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알롱, 장 루이 Mialon, Jean Louis(1871~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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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루이 미알롱 신부.

장 루이 미알롱 신부.

파리 외방전교회 소 속 한국 선교사. 세례 명은 요한. 한국명은 맹석호(孟錫浩). 1871 년 1월 4일 프랑스 퓌 (Puy) 교구 오트 르와르 (Haute Loire)의 살레트 (Salettes)에서 태어나 샤르트뢰즈(Chartreuse) 소신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1891년 9월 29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 교에 들어가, 1896년
6월 28일 졸업과 동시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어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그 해 7월 29일 파리를 출발, 9월 10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한국어를 배우면서 종현(鐘峴, 현 명동) 본당에서 사목을 돕다가 1897년 5월 8일 비에 모(Villemot, 禹一模) 신부의 후임으로 전라북도 되재(升 峙, 현 고산) 본당 2대 주임으로 임명되었으나, 본래 폐 기 능이 약한데다가 과중한 사목 활동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906년 5월 5일 치료차 홍콩의 베타니 요양소(Sanatorium de Béthanie)로 떠났다. 이듬해 8월 귀국하여 정읍(井邑) 의 신성리(新城里, 현 시기동) 본당 2대 주임으로 임명된 미알롱 신부는 약 17년 동안 신성리 본당에 재임하면서 초기부터 매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여 기와집 성당 및 사제관, 회합실 등을 신축하고 성당 주변에 돌담을 쌓는 등 본당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 교세 신장에도 많은 기여를 하여 부안(扶安), 장성(長城), 고창(高敞), 창평 (昌平), 순창(淳昌), 담양(潭陽) 등 전라도 여러 지역과 충청남도 은진(恩津), 진산(珍山) 등지의 공소를 맡아 사목함으로써 1910~1911년경에는 신성리 본당의 교 세가 관할 공소 20개에 신자수 1,000여 명에 이르게 되 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으로 1914년 수류(水流) 본당 주 임 페네(Peynet, 裵嘉祿) 신부가 소집령을 받고 본국으로 돌아감에 따라 1918년 3월까지 수류 본당 주임을 겸하 기도 하였으며, 1922년 10월 19일에는 다시 폐병이 악 화되어 홍콩 베타니 요양소로 갔다가 이듬해 7월 9일 신 성리 본당 주임으로 복귀하였다. 이어 1924년 9월 26일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본국으로 휴가를 떠나 3년 후인 1927년 10월 29일 한국에 재입국하였으며, 이듬해 6월 12일 대구 비산동(飛山洞)에 부임하여 본당을 창설하였 다. 그러나 몇 달 후에 병이 재발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가 68세 때인 1937년 8월 18일 프랑스의 몽브톤 요양소 (Sanatorium de Montbeton)에서 사망하였다.
※ 참고문헌  M.E.P., Nécrologe, Nazareth-Hongkong, p. 304/ 《경향 잡지》 860호(1937. 8), p. 454/ 천주교 대구대교구사 편찬위원회, 《大 邱本堂百年史》, 대건출판사, 1986/ 천주교 대구대교구 편, 《교구 총 람》, 대구대교구 홍보국, 1986/ 한국교회사연구소, 《드망즈 주교 일 기》, 가톨릭신문사, 1987/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연표》, 호남 교회사연구소, 1993/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텔 주교 일기》 II ~ Ⅲ, 천주교 명동 교회, 1993. 〔李裕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