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첸티, 요제프 Mindszenty, Jozsef(1892~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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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바오로 6세를 알현하는 민첸티 추기경.

교황 바오로 6세를 알현하는 민첸티 추기경.

헝가리의 수석 주교. 에스테르곰(Esaergom) 대교구장 추기경. 헝가리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대항해 비타협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던 민첸티 추기경은 양차 세계대전과 그 시기에 교회가 겪은 여러 가지 상황들의 상징이자 증인 이며 주연이었다. 그는 냉전 기간 동안 순교자적인 삶을 보여 주었고, 가톨릭 교회의 반(反)공산주의 입장에서 타협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또한, 로마 교회와 깊은 친교를 이루었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신자들을 조 건 없이 사랑하는 가운데 항상 자신의 사도적 봉사에 크 나큰 사명 의식을 지녔던 목자였다.
1892년 3월 29일 헝가리 체크미드센트(Czehmidszent) 에서 농사짓는 부모에게서 태어나 가난하지만 신앙심 깊 은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항상 부모에게 깊은 사랑 과 감사의 정을 지녔는데, 그의 인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준 어머니를 이렇게 회고하곤 하였다. "어머니께서 무덤 에 누워 계실 때 비로소 나는 그분이 얼마나 귀한 분이 고, 그분 안에서 얼마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은 총을 얻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나의 어머니는 성인이 셨다. 나는 그분과 그분 주위에서 보기 흉한 그 어떤 것 도 본 적이 없다. 아름다운 것들만 보았다. 나는 그분이 영원 속에 행복하게 계실 걸로 확신하고 이 눈물의 골짜 기에서 언젠가 하늘 나라의 기쁨 중에 그분을 다시 법기 를 고대하고 있다."
1903년 솜보텔리(Szombathely)의 프레몽트레(Prémon- tré) 학교에 들어간 민첸티는, 1906년 신학교에 입학하 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6월 12일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헝가리의 작은 마을인 졸로에게르세그
(Zalaegerszeg) 성당에서 보좌 신부로 사목 생활을 시작한 그는, 당시 본당 주임이었던 가이스링거(B. Geislinger) 신 부에 대해 "나는 이 훌륭한 목자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 그분은 나에게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 참 많은 것을 이해 하도록 도와 주었다"라고 회고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전통적인 많은 사회적 · 정치적 관계를 해체시켰다. 민첸 티 신부는 교사, 신문 편집자, 그리고 공동체의 지도자로 서 활동하였다. 1918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제국의 패 전으로 정치적 공백기가 되었을 때 공산주의자들이 폭동 을 일으켜 벨라 쿤(Bela Kun) 혁명 정부가 들어섰다. 신 문 사설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을 비난하였다고 하 여 그의 고향 체크미드센트의 생가(生家)에서 벨라 쿤 정권이 붕괴할 때까지 159일 동안 연금 생활을 한 민첸 티 신부는, 1919년 10월 1일 줄로에게르세그의 본당 신 부가 되었다.
주교로서의 활동 : 1944년 3월 25일 민첸티는 헝가리 의 수좌 주교인 세레디(Seredi) 추기경에 의해 베스프렘 (Veszprem)의 교구장으로 축성되었고, 주교로 서품된 나 흘 뒤 독일 나치 군대가 점령하고 있던 자신의 교구에 착 좌하였다. 그런데 당시 정부가 유대인에게 박해를 가하 자 헝가리 주교들은 인권 침해라며 강력하게 반대하였 고, 헝가리 정부는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1944년 10 월에 휴전을 고려하게 되었다. 독일은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헝가리에 괴뢰 정권을 세웠다. 이에 민첸티 주교는 괴뢰 정부의 사퇴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서부 헝가리의 모든 주교들과 함께 서명하여 새 수상 살로시(F. Szálasi) 에게 제출하였다. 이 때문에 살로시 정권에 의해 체포된 민첸티 주교는 1945년 4월 헝가리로부터 독일 군대가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것이 그가 겪은 두 번째 투옥이었다. 1945년 봄, 자유의 몸이 된 그는 베스프렘으로 돌아왔고, 그 해 9월 교황 비오 12세 에 의해 에스테르곰 대교구장으로 임명되어 헝가리의 수 석 주교가 되었다. 1946년 2월에는 로마에서 추기경으 로 서임되었다.
추기경으로서의 활동 : 부다페스트(Budapest)와 헝가 리 교회에서 자유롭게 사목 활동을 수행하던 민첸티 추 기경은 전쟁으로 인해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돕는 자선 사업과 헝가리 국민의 복음화를 위한 체계적인 교 리 교육을 실시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신학교와 교회 학문 연구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였고, 영적 수련과 장엄 한 전례 거행을 장려하였으며, 성지 순례와 신심 행사들 을 마련하였다. 그가 주력한 자선 사업과 국민들의 그에 대한 신망은 스탈린 시대에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옛 소련의 통제를 받고 있던 헝가리 정부는 교회 재산을 압 류하였고, 교회 학교들을 빼앗아 국유화하였으며, 출판 물의 자유를 제한하였다. 민첸티 추기경은 이에 강력히 항의하였지만, 정부는 오히려 그를 반역죄와 국가 전복 죄로 고발하였다. 결국 1949년 12월 26일 체포되어 극 도의 심문과 고문을 당하였고, 1950년 2월 8일에 끝난 공개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 재판에서 그는 명예 훼손을 당하는 등 육체적 · 정신적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다.
민첸티 추기경은 1956년 10월 30일 공산주의 정권에 대항하는 헝가리 국민들의 반정부 시위가 발생할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때 풀려 난 민첸티 추기경은 국민 들을 진정시키면서 범죄나 복수로 자신을 더럽히지 말고 나라의 내적 평화를 재건하자고 촉구하였다. 그 해 11월 3일의 라디오 연설에서는 자유를 위한 싸움으로서의 봉 기는 정당하다고 말하면서, 중립 상태에서 국제 연합의 감독과 개인과 종교의 자유하에 민주적인 선거를 실시하 자고 주장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어느 특정 정당을 지지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연설이 있은 지 8시간 후 소련은 부다페스트를 점령하고 헝가리 민중의 봉기를 짓밟았다. 헝가리의 민중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자 다음 날인 11월 4일 부다페스트 주재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 하여 이후 15년 동안 대사관 내의 보호 시설에서 헝가리 정부에 대항하는 살아 있는 상징이자 정신으로서, 국민 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헝가리에서의 탈출 : 교황청은 자신의 피신처와 고국 을 결코 떠나지 않으려는 민첸티 추기경의 결심을 존중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연장됨에 따라 추기경 개 인보다는 그의 사명에 대한 몇 가지 문제들이 점차 대두 되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민첸티 추기경이 오랜 세월을 격리 상태에서 생활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근심스 럽게 관찰하였다. 비록 끗끗하고 평온히 대처하고 있지 만 그토록 많은 고통을 당하고 이제는 노년에 이른 그에 게는 무거운 희생이었던 것이다. 교황은 또한 그가 늙어 감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병에 걸리게 될 개연성이 높아지 고 그렇게 되면 외국 대사관에서는 제공받을 수 없는 의 료 조치가 필요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깊이 염려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이러한 상황 지속이 이제는 불가능하다 고 본 교황은, 고국을 떠나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고통스 러운 희생인지를 알면서도 해결책을 제안하였고, 추기경 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민첸티 추기경은 개인적으로는 비록 오랜 세월 감옥이 나 외국 대사관에 격리되어 있으면서도 결코 떠나지 않 았던 자기 백성들 가운데에서 계속 살아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교황으로부터 제안을 받고 나서는 깊이 숙고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주교이자 추기경 으로서 제 양심에 따라 깊이 생각한 끝에 저는 교회에 대 한 무한한 사랑의 증거로서도 미국 대사관을 떠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저는 저를 기다리는 외부 상황에 개의 치 않고 헝가리에서 제가 그토록 사랑하는 저의 백성들 가운데서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 의 보다 높은 배려 때문에 불가능하다면, 저는 제 생애에 서 가장 무거운 십자가가 될 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저 는 저의 사랑하는 조국에 작별 인사를 하고 망명지에서 기도와 보속의 생활을 계속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 는 한 사람이 요청받은 아무리 커다란 희생이라도 하느 님께 그리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바치는 것이라면 미미 한 것일 뿐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저의 이 희생을 겸손되
이 성하의 발 아래 놓아 드립니다."
이 글은 그의 행동의 의미를 생생히 드러내 주고 승고 함마저 보여 준다. 민첸티 추기경의 헝가리 출국을 위해 헝가리와 교황청 사이에 교환된 문서에 따르면, 추기경 은 헝가리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고, 자신의 예(例)와 헝 가리인들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일을 발표하는 것에 대해 서는 미결인 상태로 두었다.
1971년 9월 28일 헝가리를 떠난 민첸티 추기경은 같 은 날 오후 4시경 교황청에 도착하여 교황 바오로 6세를 알현하였다. 그리고 교황은 9월 30일 시스티나 경당에 서 거행된 제2차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 개막 미사에 추 기경을 자기 옆 자리의 공동 집전자로 존대하여 함께 미 사를 봉헌하였다. 이어 민첸티 추기경은 10월 3일 교황 을 개인 알현한 후 자신의 국민들과 가능한 한 가까이 있 기 위하여 오스트리아 빈(Wien)에 있는 헝가리 신학교를 자신의 거처로 택하였다. 에스테르곰 대교구의 사목 문 제들을 고려하여 추기경과 서신을 통해 폭 넓은 의견을 나눈 교황 바오로 6세는, 1974년 2월 5일 추기경의 대 교구장직 사표를 수리하고, 레커이(L. Lekai) 주교를 교 구장 서리(apostolic administrator)로 임명하였다.
1974년에 그 자신의 《회고록》(Memory)을 출판한 민 첸티 추기경은 1975년 5월 6일 자비의 형제회(Frères de la Miséricorde) 병원에서 심장 수술을 받은 지 4시간 만에 숨을 거두었다. (→ 마르크스주의 ; 헝가리)
※ 참고문헌  L'Osservatore Romano, Weekly Edition in English, May 22, 1975/ 《EB》 8, 15th ed., 1986/ 《CE》 7, pp. 184~185/T.F.X. O'Donnel, 《CE》 The Contemporary Church, pp. 160~161/ R.J. Gibbons, 《NCE》 17, pp. 410~411/G. Zananiri, 《Cath》 9, pp. 172~175. 〔韓弘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