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기해박해(己亥迫害) 때의 순교자. 회장.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스테파노. 1787년(정조 11) 인천(仁 川)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 홀아버지 밑에서 성장하였다. 어른이 된 후 본래 외교인이었 던 그의 집안은 부친을 비롯한 형제들이 모두 입교하여 매우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수계하였다. 교우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20여 세 되던 해에 상처하고 서울
의 모화관(慕華館), 수원의 갓등이〔旺林〕 등지에서 혼자 살다가 몇 년 후 친구들의 권고와 부친의 성화에 못 이겨 재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 6~7년 만에 두 번째 아내 와도 사별하고 얼마 후 외동딸마저 잃게 됨으로써 큰 실 의에 빠졌지만 다시 용기를 내어 복음 전파를 위해 노력 할 것을 결심하고, 교리서를 베껴 판 돈으로 생계를 유지 하면서 인천, 수원, 부평 등지를 순회하며 전교하였다. 이때 깊은 교리 지식으로 각지에서 냉담자를 권면하고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한편, 자선 사업과 외교인 들을 위한 전교 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러 한 적극적인 전교 활동 때문에 1836년경 유방제(劉方 濟, 파치피코) 신부에 의해 전교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그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한 뒤,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로부터 수원 양간의 송교(松橋, 현 화성군 서 신면 송교리) 전답의 경작권을 위임받기도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성직자들이 체포됨에 따라 더욱 열심히 전교하였으나 그가 경작하는 전답을 빼앗으 려고 포졸들과 공모한 배교자 오치서의 밀고로 이듬해 1 월 25일(음 1839년 12월 11일) 은신해 있던 서울 근교의 교우 집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두 차례의 심한 고문과 혹 형을 받고 배교를 강요당하였지만 신앙을 굽히지 않았 고, 옥에 갇혀 심한 상처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김절벽 (도미니코), 이사영(고스마) 등을 포함한 많은 배교자들 을 회개시켰다. 이에 일찍 처치해 버리기로 작정한 관원 들에 의해 옥에 갇힌 지 5~6일 만인 1월 30일(음 1839 년 12월 26일) 53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옥중에서 순 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 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기해박해 ; 한국 성인)
※ 참고문헌 《기해일기》/ 《달레 교회사》 中/<가톨릭 시보> 1006 호(1976. 4. 25), 1면/ 김옥희, 《한국 천주교회 103위 성인》 , 계성출 판사, 1986/ 韓鍾五, 〈聖 閔克可의 탄생지와 閔鍾黃의 순교, 閔善勳 의 답동 성당 터 기증설 소고>, 《교회와 역사》 258호(1996. 11), 한국 교회사연구소 Coreana beatificationis seu declarationis martyrii ven. sevorum Dei Laurentii Imbert episcopi capsensis(79위 시복 조사 증거서), Roma, 1921. 〔편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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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극가 閔克可(1787~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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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교리서를 베껴 판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전교한 민극가(탁희성 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