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이래 약현(현 중림동) 성당에서 설립, 운영하던 교회 학교. 처음 서당에서 출발하여 일제 때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보통학교가 되었으나 6 · 25 동란으로 인하여 폐교되었다. 구한말에서 일제 시기에 이르는 동안 서울 문밖 교우 자녀들을 효과적으로 양육하고 외교인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공이 크다. 부설 유치원인 가명유치원은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연혁과 활동〕 보통학교 : 1890년경 약현 본당에 부임한 두세(Doucet, Camille Eugène, 한국명 丁加彌, 1853~1917) 신부는 1893년경 한국 최초의 성전 건축인 약현 성당을 완공한 뒤 1895년에 '약현 서당' 이라는 아동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후일 가명학교의 기원을 이루었다. 1901년 소녀들의 교육을 위해 성당 구내에 여학교를 설립하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한국인 수녀들에게 위임하였다. 소녀 교육을 위임받은 두 수녀들은 종현 본원에서 약현으로 매일 출퇴근하면서 교리와 경문, 한글, 한문, 바느질, 예의 범절 등을 가르쳤다. 학생수가 늘어나자 두세 신부는 1906년에 '약명학교' (藥明學校)라는 남학교를 설립하면서 종래의 여학교를 '가명학교' (加明學校)라고 명명하였다. '가명' (加明)이란 설립자 두세 신부의 세례명인 가밀로(Camile)의 한자식 표현(加彌, 또는 加明)이었다. 1909년 두세 신부는 교사를 증축하고 약명학교와 가명학교를 통합하여 '가명학교' 로 부르고, 재정난을 겪으면서도 이 학교를 공립학교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자 노력한 결과 일제의 학무국 감독관들도 '학교의 시설, 운영, 수업 및 학생들의 거동 등에 있어서 모든 사립 학교 중 으뜸' 이라고 칭찬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생수가 급격하게 불어나면서 다시 옛날의 낡은 건물까지 교사로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17년 두세 신부가 사망하고 비에모(Vilemot, Marie Pierre Paul, 한국명 禹一模, 1869~1950) 신부가 약현 본당 제2대 주임 신부로 부임한 후 1918~1919년에 좋은 시설을 갖춘 여학교와 남학교를 연이어 신축하고, 뮈텔 주교가 축성식을 거행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5년 일제의 '사립 학교 규칙령' 에 의해 종교 과목을 정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모든 교사들에게 교
원 자격증을 요구하여 운영상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이에 1923년 남녀 학교를 병합하여 '사립 가명학교' 로 개편하였다. 당시에 제정된 '사립 가명학교 의 교칙을 검토해 보면 본교는 초등의 보통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로 학생수는 350명, 수업 연한은 4년제(1925년 보통학교 이후 6년제)로 규정되어 있다. 또 교과목은 수신(修身), 국어(國語), 조선어(朝鮮語) , 한문(漢文), 산술(算術), 창가(唱歌), 체조(體操), 도화(圖畵), 재봉(裁縫), 수예(手藝) , 상업 초보(商業初步) 및 경문(經文) 등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상업 초보는 남학생에, 수예 재봉은 여학생에 해당되고 경문은 선택 과목으로 되어 있었다. 1개 학년은 3개 학기로 구성되어 4월 1일부터 다음해 3월 31일 까지였으며, 학기 시험, 학년 시험, 임시 시험 등이 있었다. 8세 이상의 품행이 방정한 아동들에게 입학이 허가되었고, 1개월 간 수업료는 15전이었다. 1923년 당시 교직원수는 교장 1명, 교사 8명이었으며, 10인의 협의원(協議員)과 5인의 학무위원(學務委員)이 구성되어 있어 교내의 중요한 사항을 심의하는 데 참여하였다. 1925년 4월 총독부와 교섭을 벌여 6년제 보통학교로 인가받고 남 · 여 각각 6학급으로 편성하여 박영조(朴永祚) 교장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육영 사업에 나섰다. 1926년 김윤근(金允根, 요셉) 신부가 제3대 약현 본당 신부로 부임하여 가명학교 관리도 담당하게 되면서 1927년 학교 교무실이 건립되었고, 여학교 교사를 이층으로 증축하였다. 1933년경에는 12개 학급에 15명의 직원과 750명의 남녀 생도들이 있었으며, 특이한 것은 50명의 학생으로 구성된 1개의 교리 연구반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명학교는 진학률이 높아 한때 100여 명의 지원생을 거절할 정도로 호응도가 높았으나, 만성적인 재정난과 교육의 제약 및 우수한 자질을 갖춘 교사 확보의 어려움 등의 이유로 학교 운영에 있어서 전체적인 난관에 봉착했으며, 점차 더해 가는 교우들의 방관적인 자세가 겹쳐져서 효과적인 교우 자녀들의 양육과 관리에 허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1950년 6 25 동란을 계기로 폐교되고 말았다. 역대 교장은 장석주(張錫周), 유길준(兪吉濬), 이학호(李鶴浩), 정인환(鄭寅煥), 박대유(朴大有), 박영조(朴永祚) 씨 등이었다.
유치원 : 1927년 가명학교 교사인 샬트르 성 바오로회의 마리 데니스 수녀가 '약현 유치반' 을 조직하여 경문과 유희, 노래 등을 가르치기 시작함으로써 현재의 '가명 유치원' 을 창설하였다. 1934년 정식 인가를 받았는데, 처음 약 40명의 원아가 1933년경에는 50명으로, 1943년에는 180명으로 늘었다. 이렇게 원아수가 증가한 것은 그 당시 학부형들이 대부분 상인이나 역원들로서 유치원에 대단히 협조적이었기 때문이다. 1937년 조선 총독부로부터 다시 설치 인가를 받았고, 6 · 25 동란으로 휴교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1954년 성가회 수녀들에 의해 육아 사업이 재개되었으며, 1956년 3월 서울특별시로부터 재인가를 받게 되었다. 1964년과 1967년에 다 시 학급을 증설하는 등 시설을 확장하였다. 6 · 25 동란 전까지 1,692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고, 1955년 다시 개원한 이후 1991년까지 49회에 걸쳐 5,22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가명 유치원의 원훈은 처음에 튼튼튼한 어린이, 명랑한 어린이' 였다가 1980년부터 '착한 어린이, 튼튼한 어린이, 슬기로운 어린이' 로 바뀌었으며, 1991년 현재 유아의 정서적, 지적, 신체적, 사회적 교육 과 아울러 천주교 교육을 병행함으로써 가톨릭 정신을 통한 훌륭한 민주 시민의 양성에 노력하고 있다. 1955년 재개원한 이후의 역대 원장은 김철규(발라바), 신인식(바오로), 신인균(요셉), 박병윤(토마스), 김영일(발타살), 최광연(모이세), 김창석(다두), 김정수(레오), 여형구(미카엘), 차인현(알로이시오) 신부 등이었다. 1991년도 현재 3개 학급에 남아 61명, 여아 56명 등 총 117명의 원아들이 교육을 받고 있다.
※ 참고문헌 《天主公敎會略史》, 경성교구 천주교청년연합회, 1991, pp. 53~541 7 ラ リ ホ 편, 天主教會 藥峴地方史》, 약현천주교 청년회, 1933, pp. 1~71 최석우 저, 《약현본당사》, 약현천주교회, 1976, pp. 10~21/ 《약현 본당 100년사 자료집》 1~5권/ 《서울대교구 교구총 람》, 서울대교구, 1984, p. 663/ 《가톨릭 사전》. 〔元載淵〕
가명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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