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내 본당
美里川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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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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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소속 본당.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 141 소재. 1896년 4월 26일 갓등이〔旺林〕 본당에서 분 리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요셉. 관할 구역은 미산리와 노곡리, 난실리, 장서리 등이고, 노곡에 공소가 있다. 설 립된 지 56년 만인 1952년에 자 본당인 양지(陽智) 본 당의 공소가 되었으며, 1955년에 준본당으로 부활하였 다가 1964년에 안성 대천동(大泉洞) 본당의 공소가 되 었고, 1976년에 다시 준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교 세〕 1896년 1,821명, 1897년 1,779명, 1912년 3,043명, 1913년 1,887명, 1922년 1,818명, 1964년 1,164명, 1976년 420명, 1992년 536명. 〔역대 신부〕 초대 강도 영(姜道永) 마르코(1896. 4~1929. 3), 2대 뤼카(Lucas, 陸 加恩) 프란치스코(1929. 4~1932. 9), 3대 최문식(崔文植) 베드로(1932. 9~1952. 10), 4대 신종호(申宗浩) 요셉(1955. 4~1959. 5), 5대 윤형중(尹亨重) 마태오(1959. 5~1961. 1 ), 6대 김철규(金哲珪) 바르나바(1962~1963. 6), 7대 김창문 (金昌文) 요셉(1963. 6~1964. 7), 8대 정행만(鄭行萬) 프 란치스코 사베리오(1976. 10~현재). 〔교우촌과 공소 설립〕 지금의 안성과 용인 일대에서 가장 먼저 교우촌이 형성된 곳은 미리내를 포함하여 용 인군의 한덕동(寒德洞, 이동면 墨里), 골배마실(내사면 南 谷里), 굴암(窟岩, 이동면 묵리), 검은정(巨文亭, 이동면 묵 리) 등지였다. 이들 대부분은 이웃해 있는 산간 지역으 로, 박해를 피해 온 충청도 신자들과 경기도 일대에 흩어 져 살던 신자들이 함께 모여 살면서 이룩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 미리내 교우촌은 충청도에서 피난해 온 신자들로 형성되었는데, 훗날 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장하는 데 참여한 이민식(李敏植, 빈천시오, 1829~1921)의 집안 도 조부 때 이곳으로 이주해 와 정착하였다. 이처럼 교우 촌이 형성되어 있었으므로 1846년 10월 26일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용산 와서(瓦署, 일명 왜고개)에서 발굴되 어 이곳으로 이장된 것이다. 그 후 이민식은 전라도로 피 신했다가 돌아와 한때는 사제가 될 생각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라틴어를 공부하기도 하였으며, 그 후에는 약현 (藥峴) 본당의 초대 주임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의 복사로 있었다.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미리내는 선교사들이 피신하여 한국말을 배우는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1866년의 병인 박해로 인해 신자들이 피신함으로써 일시 폐허가 되었다 가 박해가 끝난 뒤에 다시 교우촌이 재건되면서 교세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에 서울교구의 경리와 시복 조사를 담당하고 있던 뮈텔(Mutel, 閔德孝) 신부는 1883년에 이 곳을 방문하고 미리내 공소를 설립하였는데, 당시 신자 수는 82명이었다. 이듬해 미리내 공소의 신자수는 99명 으로 증가되었으며, 1885년부터는 프와넬(Poisnel, 朴道 行) 신부가 이곳을 방문하였다. 그러다가 1888년 7월 앙드레(André, 安學古) 신부가 갓등이에 부임하여 한강 이남의 첫 본당인 갓등이(현 왕림) 본당을 설립하게 되자, 미리내 공소도 이 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이 무렵에 이민 식은 자신의 집과 선산 일부를 공소에 내놓고 산 너머에 있는 검은정이로 이주하였으며, 1894년 갓등이 본당의 2대 주임 알릭스(Alix, 韓若瑟) 신부는 공소 집회소와 이 곳에 들르는 성직자들의 숙소로 이용하고자 공소전 200 냥으로 김대건 신부 무덤 가까이에 강당을 건립하였다.
〔본당 설립과 초기 현황〕 미리내의 신자들은 1895년 10월 17일, 뜻하지 않게 빌렘(Wilhelm, 洪錫九) 신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 본당을 설립하려 고 온 것이 아니라 병을 얻은 알릭스 신부 대신 갓등이 본당의 사목을 임시로 맡기 위해 온 것이었다. 이렇게 하 여 미리내 강당에 거처를 정한 빌렘 신부는 10월 28일 부터 4개월 동안 경기도 일대에 있는 31개의 공소들을 순방하였는데, 당시 그가 방문한 총 신자수는 1,821명 이었고, 그중 미리내 공소의 신자수는 177명이었다. 그 후 빌렘 신부는 1896년 3월에 미리내를 떠나 황해도 안 악 본당으로 부임하였다.
이 무렵 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재임하던 뮈텔 주교는 미리내에 또 하나의 본당을 설립할 필요성이 있다는 생 각을 갖게 되었다. 이에 1896년 4월 26일 갓등이 본당 에서 미리내 본당을 분리 신설하고, 이날 서품을 받은 한 국인 강도영(마르코)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강도영 신부는 5월 20일 미리내에 부임하여 이듬해 4월 까지 공소 순방을 마무리하였는데, 당시 본당의 공소들은 양지 · 죽산 · 이천 · 광주 · 용인 · 양성 일대에 모두 30~40개가 흩어져 있었고, 총 신자수는 1,779명, 미리 내 공소의 신자수는 177명이었다. 이 중에서 죽산 일대 의 공소는 1900년 10월 안성 본당(구포동 본당의 전신)의 설립으로 미리내 본당에서 분리되었다. 한편 1901년 5 월 21일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신학교로 옮겨지게 되었다.
강도영 신부는 부임 초 기에 기존의 한옥 강당을 성당 겸 사제관으로 사용하다 가 신자수가 증가하자 1904년에 새로 410평의 대지(지 금의 성당 터)를 매입하였고, 1906년 여름부터 성당 건축 을 시작하여 1907년 초에 자연석으로 성당(건평 80평)을 건립하고, '성 요셉' 을 주보로 하여 낙성식과 강복식을 가졌다. 강도영 신부는 이에 앞서 미리내 일대에 뽕나무를 심 고 신자들에게 양잠 기술을 가르쳤다. 그리고 1907년에 는 석조 성당 이웃에 학교 건물을 건립하여 초등부 과정 의 해성학원(海星學院)을 열었고, 동시에 해성 제사(製 絲) 공장도 열었다. 이 무렵부터 본당의 신자수는 크게 증가하게 되었으며, 성당 종을 마련하여 1913년 3월 30 일 뮈텔 주교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같은 해 5 월 뮈텔 주교는 용인 압고지〔前垈里〕 본당(용인 본당의 전 신)을, 1927년 9월에는 다시 남곡리(南谷里) 본당(양지 본당의 전신)을 분리 신설하였으며, 압고지 본당은 그 후 1930년에 폐쇄되면서 남곡리 본당으로 편입되었다. 그 결과 미리내 본당의 관할 구역 중에서 양지 · 이천 · 광주 등과 용인의 북동쪽 지역이 분리되어 나감으로써 본당의 교세는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1925년 김대건 신부의 시복식이 있게 되자, 강도영 신 부는 이를 기리기 위하여 1928년에 김대건 신부 경당을 본래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건립하고 9월 18일 라리보 (Larribeau, 元亨根) 보좌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 다. 그러나 강도영 신부는 이듬해 공소를 순방하던 중에 장티푸스에 전염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본당의 폐쇄와 부활〕 강도영 신부가 사망한 뒤 강원 도 용소막(龍召幕) 본당에 있던 뤼카(프란치스코) 신부 가 1929년 4월 4일 2대 주임으로 임명되어 그날 부임하 였다. 이후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후원으로 신자들을 도우면서 활동하다가 1932년 9월 19일에 안성 본당으 로 전임되고, 최문식(베드로) 신부가 같은 날 3대 주임 에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최문식 신부는 북간도의 조양 하(朝陽河) 본당에서 사목하던 중 마적들에게 체포되었 다가 가까스로 석방될 수 있었는데, 이때의 후유증으로 인해 미리내 본당 재임시에는 강론조차 제대로 하지 못 할 정도였다. 이후 그는 20년을 미리내에서 활동하였으 며, 1935년에는 사제 서품 은경축을 가졌고, 해방의 기 쁨을 맞이한 뒤에는 복자 축일 행사를 재개하기도 하였 다. 반면에 그가 육성하고자 하였던 해성학원은 일제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인해 1936년에 폐교되고 말았다.
1952년 10월 사망한 최문식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무 덤 옆에 안장되었으며, 동시에 미리내 본당은 자 본당인 양지 본당의 공소로 전락하였다. 1955년 4월 30일 휴양 하고 있던 신종호(요셉) 신부가 부임하면서 준본당으로 부활하였으나 4년 만인 1959년 5월 25일자로 전임되 고, 윤형중(마태오) 신부가 5대 본당 신부로 부임하게 되었다. 윤형중 신부는 이곳에서 《상해 천주교 요리》(詳 解天主教要理) 하권을 집필하는 데 노력하다가 1961년 1월 7일자로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의 지도 신부로 전임 되었고, 그 결과 미리내 본당은 공석이 되고 말았다. 또 그 뒤를 이어 1962년에 부임한 김철규(바르나바) 신부 는 휴양차 이곳에 머물다가 본당 신부로 임명되었지만 이듬해 6월 27일 전임되었고, 같은 날 김창문(요셉) 신 부가 7대 본당 신부로 임명되었다.
김창문 신부 재임 때인 1963년 10월 7일, 수원교구가 설정되면서 미리내 본당도 서울대교구에서 새 교구로 편 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7월 2일 김창문 신부가 전임됨 과 동시에 본당은 다시 안성 본당의 공소로 전락하였고, 이후에는 휴양하는 신부들만이 가끔 와서 거주하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1965년에는 김대건 신부의 경당 앞에 있던 공동 묘지가 이장되면서 그곳에 있던 고 우르 술라와 이민식의 무덤이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으며 공동 묘지가 있던 자리는 광장으로 조성되어 그 해 9월 26일부터 순교자 현양 대회가 매년 개최되고 있다.
〔본당의 현재〕 1976년 미리내 공소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부산 광안리에서 남녀 수도회 창설을 준비하던 정행만(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가 수원교구장 김남 수(金南洙, 안젤로) 주교의 허락을 받아 미리내에 정착 하게 된 것이다. 같은 해 9월 24일 미리내에 부임한 정 행만 신부는 우선 남녀 수도회를 재개하였고, 이어 10월 12일 미리내 공소가 다시 준본당으로 승격되면서 주임 신부로 임명되었다. 이 수도회 중에서 '미리내 성모 성 심 수녀회' 는 1983년 7월 11일 교황청으로부터 회헌을 승인받고, 이듬해 2월 2일 수원교구장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며, '미리내 천주 성삼 성직 수도회' 는 1991년 3 월 19일에 교황청으로부터 회헌을 승인받음과 동시에 수원교구장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이처럼 수도회가 미리내에 자리잡게 된 이후 사적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아울러 미리내 본당에도 변화가 있게 되었다. 우선 1984년 7월에 노곡 공소 강당(건평 99평)을 건립하였고, 1985년에는 대건회와 레지오 마리 애, 1986년에는 예수 성심회를 설립하였다. 또 1986년 에 석조 성당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으며, 1989년 3월 에는 노곡 공소에 본당 부설 유아원을 개설하고, 1992 년 12월 17일에는 본당 사무실을 개설하였다. 이처럼 미리내 본당은 유서 깊은 교우촌으로 출발한 이래 순교 사적지와 함께 성장해 왔지만,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관 할 구역과 교세가 축소되면서 폐지와 부활을 거듭해 오 다가 1976년부터는 미리내 수도회의 준본당 역할을 하 게 되었다. (→수원교구 ; 미리내 ; 미리내 성모 성심 수 녀회 ; 미리내 천주 성삼 성직 수도회)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本堂別 교 세 통계표>(필사본), 1883~1924/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강도영 신 부의 서한>(필사본), 韓國敎會史研究所 역편, 《서울敎區年報》 I~ Ⅱ, 明洞天主教會, 1984 · 1987/ 천주교 수원교구, 《수원교구 30년 사》, 1993. 〔車基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