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조각가. 건축가. 화가. 1475년 3월 6일 피렌체 근방의 카프레세(Caprese)에서 태어나 13세 되던 1488년 피렌체의 이름난 화가 기를란다이오(Domenico Ghirlandaio)의 제자로 들어가 1년 간 지도를 받은 후, 14 세 때부터 피렌체의 통치자인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 으면서 조각 작품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1494년에는 볼 로냐(Bologna)로 가서 성 도미니코의 묘소를 장식하기 위한 작은 조상들을 조각하였는데, 이곳에서 조각한 <바 쿠스>(Bacchus)로 명성을 얻어 1498년에 바티칸의 성 베 드로 대성전에 놓을 <피에타>(Pieà)를 주문받았다. 이 작 품으로 명성이 더욱 확고해진 그는,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1504년에 피렌체 대성전을 위한 <다비드> (David)를 완성하였다.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의 최초의 기념비적인 작품이자 미켈란젤로 예술의 독자성이 여실 히 드러나 있는 이 <다비드>는 시(市) 원로들에 의해 피 렌체 공화국 시민의 애국적인 상징으로서 베키오 궁전 (Palazzo Vecchio) 앞에 놓이게 되었다. 골리앗의 머리 부 분이 생략되어 있는 건장한 청년으로 표현된 <다비드>는 승리의 영웅이라기보다는 정의의 투사처럼 보인다. 미켈 란젤로는 수년 간 로마에서 지내면서 내면의 감정을 담 고 있는 근육적인 인체를 보여 주는 헬레니즘 조각의 초 인간적인 규모와 아름다움과 힘, 그리고 부풀어오르는 양감의 표현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이러한 헬레니즘 적인 요소들은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양식, 더 나아가 르 네상스의 일반적인 양식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다비드>를 단순하게 고대 조각으로 간 주할 수 없는 이유는, 이 작품이 평온하면서도 동시에 긴 장되어 있는 인물을 표현하는 미켈란젤로의 정중동(靜中 動)의 특성을 잘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 1504년에 그는 베키오 궁전 대회의실의 벽화 작업에 착수하였는 데,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맡은 또 다른 벽화 와 한 쌍을 이루게 되어 있었지만 미완성으로 중단되어 현재 복사본으로만 남아 있다.
미켈란젤로는 1505년 로마에 가서 당시의 교황 율리 오 2세(1503~1513)의 묘소를 주문받았으나 비용 문제로 곤란을 겪었다. 이에 피렌체로 돌아간 그를 다시 소환한 율리오 교황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제작을 맡겼다. 교황 율리오 2세의 묘소 작업을 다시 하려는 열정으로 의뢰받은 천장화를 4년(1508~1512)에 걸쳐 완성한 이 획 기적인 대작은, 수백 명의 인물들이 건축적인 틀 속에 율 동적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보 인다. 그 규모와 강한 내적 통일성으로 이전에 그려 놓은 성당의 다른 벽화들은 움츠러드는 듯하다. 다섯 쌍의 대 들보로 구분된 중앙 부분에는 창세기의 아홉 가지 장면 들이 펼쳐져 있는데, 천지 창조부터 술에 취한 노아까지 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장면들을 선택한 신학적인 배 경은 충분히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이 작품이 인류 창조 이야기와 그리스도의 출현, 즉 시간의 처음과 끝을 연관 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계획이 어느 정도까지 미 켈란젤로 자신의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천 지 창조, 원죄, 하느님과 원죄를 지은 인간의 궁극적인 화해라는 이 장대한 주제는 미켈란젤로 자신의 기질에 적합하였으리라고 평가된다.
미켈란젤로의 상상력을 깊이 고양시킨 작품이라 여겨 지는 천장화 중앙 부분의 '아담의 창조' 는 아담의 육신 을 창조하는 순간을 그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섬광, 즉 영혼이 통과하는 순간을 형상화한 것이다. 대지에 밀착 된 아담과 하늘을 가로지르며 지나가는 하느님의 모습을 대비시켜 놓은 표현의 역동성은 그 이전의 어떤 작가도 이루지 못하였던 뛰어난 것이다. 아담이 자신을 창조한
하느님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동시에 아직 창조되지 않 고 하느님의 왼팔 안에 있는 이브를 향하고 있는 것을 보 면 아담과 창조주와의 관계가 더욱 의미 심장하다.
미켈란젤로는 색채가 빈곤한 작가로 여겨졌으나 최근 에 이 벽화의 색채를 복원하면서 부당한 평가였음이 밝 혀졌다. '원죄' 와 '낙원에서의 추방' 은 대담하고 강렬한 색조를 보여 주며, 그가 사용한 색채는 놀랄 만큼 다양하 다. 그 이전의 평가와는 대조적으로, 영웅적인 인물들은 결코 색칠된 조각이 아니며, 생동감 넘치는 각 인물들은 건축적인 배경에 구멍을 뚫어 놓은 듯한 착시적인 '창문 들' 안에서 그들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단순하 게 윤곽선 안의 면을 칠한 것이 아니라 조토(Giotto)와 마 사초(Masaccio)의 전통을 이어받은 넓고 힘찬 필치로 인 물들의 형태를 만들었는데, 특히 '낙원에서의 추방' 은 마사초의 양식에 가깝다.
천장화가 완성되자 미켈란젤로는 곧바로 교황 율리오 2세의 묘소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 그는 이 묘소를 위 해 <노예들>과 <모세>(Mose)를 조각하였으나, 1513년 율리오 2세가 사망하자 묘소 작업을 위한 예산은 대부분 삭감되었고, 메디치 가문 출신인 후임 교황 레오 10세 (1513~1521)는 그를 피렌체로 돌려보냈다. 브루넬레스키 (F. Brunellechi)가 1421년 혁신적인 설계를 한 지 1세기 가 지난 후, 레오 10세 교황은 이 메디치 가문의 산 로렌 조(S. Lorenzo) 성당에 새로운 제의방을 짓고 이 성당에 딸린 묘소에 로렌조(Lorenzo)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 (Giuliano)의 묘소를 두고자 하였는데, 이 계획을 담당한 미켈란젤로는 1527년까지 14년 동안 이 일에 종사하였
다. 건축과 조각이 조화를 이룬 이 작품은 조상들이 계획 한 자리에 놓인 미켈란젤로의 유일한 작품이다. 이 두 묘 소는 초기 르네상스의 작품과 유사성을 보이지만 비명 (碑銘)이 없고 죽은 자의 덕을 찬미하는 초상이 두 개의 우의적인 조각상(오른편에는 <낮>, 왼편에는 <밤>)으로 대치 되어 있다.
1530년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문의 가족 묘소 작업 을 재개하던 중, 1534년 새 교황으로 선출된 바오로 3 세의 주문을 받아 시스티나 성당에 프레스코화인 <최후 의 심판>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유럽이 종교 개혁으로 인하여 정신적 · 정치적인 위기를 겪고 있 던 탓인지 25년 전 그린 활력으로 충만한 천장화와는 달 리 <최후의 심판>의 분위기는 충격적으로 변화했음을 직 접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축복을 받은 자이건 저주를 받 은 자이건, 인간 모두가 서로 몸을 움츠리고 무리를 지어 분노에 찬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비를 빌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밑에 수염이 긴 노인은 순교자 바르톨로메오인 데, 살갗이 벗겨져 처형된 자신의 순교를 나타내는 듯이 인간의 껍질을 들고 있다. 그런데 그 순교자가 들고 있는 살갗의 얼굴은 그 성인의 것이 아닌 바로 미켈란젤로 자 신의 것이다. 무서울 만큼 자조적인 이 자화상을 통해 그 는 자신의 죄악과 무가치함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이 완성된 1541년 이후 그는 로마 캄피돌리오 광장 과 성 베드로 대성전의 둥근 지붕을 위한 계획을 준비하
였다. 비록 직접 완성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사후 그의 계획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완성되었다.
〔평가 및 영향〕 미켈란젤로는 건축, 회화, 조각 등 넓 은 분야에 걸쳐서 고전주의의 완성에 기여하였으며, 그 의 인물에 대한 힘찬 표현과 복잡한 구성으로 매너리즘 과 바로크를 예견하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제작한 조각 작품 <론다니니의 피에타>(Rondanini Pietà)에서 그는, 이 전의 작품들이 무의미해진 듯 새로운 형태를 추구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이 군상은 일부가 그의 손에 의해 파괴되 었는데, 그는 로마에서 1564년 2월 18일 89세로 사망 하기 전까지 이 작품과 투쟁하였던 것 같다. 정서적인 내 용으로 볼 때 그 주제는 이 작품을 자신의 무덤으로 삼으 려 했음을 암시한다. 이 작품에는 극히 개인적인 그림자 가 짙고 하느님에게로 향한 속죄의 기도를 담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회화를 눈에 보이는 세계의 모 든 것을 포착할 수 있는 최고의 예술로 생각했던 것에 반 해, 미켈란젤로는 철두철미한 조각가였다. 그에게 있어 서 예술은 과학이 아니라 신의 창조와 유사한 '인간의 창작 활동' 이었다. 따라서 레오나르도가 비난하였던 조 각의 한계는 미켈란젤로의 눈에는 필수적인 장점이었다. 그에게 회화란 조각적인 형태의 입체감을 모방해야 하는 것이었으며, 건축 또한 인체의 유기적인 성질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창조자로서의 예술가의 체험에 대하여 미켈란젤로는 '대리석 안에 갇혀 있는 인물을 해방시키
기 위해' 인물 조각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주 채 석장에 갔으며 그 자리에서 자신이 사용할 재료를 쪼아 냈다고 한다. 대리석의 감옥' 속에 갇혀 있는 인물은 마 치 모태 내의 태아처럼 대리석의 표면을 힘껏 밀어내면 서 숨쉬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이렇게 희미하게 느껴지 는 갇혀진 인물의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 언제나 많은 소묘를 하였으며, 때로는 왁스나 점토로 작은 모델을 만 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초 작업 후에 그는 감추어져 있 는 인물을 해방시키기 위한 자신과 재료 사이의 투쟁을 시작하였다. 인물상에 대한 그의 구상이 정확하지 못할 경우에는 갇힌 인물을 완전히 해방시킬 수 없었는데, 이 런 경우 미켈란젤로는 작업을 포기하고 미완성인 채로 남겨 두곤 하였다.
인간의 형상이 표현의 최고 매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의 어느 작가보다도 고전 조각에 친밀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젊었을 때 피렌체에서 알고 있었던 다른 작가들보다도 조토, 마사 초, 도나텔로(Donatello) , 야코포 델라 궤르치아(Jacopo della Quercia)를 존경하였다. 그러나 1480~ 1490년대의 피렌체의 문화적인 풍토, 즉 피치노(Marsilio Ficino)의 신 플라톤주의와 사보나롤라(Savonarola)의 종교적인 개혁 들이 그의 관점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상충되는 영향들은 그에게 성격의 긴장을 고조시 켰고, 그의 격한 감정의 변화, 자신의 내면과 세계와의 불화감을 심화시켰다. 그는 자신이 조각해 놓은 인물이 대리석 감옥으로부터 풀려 난 인간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처럼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육체 와 정신의 이원성으로 인해 그의 조각상에서는 이례적인 비애감이 느껴진다. 즉 외면적으로는 고요하지만, 신체 의 움직임으로 방출되지 못하는 압도적인 내부의 심리적 인 힘에 의해 꿈틀거리는 듯이 보인다. (→ 회화 ; 가톨 릭 건축 ; 시스티나 성당)
※ 참고문헌 H.W. Janson, History ofArt, 3rd ed., Harry N. Abrams, 1986, pp. 451~458/ ㅡ, A Basic History of Art, New York : Harry N. Abrams, 1971(이일 편역, 《서양 미술사》, 미진사, 1987)/ ㅡ, History of Art, New York : Harry N. Abrams, 2nd ed., 1977(김윤수 외 역, 《미술 의 역사》, 삼성출판사, 1987)/ 《세계 미술 대사전 : 서양 미술사》 I, 한국미술연감사, 1985, pp. 278~279. 〔鄭泳沐〕
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mi(1475~1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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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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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대성전에 놓인 <피에타>(왼쪽)와 피렌체 공화국 시민의 애국적인 상징으로서 베키오 궁전 입구에 세워진 <다비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