天)에서 이 땅〔閻浮提〕에 내려와(彌勒下 生) 성불하고, 용화수 아래에서 세 번에 걸친 설법으로 중생들을 구원한다고 하였다(龍華三會) 이러한 미륵 신 앙은 상생(上生) 신앙과 하생(下生) 신앙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는 사람이 죽어서 미륵이 정주하고 있는 도 솔천에 상생했다가 미륵이 하생할 때 염부제로 내려와 3 회의 설법 중 첫 회에 참여하여 구원을 받겠다는 신앙이 며, 후자는 도솔천의 상생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미륵 을 믿고 선(善)을 쌓아서 용화삼회(龍華三會)에 참여하 기를 원하는 신앙이다. 미륵 신앙은 미륵 삼부경(彌勒三 部經), 즉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沮渠京聲 역), 《미륵 하생성불경》(鳩摩羅什 역), 《미륵대성불경〉(彌勒大成佛 經, 鳩摩羅什 역)을 중심으로 하며, 이외의 중요한 경전으 로는 《미록하생경》(彌勒下生經, 竺法護 역), 《미록하생성 불경》(彌勒下生成佛經, 義淨 역), 《미래시경》(彌勒來時 經, 失 역) 등이 있다.
〔인도 · 중국의 미륵 신앙〕 인도의 불교 신앙은 석가의 입멸 후 300년까지는 석가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다른 부처에 대한 신앙은 미미하였다. 따라서 인도에서 성립 되어 동남 아시아, 동아시아 제 민족에게 수용된 미륵 신 앙도 기원전 2세기 이후에야 발생하게 되었다. 즉 축법 호(竺法護)가 최초의 미륵 경전인 《성불경》을 한역(漢 譯)한 때가 4세기 초이므로, 미륵 신앙은 적어도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3세기 사이에 대승 불교인들에 의하여 성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근의 연구 성과에 의하면, 불상의 발상지로 유명한 간다라 지방의 유물에 미륵상이 보이고, 간다라와 더불어 불교 미술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마토우라에서도 수병(水甁)을 가진 미륵상이 발견 되었다. 또 시구리에서는 2세기 후기의 미륵상이 발견되 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2~3세기경에 인도의 미 륵 신앙이 상당히 성행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인도의 서북 지방에서 성행하던 미륵 신앙은 서역(西 域) 지방으로 유포되었고, 서역 지방을 통해서 다시 중 국에 전해졌다는 사실이 현장(玄奬)의 《대당서역기》(大 唐西域記)에 나타난다. 특히 미륵 경전이 서역 지방에 전해진 경전을 근거로 서역인에 의해 한역(漢譯)된 점은 중국의 미륵 신앙이 서역의 미륵 신앙과 깊은 관계를 맺 고 있음을 말해 준다. 중국에 있어서 미륵 경전은 4~5세기에 걸쳐서 아미 타 경전과 거의 같은 시기에 번역되었으며, 초기 중국의 미륵 정토 사상(彌勒淨土思想)은 아미타 정토 사상과 유 사성을 지니며 유포되었다. 수 · 당(隋唐) 시기에는 미륵 신앙의 발전으로 많은 미륵상이 조성되었는데, 용문 석 굴(龍門石窟)을 비롯한 많은 석굴에서 미륵상이 확인되 고 있다.
한편 이 시대의 미륵 사상은 군주의 정치 사상과도 깊 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수나라의 양제(煬帝)는 대업(大 業) 6년(610)에 미륵불임을 자처하고 황제로서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으며,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스스 로를 하생불(下生佛)이라 하고 무주혁명(武周革命)을 도모하였다. 민중들의 경우도 미륵의 하생으로 이상적인 정치가 실현되리라는 믿음이 강하여, 미륵 하생을 표방 한 많은 반란이 청대(淸代)까지 이어졌다. 오늘날에는 오대(五代) 때의 승(僧) 포대화상(布袋和尙)이 중국의 사원에 봉안되어 미륵불로 여겨지고 있는데, 여기서 중 국의 미륵 신앙이 한국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고 있음 을 살필 수 있다.
〔한국의 미륵 신앙〕 삼국 시대 : 중국에서 성행하던 미 를 신앙이 언제 한국에 전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고구려 평원왕(平原王) 13년(571)으로 비정(比定) 되는 신묘명삼존상(辛卯銘三尊像)에 무량수불(無量壽 佛)을 조성하고 망사부모(亡師父母)가 미륵을 만날 것을 바라는 명문(銘文)이 있는데, 이를 통해 삼국 시대에 미 륵 신앙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미륵 신앙 을 살필 수 있는 자료는 신묘명삼존상의 명문 외에는 거 의 없다. 이 불상은 양식적인 면에서 북위(北魏)의 용문 불상에 가깝고, 명문의 문체도 용문 석굴군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형태이기 때문에 고구려의 미륵 신앙은 북위 불교에 가까운 신앙이었으며, 미륵과 아미타 신앙이 혼재된 신앙 형태였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백제의 미륵 신앙은 상당히 융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日本書記)에 따르면 성왕(聖王) 20년에 일 본에 불교를 전하면서 미륵상도 함께 전하였고,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미시랑(未尸郞) 설화에는 신라 승 진자 (眞慈)가 꿈에 백제 지역의 사찰인 웅천(熊川) 수원사 (水源寺)에 가서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만나라는 계시 를 받고 있다. 그리고 무왕(武王)은 거대한 미륵 도량인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하였다. 익산의 미륵사는 당시의 국력을 총동원하여 36년 간에 걸쳐 완성한 사찰로 삼탑 (三塔)과 삼금당(三金堂)을 동서로 나란히 배치하고 회 랑으로 구획한 삼원 병치(三院倂置)의 양식은 어느 나라 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가람 배치 양식이다. 이는 미륵이 하생하여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 경전의 내용을 가람으로 구상화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미륵불 세계 의 국토적인 구현, 즉 백제 땅 위에 미륵불의 용화 세계 를 실현하려는 의도로서, 백제의 미륵 신앙이 한층 더 구 체적이고 적극적인 형태를 띠고 있음을 보여 준다.
신라의 경우는 원효(元曉)의 저서에서 알 수 있듯이 법상종(法相宗) 계통의 미륵 신앙이 유행하고 있었다. 원효는 《미록상생경소》(彌勒上生經疏), 《미록상생경종 요》(彌勒上生經宗要), 《성유식론소》(成唯識論疏) 등 미 륵 경전 및 유식(唯識) 관계의 저서를 많이 남겼다. 이로 써 중국과 일본에서 유행하던 유식 계통의 미륵 신앙이 신라에서도 성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외에 진흥 왕(眞興王) 때 건립된 흥륜사(興輪寺)에 미륵상이 봉안 되고, 진흥왕이 미륵 신앙의 중요한 요소인 전륜성왕(轉 輪聖王)을 자처한 사실에서도 일찍부터 미륵 신앙이 행 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신라의 미륵 신앙은 미륵이 화랑(花郞)으로 변화하였다는 것과 노힐부득(努 股夫得)과 같이 미륵 신앙에 의하여 현신 성불(現身成 佛)한다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이 두 가지 결과는 관념 적이고 이상적인 신앙으로 그치지 않고, 사실적 혹은 현 실적으로 매우 구체적인 적극성을 보이는 것이다. 즉 신 라의 미륵 신앙은 인격적인 구현을 이상으로 하며, 이러 한 신라 불교의 존재성과 가치성은 인도 및 중국에서 신 앙되던 미륵 신앙보다 매우 실질적이고 개척적인 것이라 고 할 수 있다. 신라의 미륵 신앙은 미륵이 우리 인간계 의 이상에 부응하여 현실화한다는 신앙 태도인 것이다.
통일 신라 시대 : 백제의 미륵 신앙이 국토적인 구현 을 이상으로 하고, 신라의 미륵 신앙이 인격적인 구현을 이상으로 한 것은 미륵 신앙의 방향 설정일 뿐, 미륵 불 국토(彌勒佛國土)를 이 지상에 구현시키려는 종교 운동 은 아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통일 신라 시대의 진표율 사(眞表律師)에 이르러 추진되는데, 미륵 신앙을 지도 원리로 한 진표율사는 우리 민족을 구제하고 길이 이 국 토 위에 미륵 불국토를 실현하려는 종교 운동을 일으켰 다. 그는 금산사(金山寺)를 제1 도량으로, 금강산 발연 사(鉢淵寺)를 제2 도량으로, 그리고 속리산 법주사(法住 寺)를 제3 도량으로 창건하여 용화삼회의 설법 도량을 표시하고 있다. 진표율사는 우리 국토가 특히 미륵과 인 연이 깊다는 백제 · 신라의 신앙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 며, 미륵의 교법을 받아 십악(十惡)을 참회하고 십선(十 善)을 실천시키는 교화 운동을 전개하여 이 국토에 미륵 불이 출현할 용화 세계를 구현시키려고 하였다.
고려 시대 :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의 미륵 신앙 은 주로 상층 계급을 중심으로 성행하였으나 고려 시대 에 이르면서 일반 민중에게까지 대중화되어 더욱 성행하 였다. 즉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는 전국의 석불들은 대부분 고려 시대의 양식인데, 이들이 모두 미륵불상으로 신 봉되어졌음이 그 예증이라 하겠다. 특히 이 시기에 주목 되는 것은 고려 태조(太祖)의 미륵 도량인 개태사(開泰 寺) 창건과 광종(光宗)의 관촉사(灌燭寺) 미륵 대불(彌 勒大佛) 조성, 그리고 고려 초기의 양식을 지닌 논산군 연산면의 대불이다. 이것은 고려 시대의 미륵 신앙이 논 산 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백제 시대 익산의 미륵사, 통일 신라 시대 김제의 금산사 와 함께 한국의 미륵 신앙이 구백제 지역을 중심으로 전 개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 함께 고려 시대에는 미륵 정토를 상징하는 미륵 변상도(彌勒變相圖)도 그려 지고 있다. 비록 일본 친왕원(親王院) 소장의 <미륵하생 경변상도> 1점만이 남아 있지만, 이러한 그림은 석불 등 과 더불어 고려 미륵 신앙의 성행상을 잘 설명해 준다.
조선 시대 : 조선 시대의 불교는 억불 정책하에 놓이 면서 표면적으로는 사회적인 의미를 점차 잃어 갔다. 일 부 군주의 호불 정책과 왕실의 신불(信佛)이 있기는 하 였으나 불교의 사회적인 지위를 높여 주는 데까지는 이 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시대의 불교는 민중층을 통하여 전승되고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불교의 민중화는 사실상 조선 시대에 와서 그 폭이 보다 넓어지 고 종교적인 신앙심도 더욱 깊어 갔다. 다시 말하면 유신 (儒臣)들의 불교 탄압은 오히려 불교를 민중과 연결시키 는 작용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의 민중화한 불교 에는 미륵 신앙의 맥락이 강하게 흐르고 있다는 점이 주 목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병화와 제도적인 모 순에 의한 혼란의 과정에서 이러한 '어지러운 시대' (末 法)를 구제할 수 있다고 믿은 미륵 신앙이 민중을 중심 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사상의 중심은 백제의 미륵 사상인 미륵불 국토의 구현이며, 지역도 구백제 지 역을 중심으로 계승되었다.
구한말 : 구한말은 정치적 · 사회적 · 문화적 분야에서 전환기였다. 그 가운데 특히 조선 왕조의 토대를 이루어 온 유학 사상(儒學思想)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상들이 등장하는 사상계의 동향이 주목된다. 즉 서학(西學)의 전래와 보급 및 서학에 대항하여 민족적 · 민중적 기치를 앞세운 신흥 종교의 발생과 그에 따른 민중 의식의 자각 이 그것이다. 이 시기에 발생한 각종 신흥 종교 집단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동학(東學), 증산교(甑山敎), 봉남교(奉南敎) 원불교 (圓佛教) 등은 모두 미륵 신앙적인 요소를 강하게 지녔 다. 이는 구한말의 사회적인 동향이 민중 사회로 변화하 는 점과 그 궤를 같이한 것으로 생각된다.
1860년 최제우(崔濟愚)에 의해 창시된 동학은 민중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동학의 후천 개벽(後天開闢) 사상은 용화도운(龍華道運)과 같은 이상 세계를 제시하 는 것으로 미륵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1901년에 창 시된 증산교는 동학 이후의 사상적 혼미를 담당하려고 천지 공사(天地公事)라는 교리를 들고 나왔다. 이에 따 르면 증산은 미래불인 미륵이며, 천지 공사란 바로 이상 적 불국토인 용화 세계의 건설 과정이다. 봉남교에서는 '태상노군' (太上老君)과 함께 '미륵존불' (彌勒尊佛)을 신봉하며, 봉남은 미륵불과 동일시되기도 하여 미륵 신 앙을 바탕으로 창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원불교에 서는 미륵에 의한 이상 세계, 즉 용화 세계는 일원상(圓相)의 진리가 열리는 세계라고 하는데, 이것을 볼 때 원불교도 미륵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참고문헌 金三龍, 《韓國彌勒信仰의 研究》, 同和出版公社, 1983/ ㅡ, 《彌勒佛》, 대원사, 1991/ 宮田登, 《 ミロク 信仰の研究》, 未 來社, 19771 ㅡ, 《彌勒信仰》 雄山閣, 1988/ 速水侑, 《彌勒信仰 : も ら一つの淨土信仰》, 평 론사, 1980. 〔金三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