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내 美里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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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성지 전경
한국 천주교회의 사적지.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 리(美山里) 소재. 본래 박해 시대의 교우촌으로, 1846년 의 병오박해 때 순교한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 부와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 이윤일(요한)의 시신이 이곳으로 옮겨져 안장되면서 순교 사적지의 이름 을 얻게 되었다. 그 후 두 성인의 시신은 다른 곳으로 이 장되었지만, 현재 1907년에 건립된 석조 성당과 1928 년에 건립된 김대건 신부의 경당, 1991년에 건립된 천 주 성삼 성당이 있고,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eol, 高) 주교와 김대건 신부의 모친 고(高) 우르술라, 김대건 신부의 시신 이장에 참여한 이민식(李敏植, 빈첸시오), 그리고 무명 순교자들이 안장되어 있다. 미리내는 순우리말로 '은하수' 라는 뜻인데,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 때 미리내를 한자로 미리천(美里川)이라 표기하고, 이것과 산촌(山村)의 이름을 따서 미산리라고 하게 되었다. 이 산곡에 미리내란 명칭이 붙여지게 된 것 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어 교우촌을 형성하기 이전부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이 교우촌은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충청도 지방의 신자들이 미리내 산곡으로 옮겨 살면서 형성되었고, 훗날 공소와 본당으로 성장하 게 되었다.
이곳이 특히 순교 사적지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846년 9월 16일(음 7월 26일) 서울 새남터(沙南基)에 서 순교한 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교우들에 의해 미리 내로 옮겨져 안장되면서였다. 당시 김대건 신부의 시신 은 순교한 지 40일 만에 비밀리에 거두어져 용산 우체국 뒤편의 와서(瓦署, 일명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0월 26 일 서 야고보, 박 바오로, 한경선, 나창문, 신치관, 이 사 도 요한, 이민식 등에 의해 발굴되어 미리내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후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시성 작업이 추진되자, 1886년에 시복 판사인 프와넬(Poisnel, 朴道 行) 신부가 미리내에 있던 봉분 중앙을 헤치고 홍대를 확인하였으며, 1901년 5월 21일에는 무덤을 발굴하여 그 유해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고, 10 월 17일 이를 다시 신학교 성당으로 옮겼다. 그리고 6 · 25 전쟁이 끝난 뒤인 1960년 7월 5일에 그 유해가 서울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대학으로 옮겨지면서 하악골만은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분리 안치되었다. 또 신학교의 유해 중 정강이뼈는 1983년 시성 운동이 전개될 때 교황청으로 조사차 가져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미리내에 하악골 유해와 함께 보 관되어 오고 있다.
이와 함께 본래 무덤이 있던 자리에는 1928년에 김대 건 신부의 경당이 건립되었다. 당시 미리내 본당의 주임 으로 있던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신부는, 1925년 7월 5일 김대건 신부를 포함한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에 대한 시복식이 있기 전해에 이 소식을 듣고는 여러 성 직자와 교우들의 협조를 얻어 본래 무덤이 있던 자리에 기념 경당을 건립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1928년 봄에 이를 착공하여 같은 해 7월에 준공하였으며, 9월 18일 에는 라리보(Laribeau, 元亨根) 주교의 집전으로 '치명자 의 모후' 를 주보로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이 경당의 길 이는 8m, 너비는 4m로, 경당과 무덤 둘레에는 2m 높이의 담이, 정면 중앙에는 당문(堂門)이 있다.
한편 이윤일(요한) 성인과 미리내 사적지가 관련을 맺 게 된 것은 1976년이었다. 본래 충청도 홍주 출신인 그 는 박해를 피하여 경상도 상주 땅에서 은거하며 살다가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 었고, 1867년 1월 21일(음 1866년 12월 26일) 관덕당(觀 德堂, 대구시 중구 남산2동)에서 순교하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형장 부근에 가매장되었다가 3월경에 그의 두 아 들과 매부 이응칠(토마스), 마티아 형제 등에 의해 날뫼 (대구시 비산동)로 이장되었으며, 1901년부터 경부선 철 도 공사가 시작되면서 아우인 이시영에 의해 용인 먹방 이(용인군 이동면 묵리)로 다시 이장되었다. 먹방이의 순교 자 무덤은 이때부터 '거꾸로 무덤' 으로 불리면서 구전으 로 전해져 오다가 1976년 6월 24일, 미리내의 수원교구 성직자 묘역 내에 조성된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그리고 이윤일이 성인으로 시성된 지 2년 뒤인 1986년 12월 20일 대구대교구 발굴단에 의해 대 구 관덕당 기념관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1853년 2월 3일에 사망한 페레올 주교의 시신도 이곳 에 안장되었는데, 이는 "거룩한 순교자의 곁에 있고 싶 다는 그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또 이 무렵에 사망한 김대건 신부의 모친 고 우르술라의 시신도 그 인근에 안 장되었고, 1907년에는 강도영 신부가 석조 성당을 건립 하였으며, 1921년에 사망한 이민식도 김대건 신부의 경 당 앞에 있던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후 1965년에 이 공동 묘지가 광장으로 조성되면서 고 우르술라와 이 민식의 유해가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고, 그 해부터 매 년 9월 26일경에 이 광장에서 순교자 현양 대회가 개최 되고 있다.
1970년대에 들어와 미리내는 순례 사적지로 가꾸어 지기 시작하였다. 우선 1970년에는 수원교구의 지원으 로 노곡 삼거리에서 사적지 입구까지의 길을 확장하였 고, 1974년에는 김대건 신부 기념 시비를 건립하였다. 이어 1976년에 무명 순교자 묘역이 조성된 후, 4월 23 일에는 음다라니(용인군 내사면 대대리)에서 12구의 순교 자 시신이, 12월 17일에는 지봉골(용인군 수지면 신봉리) 에서 4구의 순교자 시신이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뿐만 아니라 1976년 9월 24일 정행만(鄭行萬,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가 미리내에 정착하여 수도회를 설립한 뒤, 1978년에는 경당 앞에 제대가 설치되었고, 1979년 에는 다시 확장된 진입 도로가 포장되었으며, 이듬해 9 월 29일에는 십자가의 길(부활을 포함한 15처)이, 1984년 4월 8일에는 게쎄마니 동산이 조성되었다. 또 1982년 가을에는 사적지 안에 있던 주민들을 새로 조성된 새마 을 단지로 이주시켰고, 1991년에는 천주 성삼 성당을 건립하였다. (→ 김대건 신부 ; 미리내 본당 ; 이윤일 ; 페레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마백락, 《경상도 교회의 순교자들》, 대건출판사, 1989/ 천주교 수원 교구, 《수원교구 30년사》, 1993/ 車基 眞, <박해 시대의 교우촌 미리내>, 《가톨릭 다이제스트》, 1996. 8, pp. 82~86/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전기 자료집 3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7. 〔車基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