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교구 소속 본당. 경남 밀양시 교동 911-7 소재. 1926년 5월 30 일에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사도 성 바오로. 1898년 1월경 하남(下南) 의 명례리(明禮里, 현 마산교구 지역) 에서 임시 본당으로 설립된 후 공소 가 되었다가 1926년에 본당으로 승 격되었고, 1930년에는 삼랑진(三浪 津邑 松旨里)으로, 그리고 1940년 에는 현재의 밀양으로 성당을 이전 하였다. 관할 구역은 밀양시와 밀양 군의 단장면, 무안면, 부북면, 산남 면, 산내면, 산외면, 삼랑진읍 일부 지역. 공소는 송백, 무안 2개소. 〔교
세〕 1957년 1,720명, 1962년 2,821명, 1967년 3,200 명, 1974년 2,973명, 1980년 3013명, 1987년 3,544 명, 1991년 4,017명, 1995년 4,287명. 〔역대 신부〕 초 대 권영조(權永兆) 마르코(1926. 5~1930. 12), 2대 민정호 (閔正鎬) 마르코(1930. 12~1931. 5), 3대 파르트네(Par- thenay, 朴德老) 데오필로(1931. 5~1935. 6), 4대 페네 (Peynet, 裴嘉祿) 가롤로(1935. 6~1938. 6), 5대 유흥모(柳 興模) 안드레아(1938. 6~1943. 2), 6대 김준필(金俊弼) 아 우구스티노(1943. 2~1945.9 7대 김영호(金永浩) 멜키올 (1945. 9~1947), 8대 전석재(全碩在) 이냐시오(1947~1948. 6), 9대 유선이(柳善伊) 요셉(1948. 6~1951. 4), 10대 김 영제(金永濟) 요한(1951. 4~1955. 5) 11대 정수길(鄭水 吉) 요셉(1955. 5~1957. 7), 12대 김태호(金泰浩) 알로이 시오(1957. 7~1959. 10), 13대 함영상(咸英相) 비오(1959. 10~1962. 8), 14대 백응복(白應福) 스테파노(1962. 8~ 1968. 2), 15대 손덕만(孫德萬) 토마스(1968. 2~1973. 11) 16대 김창문(金昌文) 요셉(1973. 11~1975. 5), 17대 배상 섭(裴尙燮) 요한(1975. 5~1980. 2), 18대 정인식(鄭仁植) 알베르토(1980. 2~1983. 2), 19대 장병진(張昞晉) 야고보 ( 1983. 2~1985. 2), 20대 김태호(1985. 2~1987. 2), 21대 이 동한(李東翰) 토마스 데 아퀴노(1987. 2~1990. 1), 22대 이석희(李奭熙) 라우렌시오(1990. 2~1991. 1), 23대 김용 환(金容煥) 요한(1991.2~현재)
〔전 사〕 밀양 지역에 언제 복음이 전파되었는지는 확 실하지 않으나, 일설에 의하면 1785년 을사 추조 적발 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인해 김범우(金範禹, 토마 스)가 밀양의 단장(丹場, 즉 단장면 법귀리)으로 유배된 뒤 배소(配所) 인근에 복음을 전함으로써 천주교 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범우의 유배지 가 단장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가 과연 전교 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기록상으로 는 두 번째 한국인 성직자인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 부가 1850년대에 경상남도 지역을 순방하였고, 이후 울 주 · 양산 · 기장 · 동래 등지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나타나므로 밀양 지역에도 이 무렵에서야 복음이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양업 신부의 뒤를 이어 이 지역을 순방한 선교사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 교와 리델(Ridel, 李福明) 신부였는데, 1866년 병인박해 (丙寅迫害) 이전에 밀양 지역에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 음이 확실하다. 병인박해 때에는 신순균(申順均, 바오 로) 신부의 조부인 명례리의 신(申) 마르코와 백산리(栢 山里)의 오(吳) 야고보 등이 순교하였다.
밀양 지역에 교우촌이 재건된 것은 박해가 끝난 뒤였 다. 당시 경상도 지역을 전담하고 있던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는 1883년에 처음으로 밀양 지역의 교우촌 을 순방하고는 양촌(初同面 德山里)과 정승골(丹場面 九川 里)을, 이어 다음해에는 붉은 독이(三浪津邑 杏谷里)를 공 소로 설정하였다. 당시 공소 신자수는 각각 20~30명 내외에 불과하였으며, 이후 신자들의 이주로 점차 교세 가 감소하였다. 그러다가 1888년 명례 공소가 설정되었 으며, 1892년 부산(정식 명칭은 초량) 본당의 조조(Jozeau,
趙得夏) 신부가 읍실(현 밀양군 삼랑진읍 牛谷里)에 공소를 설립하면서 이 두 곳이 밀양 지역의 신앙 중심지가 되었 다.
〔명례 본당의 설립〕 1893년부터 부산 본당 2대 주임 우도(Oudot, 吳保祿) 신부는 밀양 지역의 공소들을 방문 하였으며, 1898년 1월경 강성삼(姜聖參, 라우렌시오) 신부가 명례에 부임함으로써 명례 임시 본당이 되었다. 당시 본당 신자수는 밀양 지역을 비롯하여 언양 · 경주· 기장 · 양산 · 김해 등 15개 공소에 547명이었고, 그중 명례에는 78명의 신자가 있었다. 본래 강성삼 신부는 1896년 4월 26일 사제로 서품된 후 이듬해 6월 우도 신 부의 보좌로 절영도(絶影島)에 파견되었지만, 병약하였 던 탓에 절영도 체류가 힘들었으므로 우도 신부에게 임 지 변경을 요청하여 휴양차 명례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그의 부임 이전에 임시 본당의 후보지로 밀양읍, 명례, 읍실 공소 세 곳이 제기되었으나, 이미 명례 신자들이 성 당으로 사용할 수 있는 세 칸짜리 사가(私家)를 마련해 놓았기 때문에 이곳이 본당으로 선정되었다. 명례에 도 착한 강성삼 신부는 네 칸짜리 집을 새로 건립할 계획을 세우는 한편, 관할 지역 공소 순방에 나서 새 공소들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건강 때문에 관할 지역은 밀양 · 김 해 · 창원으로 점차 축소되었고, 1903년 9월 19일 그가 사망함으로써 명례 임시 본당과 밀양 지역의 공소들은 모두 마산(현 완월동) 본당 관할 공소로 격하되었다.
명례 본당이 정식 본당으로 승격된 것은 1911년 대구 대목구가 설정된 뒤였다. 즉 공소로 격하된 지 23년 만 인 1926년 5월 30일, 새로 사제 서품을 받은 권영조 신 부가 명례에 부임함으로써 본당으로 부활하게 된 것이 다. 1928년 8월 30일 한옥으로 된 성당을 건립한 권영 조 신부는, 이듬해 부인회를 창립하는 등 본당 발전에 많 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명례는 교통이 매우 불편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지역을 물색하여 본당을 이전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
〔삼랑진으로의 이전〕 권영조 신부는 이때 신자수가 많 은 삼랑진으로 본당을 이전하기로 결정하고, 1929년 5 월 22일 우곡리에 대지 1,000여 평을 매입하여 성당 및 사제관, 청년 회관 등의 부속 건물 공사에 착공하였다. 1930년 1월 1일 우곡리에 정착한 후 밀양 지역은 물론 김해 · 양산 일대까지 관할하던 그는 그 해 12월 전북의 연장리(延章里) 한들 본당(1985년 1월 25일 폐쇄)으로 전 임되었다. 그리고 민정호 신부가 2대 주임으로 활동하다 가 이듬해 4월 전주(현 전동) 본당의 보좌 신부로 전임되 면서 파르트네 신부가 3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는데, 그는 본당에 부임한 뒤 전교에 노력하여 1932년 봄 진영(進 永) 공소에 강당을 신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1935년에는 삼랑진 역 앞 송지리(松旨里, 현 삼랑진 본당 소재지)에 부 지를 매입하고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파 르트네 신부는 같은 해 11월 3일 성당을 완공하자마자 병으로 인해 본당을 페네 신부에게 인계하여야만 했고, 송지리로 부임한 페네 신부 역시 약 3년 간 활동하다가 연로하여 마산포 본당으로 휴양을 떠났다. 한편 명례 공
소는 1935년에 신설된 진영(進永) 본당 관할로 편입되 었고, 현재 하남읍 지역은 마산교구 수산 본당 관할로 되 어 있다.
〔밀양으로의 이전과 변모〕 페네 신부에 이어 1938년 6월 5대 주임으로 부임한 유흥모 신부는 1930년대 말, 교구로부터 본당을 밀양읍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로써 본당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는데, 당시 밀양읍에 는 상당수의 신자가 있었고 예비자도 134명에 달하였 다. 유흥모 신부는 1939년경 밀양읍 내이동 721번지에 대지 700여 평을 매입하여 성당 및 사제관을 신축하고, 이듬해 성당을 완공하여 6월 29일 본당을 이곳으로 이 전하였다. 이처럼 밀양 본당은 명례에서 삼랑진으로, 그 리고 다시 밀양으로 이전됨으로써 현재의 본당으로 성장 하게 되었다. 한편 송지리에 있던 삼랑진 본당은 곧바로 공소로 격하되었고, 그 후 1957년 3월 유선이 신부가 부임하면서 1957년 삼랑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밀양 본당의 교세는 1951년 김영제 신부가 10대 주임 으로 부임하면서 급속히 증가하였는데, 이것은 성모 성 심원(聖母聖心院, 1957년 9월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에 합병 됨)의 적극적인 전교 활동의 결과였다. 성모 성심원은 본 래 김영제 신부가 진주 문산(文山) 본당에 재임 중이던 1937년에 설립한 동정녀 단체로, 1951년에 본원을 밀
양 본당으로 옮기고 1954년 10월 4일에는 성모 성심 병 원을 개원하였다. 그러나 당시 성당은 밀양읍의 외곽 지 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교통도 불편하였고 사목상 어려운 점도 많았다. 이에 14대 주임 백응복 신부는 새 성당 부지로 밀양읍 내일동 174-2번지 546평을 매입한 뒤 옛 성당 터를 매각하고, 1964년 성당과 사제관, 수녀 원, 성모 성심 유치원(1953년 개원) 건물 신축 공사에 들 어가 1965년 2월 21일 새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21대 주임 이동한 신부는 1987년에 성당, 사제관, 수 녀원을 전면 보수하였고, 예비 신자 권면에도 주력하여 272명을 입교시켰으며, 레지오 마리애를 통한 전교 활 동이 성과를 거두면서 신자수가 꾸준히 증가하였다. 그 결과 성당은 또다시 협소해졌을 뿐만 아니라 밀양 시장 내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혼잡한 외부 분위기로 이전 이 불가피하였다. 이에 1990년에 현 본당 소재지 6,106 평의 부지를 매입하고, 1994년 4월 15일부터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한편 공사비 마련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도 신자들을 위로하고 아울러 본당 공동체와 지 역 주민들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1996년 10월 24일 부터 나흘간 '밀양 가톨릭 축제' 를 개최하였는데, 이 행 사는 각종 전시회와 건축 강좌, 밀양 사학자 초청 강연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과 함께 지역 문화 예술 단체의 공연
이 어우러진 종합 문화 예술 축제였다. 공사 시작 3년 반 만인 1997년 10월에 500평 규모의 성당이 교육관(180 평), 사제관 · 수녀원(158평) 등의 부속 시설과 함께 완공 되었다. 아울러 본당에서는 1965년 강요안(姜要安, 요 한) 신부를 배출한 이래, 1973년에 김창대(金昌大, 임마 누엘), 1976년에 황태웅(黃泰雄, 요셉), 1983년에 황철 수(黃哲洙, 바오로), 1989년에 박재구(朴宰求, 시몬) , 임영민(林迎民, 안드레아) 신부 등이 탄생함으로써 꾸준 히 성소가 이어져 오고 있다. (⇦ 명례 본당 ; → 부산교 구 ; 삼랑진 본당)
※ 참고문헌 김구정, 《천주교 경남 발전사》, 부산교구 주교관, 1967/ 부산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教區年 報》, 천주교 부산교구, 1984/ 대구대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大邱本 堂 百年史(1886~1986)》, 계산 본당 창립 100주년 기념 행사위원회, 1986/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드망즈 주교 일기》, 가톨릭신문사, 1987/ 천주교 명동 교회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 기》 I ~Ⅲ, 천주교 명동 교회, 1986~1993/ 마백락, 《경상도 교회와 순 교자들》, 대건출판사, 1989/ 부산교구사 편찬위원회 · 한국교회사 연구소 편, 《教區三十年史》, 천주교 부산교구, 1990/ 호남교회사연 구소, 《전주교구사 연표》, 빅벨출판사, 1993. 〔金成喜〕
밀양 본당
密陽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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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8월 30일의 명례 본당 축성식(왼쪽)과 삼랑진으로 옮긴 후 1935년 11월 3일 낙성한 밀양 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