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관용령 - 寬容令 〔라〕Edictum Milanensie 〔영〕Edict of Mi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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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관용령을 공포한 콘스탄틴 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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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관용령을 공포한 콘스탄틴 대제.

로마 제국 내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다 는 포고(布告)의 형식으로 발표된 령(令). 일반적으로 1891년까지는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us I , 306~337)와 리치니우스(Licimius, 308~324)가 '밀라노 칙령' 을 공포하 였다는 것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였지만, 금세기에 와서는 여러 이론(異論)들이 제기되면서 이 협정의 법적 인 성격에 대한 많은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즉 칙령의 형 태로 밀라노에서 공포되었는지, 아니면 교서나 다른 형 태의 문서인지, 또는 단순히 서로 합의한 내용을 발표한 것인지, 그리고 단지 리치니우스 혼자 공포한 것인지에 대한 여러 가지 주장들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락탄시오 의 《박해자들의 최후》(48)와 에우세비오의 《교회사》(Ⅸ 9, 12, 13 ; X 5, 15 ; X 6) 그리고 동시대의 기타 자료들 에 의하면, 312년 콘스탄틴 대제가 막센티우스(Maxen- tius)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 해 말경 여전히 박해가 계속되고 있던 동방 지역의 막시미누스 다야(Maximinus
Daja, 305~313)와 리치니우스에게 서한을 보내 그리스도 인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고 박해를 중지하라고 명령 하는 한편, 자신의 통치 지역 성직자들에게는 지방세를 면제해 주는 등 이미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의적인 여러 가지 법적 조치들을 취하였다.
313년 2월 리치니우스가 콘스탄틴 대제의 누이와 결 혼하기 위하여 밀라노에 왔을 때 제국의 여러 가지 문제 에 대하여 논의하는 과정에서 종교 정책, 특히 그리스도 인들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는데, 락탄시오나 에우세비오 의 저술에 의하면 리치니우스가 후에 칙령이 아닌 두 황 제의 이름으로 밀라노에서 합의한 내용의 편지나 교서를 휘하의 지방 장관들에게 보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 서 보통 서양사에서는 '밀라노 칙령' 이라고 표현하지만 그 내용과 형식으로 보아 법적인 요건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칙령이라기보다는 밀라노 협정' 이라고 할 수 있 을 것이다.
〔배 경〕 305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84~ 305) 황제와 그의 공동 통치자가 황제직에서 물러난 후, 콘스탄시우스 1세(Constantius I , 305~306)와 갈레리우스 (Galerius, 305~311)가 황제직에 오르는 한편, 세베루스 (Severus)와 갈레리우스의 조카인 막시미누스 다야가 부 황제(副皇帝)가 되었으나 박해는 계속되었다. 동방의 갈 레리우스 황제는 자신과 어머니의 광신적인 종교관의 영 향으로 시종일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였지만, 판노니아 와 노리치움 지방에서 황제가 된 리치니우스는 갈레리우 스 황제보다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적대감이 적었다. 갈 레리우스 황제는 말년에 혹독한 질병을 앓으면서 이 질 병이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신의 징벌이 아닌가 하는 두
려움을 느끼고 심경에 변화를 일으켰다. 그래서 다른 두 공동 통치자(리치니우스와 콘스탄틴 대제)와 함께 311년 3 월에 사르디카(Sardica)에서 신앙 허용령을 발표하였다 (《박해자들의 최후》, 34 ; 《교회사》 VⅢ, 17). 그리스도인들이 황제와 로마 제국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고 권고한 이 칙령에는, 제한적인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 교 신앙 생활이 적어도 법적으로는 자유롭게 허용되면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대박해가 수그러지는 계기가 되었 다. 막시미누스 다야는 자신의 통치 지역에서는 이 칙령 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하였으나 그의 세력은 곧 꺾 이고 말았다.
한편 서방에서는 일신교적인 아폴로 신을 섬겼던 콘스 탄시우스 1세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완화하였 는데, 그가 사망하자 군부(軍部)는 306년 7월에 그의 아 들 콘스탄틴 대제를 황제(Augustus)로 추대하였다. 갈리 아에서 아버지의 관대한 종교 정책을 계속 실시하였던 콘스탄틴 대제는 312년에,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막센 티우스와의 결전을 하게 되었는데, 결전을 앞두고 기적 적인 십자가 발현을 체험한 후부터는 그리스도교에 관심 을 갖게 되었다. 그는 자신과 군대를 그리스도인들의 하 느님과 "이 표징으로 너는 승리자가 되리라"(Hoc signo victor eris)는 '구원의 표징' (☧)의 보호 아래 치른 로마시 근처의 밀비오(Milvio) 다리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막센 티우스는 312년 10월 28일 사망하였다.
〔내 용〕 원문은 남아 있진 않지만 에우세비오(《교회사》 X , 5)와 락탄시오(《박해자들의 최후》, 48)의 저서에 의하 면, 리치니우스가 그의 휘하에 있는 지방 장관들에게 두 황제의 이름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편 지를 보냈다고 하는데, 락탄시오의 자료에 의하면 밀라 노 관용령의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제인 콘스탄틴과 리치니우스 본인은 제국의 이익 과 안전에 관계된 모든 사안을 논의하기 위하여 밀라노 에서 기꺼이 회동하였다. ···어떤 신이든지 하늘에 있는 신이 우리와 우리의 모든 신민들에게 평화와 번영을 아 끼지 않도록 결정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든지 다른 신자이든지 우리 신민들이 원하는 종교를 실천할 자유를 거부하지 않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제도라는 것을 믿는 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각자가 자유롭게 숭배하는 최 고신(最高神)이 보호와 자비를 베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서한의 수신인으로서 판사인) 그대는 그리스도인들 에 관한 제약들이 삭제되도록 우리가 결정하였음을 알아 야 한다. ··· 역시 그리스도교를 따르는 모든 이들이 다른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자유롭게 실천할 수 있 도록 결정하였음을 알기 바란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에 게 그들의 신앙을 실천하는 데 보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자유를 허용한 사실을 무시하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안 전 조치에 유의하기를 원한다.
그 외에도 그리스도인들에 관하여 이미 그곳에 전달된 서류에 언급된 대로 만일 처음에 집회 장소로 사용하였 거나 이미 그들 소유로 되었다가 국고로 귀속되었거나 다른 사람의 사유 재산으로 전환되었다면 아무런 대금이
나 보상 없이 그리스도인 개인에게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들의 단체 곧 교회에 즉시 반환하도록 명령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 장소들을 선물로 받은 자들은 우선적으로 그 리스도인들에게 반환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도처 에서 그 편지를 읽고 우리의 자비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도 무시되지 않기 위하여 이 편지가 각처에 공포되도록 그대의 주의를 요구한다."
이러한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부분은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을 막론하고 로마 제국의 모든 신민들에게 적용되는 종교 자유의 원칙을 선포한 것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인' 들을 지칭하여 부각 (ut daremus et christianis et omnibus liberam potestatem sequendi religionem···)시킨 것이 특기할 만하다. 가장 중요한 내용 은 311년의 갈레리우스 칙령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종교 자유의 원칙이다. 물론 313년의 밀라노 관용령은 로마 제국과 '조상들의 종교 와의 결별을 선언한 것은 아니다. 다만 각자가 믿는 종교를 따를 수 있는 신앙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이며, 그리스도교도 로마 제국의 원로원에서 승인한 기존의 종교와 동등한 법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부분에서 간과할 수 없는 내용은 '그리스도인들' 만을 지칭하여 박해 시대에 몰수 된 그리스도인들의 재산이나 이미 팔린 재산까지도 그리 스도교에 아무 조건 없이 반환하도록 명시한 것이다. 이 로 인해 그리스도교는 합법적으로 재산을 취득할 수 있 는 공인된 단체로 인정을 받았고 이미 몰수된 부동산에 대한 재산 반환 청구권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이는 역 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ius corporis christia- norum id est ecclesiarum).
밀라노 관용령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받아들인다거 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특권을 베풀겠다는 것이 아니
라 신앙의 자유가 인정된 다른 여러 종교와 마찬가지로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때부터는 로마 제 국의 국교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박해 정책이 부정되고 단죄되었다. 즉 311년 갈레리우스의 관용령에 비하여 로마 제국의 종교 정책이 대전환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 다. 갈레리우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하여 조상들의 종교를 포기한 자들을 비난하고 저주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박해를 중지시켰지만, 밀라노 관용령은 그 리스도교를 박해한 선임 황제들의 모든 박해 정책을 부 정하였다.
〔의 의〕 밀라노 관용령의 결과로 콘스탄틴 대제가 교 회를 변화시킨 주인공이 아니라 교회가 그리스도교 정신 으로 로마 제국을 새로운 사회로 변모시키면서 새로운 문명을 창출하는 주역이 되었다. 이 밀라노 관용령을 계 기로 그리스도교가 제도화되고 제국 교회(帝國敎會)로 전락하면서 복음 정신으로부터 멀어져 가기 시작하였다 는 부정적인 비판도 있지만, 교회는 선교 사명의 본성상 사회로부터 소외된 격리 단체나 항구적인 불만 세력의 지하 운동 단체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이 로마 제국의 모든 지역에 더욱 활발하게 선포되 어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다방면에 그리스도교 정 신을 확산시키는 첫걸음이 되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적 지 않다. (→ 콘스탄틴 대제 ; 교회와 국가)
※ 참고문헌  아우구스트 프란춘 , 최석우 역, 《敎會史》, 분도출판 사, 1982/ 지동식 편역, 《로마 제국과 기독교》, 한국신학연구소, 1980/ P. Eusebius, Historia Ecclesiastica, 《CPG》, pp. 3456~3507(Storia Eccle- siastica, 《PG》, trad. it., Roma, 1964, pp. 19~24)/F. Lactantius, De Mortibus Persecutorum, 《CPL》, pp. 85~92(La Morte dei persecutori, 《PL》, trad. it., Ed. Paoline, 1965, pp. 6~7)/P. Battifol, La Paix constantienne et le catholic- isme, Paris, 1929/ K. Bihlmeyer · H. Tuchle, Church History I , Newman Press, 1958/ P. Rezzi, Fonti e Studi di Storia della Chiesa 1, Milano, 1962/ J. Danielou, Christian Centuries I , London, 1964/ L. Duchesne, The Early History ofthe Christian Church I , London, 1912/ A. Fliche · V. Martin ed., Storia della Chiesa Ⅲ-1, Torino, 1972/ E. Gibbon, The Decline & Fall of Roman Empire I , The Modern Library, New York/ H. Jedin ed., Hamdbook of Church History I, Herder, 1965/ H. Mattingly, Christianity in the Roman Empire, New York, 1967/ V. Monachino, Il Christianesimo da Costantino a Teodosio, Roma, 1974/ J.H. Smith, Constantine the Great, New York, 1971/ 一, The Death of Classical Pagamism, London, 1976/ M. Sordi, Il Christianesimo e Roma, Bologna, 1965. 〔金喜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