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삼 (1866~1903)

姜聖參

글자 크기
1
강성삼 신부.
1 / 3

강성삼 신부.

조선교구 신부. 세례명은 라우렌시오.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태어났다. 충청도 내포(內浦)에 살았던 외조부(外祖父) 신베드로는 의술(醫術)이 뛰어났으며 홍주에 살던 친구 손 베드로에게서 문교(聞敎)하여 영세한 후 각처로 다니며 전교하다가 병인(丙寅)박해 때 홍주읍 포졸들에게 잡혀 해미(海美)에서 85세로 치명하였으며, 외숙인 신 아우구스티노도 23세 때 해미에서 순교하였다.
1881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나가사끼(長崎)에서 코스트(Coste, 高宜善) 신부의 지도로 1년 간 예비 신학 교육을 받고 1882년 말레이 반도의 페낭 신학교에 유학하여 공부하던 중 1890년에 귀국, 새로 설립된 용산(龍山) 예수성심신학교에서 남은 학업을 마친 뒤 1896년 4월 26일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주례로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정규하(鄭圭夏,레오)와 함께 국내에서는 최초로 약현(藥峴, 현 中林洞)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 날의 사제 서품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은 때(1845)로부터 50년, 두번째 사제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은 때(1849)로부터는 46년 만이었다. 당시는 한국인 신부가 한 사람도 없었기에 매우 감격적이었다.
사제 서품을 받기 1년 전 부제(副祭) 때 사목 실습차 부산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1895년 5월 21일 부산에 도착, 초량(草梁)의 우도(Oudot, 吳保祿) 신부에게서 열흘 간 머물렀다가 절영도(絶影島, 속칭 조내기)로 파견되었다. 해풍(海風)이 거세게 부는 기후 때문에 절영도에 도착하자마자 심한 두통을 앓았고, 특히 겨울철을 지내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다른 지방으로 가기를 원했지만 임지는 바뀌지 않았다. 그 후 사제서품을 받고 정식으로 절영도에 부임, 절영도와 8개 공소의 364명 신자를 돌보았다. 1897년 임지 변경 문제로 우도 신부와 상의하여 후보지로 거론된 밀양, 명례, 읍실 중에 명례(慶南 密陽郡 下南面 明禮理)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그해 9월 명례에 3칸짜리 집 한 채를 120냥에 매입하였으나 매수자가 집을 비우지 않아 이듬해 1월에야 명례로 옮길 수 있었다. 밀양, 청주(현 晉陽), 양산(梁山), 언양(彥陽) 등 14개 공소, 500여 명의 교우를 대상으로 6년 동안 사목하였다.
1899년 3월 자인에 사는 교우 정 씨가 어떤 일 때문에 대구의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에게 부탁하여 밀양 군수에게 편지를 보내도록 하였다. 그런데 편지를 받은 밀양 군수는 몹시 자존심이 상해 정 씨를 옥에 가두었다. 이에 강성삼 신부는 군수에게 편지를 보내, 정 씨가 무죄이므로 즉시 석방되어야 한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군수는 강 신부의 청을 묵살했고, 면담 요청도 거절했으며 강 신부와 다른 천주교인마저 감옥에 가두겠다고 위협했다. 강 신부는 밀양에서는 군수의 천주교에 대한 편견 때문에 사건이 공정하게 처리될 수 없으므로 서울에 가서 재판을 열자고 군수에게 제의하였다. 그러자 군수는 겁을 먹고 정 씨를 석방하는 한편 강 신부에게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주기를 청하였다. 1900년 초 강성삼 신부는 병 때문에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며, 이듬해 여름에도 크게 앓아 공소 순방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본래 병약했고, 한적한 산촌인 명례로 임지가 정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1903년 9월 19일 37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강성삼 신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단지 절영도와 명례에서 남긴 13통의 서한이 있을 뿐이다. (→ 밀양 본당 ; 페낭 신학교)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서울대교구 교구 총람》. 〔尹善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