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초기 전통을 보존하고 있으나 후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 초기 그리스도교 작품. 초기 교회의 상징주의와 성서 인용의 형태들은 이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이 작품은 4세기 그리스어로 쓴 성서 사본인 '시나이 사본' (Codex Sinaiticus)에 수록되어 있었다.
〔저자와 집필 장〕 130~140년 사이에 쓰여졌다고 알려진 《바르나바 편지》의 저자와 집필 장소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
오리제네스, 에우세비오, 예로니모 등은 이 작품의 저자를 사도 바오로의 동료였던 바르나바라고 하였다. 그러나 구약성서를 경시하고 반대하면서 마귀의 사기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점,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전제로 하여 쓴 점 등으로 보아 바르나바가 저자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구약성서를 우의적 · 상징적 · 신비적으로 해석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보아 알렉산드리아 출신이거나 그곳에서 공부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이런 이유로 이 작품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쓰여진 것 같다.
〔구성과 내용〕 모두 21장으로 되어 있는 《바르나바 편지》는 발신인과 수신인이 명시되어 있지 않고, 인사말과 맺음말도 없다. 초대 신자들에게 있어서 서간체가 신심 내용을 기술하는 유일한 문학 유형이었기 때문에, 이 작품 역시 '편지' 라는 외적 형식으로 작성하였을 것이다. 1장 서론과 21장 결론을 제외하면 내용과 길이가 서로 상이한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제1부(2~17장)는 정통랍비적 유대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며, 제2부(18~20장)는 두 가지 길에 관한 도덕적 · 교훈적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윤리 실천의 권고 내용을 담은 제2부는 《디다케》(Didache)의 첫 부분과 공통된 삶과 죽음의 길에 대해 서술되어 있다. 삶의 길은 빛의 생활로 십계명을 지키고 선행을 실천할 때 열매로 주어지며, 죽음의 길은 어두움과 암흑의 길로 온갖 악습과 죄악의 생활이다. 그런데 《디다케》와 공통된 내용을 지니고 있다 하여 자의적(字意的) 종속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표현상의 차이가 현저하고, 문맥과 시대상으로 보아 상호 종속적이기보다는 이 둘이 함께 종속된 제3의 원천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제1부에서 저자는 유대인이 해석하는 구약성서의 문자적 해석을 악한 천사의 미혹에 의해 야기된 그릇된 견해(9, 4)라고 반박하면서, 주님의 영이 예언한(9, 2) 구약성서를 영적, 즉 우의(寓意, allegor)적이면서 동시에 예형론적으로 해석하였다.
우의적 해석 : 개별적인 우의적 해석 전에 저자는 하느님은 유대인의 율법 해석을 부인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이사야서 1장 11-13절에 보면 하느님은 어떤 번제 도 원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새 율법이 인간에 의해 준비된 희생 제물의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이 번제를 없애셨으며(2, 5-6), 하느님을 위한 참다 운 희생 제물은 죄를 뉘우치는 마음임을 강조한다(2, 10). 마찬가지로 이사야서 58장 6-10절에서는 하느님은 유대인의 영적인 이해가 없는 어떤 단식도 원하지 않 는다. 따라서 저자는 올바른 단식이 육체적인 금식보다는 이웃 사랑과 선행에 관계가 있음을 증명한다(3, 3-5). 또한 그는 독자들에게 구약이 유대인과 그리스도교인 모두에게 속한다는 신념을 경고한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그들의 우상 숭배로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내려오면서 계약판을 부수었을 때 이미 하느님과의 계약이 깨졌기 때문에, 구약은 결코 그들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4, 6-9. 14). 따라서 저자에게 있어서 구약의 유일한 상속자는 그리스도인뿐이다. 구약에 대한 이와 같은 비문자적 이해로 인해 저자는 외견상 마르치온(Marcion, ?~160?)이나 그리스도교 그노시스주의자들의 선구자인 것처럼 간주될 가능성도 엿보인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해석의 전제로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구약이 영에 의해 쓰여졌음을 인정함으로써 이들의 주장과 상이함을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문자적 해석을 철저히 거부하는 그의 우의적 해석도 반유대교 논쟁으로 특징 지워진다. 할례는 마음과 들음의 할례이지 육체의 할례를 뜻하지 않으며(9, 1. 4. 10. 12), 안식일은 여섯 번째 날이 아니라 두 번째 창조의 완전한 실재인 일요일이며(15, 1 이하), 참다운 신전은 인간에 의해 세워진 건물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통하여 주님의 이름에 희망을 품고 주님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영적인 건물(16, 8 이하)로 해석한다.
한편 저자는 모세의 식사 규정(레위 11장 ; 신명 14, 3-21)도 도덕적 · 우의적 의미로 해석하였다. 그는 이 규정이 불결한 동물에 관한 계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어떤 교제를 피해야 하는가를 암시하는 것으로 상술한다. 즉 저자는 돼지를 호화스러운 생활 방식으로, 독수리는 먹이를 얻기 위하여 애쓰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빼앗는 사람으로, 물고기는 불경스러운 이단으로, 토끼는 어린이 능욕자로, 하이에나는 매년 수컷과 암컷으로 성을 바꾸기 때문에 부도덕한 처신으로 이해하였다(10, 1-9). 그리고 유대인이 식사 규정에 관한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10, 9) 반면, 저자는 모세가 이 규정에서 낱말의 보다 심오한 뜻을 나타내는 도덕적
요구를 목표로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도덕적 · 우의적 이해는 굽이 갈라진 동물들에 관한 해석에서도 나타나는데, 저자는 유대인과 달리 이 동물들을 경건한 사람들과 교제하는 사람들, 즉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되새기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10, 11 이하).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EpistleofAristeas)의 주장과 흡사하다. 이 편지의 저자도 개별적 계명을 도덕적 행위에 대한 원칙으로 해석하였는데, 두 저자는 세부적인 사항에 있어서는 일치하나 근본적인 관점에서는 상이하다. 즉 《바르나바 편지》의 저자는 율법이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킨다는 아리스테아스의 주장을 무시해 버리고, 율법 규정에 관한 도덕적 의미에 대한 암시만 넘겨받았다. 또한 그의 도덕적 · 우의적 해석은 식사 규정에 관한 필로(Philo, 기원전 20~ 서기 50)의 해석과 어떤 유사성도 나타내지 않는 반면, 개별적 율법에 대한 의미는 그의 도덕적 · 우의적 해석에 기인하였다. 이와같이 그는 이 규정에 관한 해석에 있어 유대 저자들의 해석을 이용함으로써 어떤 독자적인 그리스도교적, 도덕적 · 우의적 해석을 제시하지 않았다.
예형론적 해석 : 저자는 또한 구약의 예형론적, 즉 그리스도론적 해석 방식을 제시하였다.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 사업을 구약에서 미리 계시하였으며, 선재(先在)하는(5, 5 ; 6, 12) 그리스도가 그를 예언하는 예언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므로(5, 6), 저자는 구약의 역사에 관한 상이한 사건과 구약의 예식을 그리스도와 그리
스도교인들에 관한 예시 또는 예표로 보았다(7, 3-11 ; 8: 11, 6 이하 ; 12, 7-8). 저자가 구약의 사건과 예식의 문자적 이해에 대한 극단적 거부와 함께 유대인의 우의를 능가하는 것은, 구약이 그리스도의 구원사적 관점의 필연적 전제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미리 계시한 구약의 모든 구원사적 사건은 저자에게 있어서 예수와 관련된다고 한다(12, 7-8). 즉 그리스도에게 집중된 구원사의 여러 특징에 대한 이해는 예형론적 해석을 통하여 증명된다.
저자는 무엇보다도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육화, 그리스도의 수난,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 등을 증거로 내세웠다. 그는 모세가 눈의 아들에게 예수(여호수아)라는 이름을 붙여 준 것을 그리스도 육화의 예형(12, 8. 10)으로, 여호수아와 관련시켜 그의 아말렉에 대한 승리를 하느님 아들의 악마와 원수에 대한 승리의 예형(12, 9 : 15, 5.7)으로 간주하였다. 또 이사악을 희생 제물로 바치고(7,3-5) 모세가 뱀의 재앙 때 구리뱀을 기둥에 단 것(민수21, 4-9)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예형(12, 6)으로, 레위기 16장 7-9절에 서술된 두 마리의 숫염소 가운데 한 마리는 그리스도의 예형(7, 7)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약속된 땅에 들어감은 육체 안에 명시된 그리스도 에 대한 믿음의 상징(6, 8 이하)이며,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열두 사도의 예형이다(8, 3). 마찬가지로 리브가의 태에 들어 있는 두 민족(창세 25, 21-23)은 유대인과 그 리스도교인(13, 1-3)으로 해석하였으며, 야곱이 에사오보다 탁월함과 에브라임이 므나세보다 탁월함은 늙은 유대인보다 탁월한 젊은 그리스도교인의 예형(13)으로 이 해하였다. 이 밖의 다른 예형론적 해석에 있어서도 바르나바는 유대교나 헬레니즘의 해석 방법을 따르지 않고 교회의 전통, 즉 바오로의 전통을 따랐다. 이외에도 바르나바는 후대의 주석가들에게도 계속 나타나는 숫자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였고, 아브라함의 할례에 관해 설명하면서 육체적 할례가 덧없음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의 종 318명과 함께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는 이 할례의 행위에서 아브라함이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사건을 본 것으로 이해하였는데, 왜냐하면 할례받은 종의 숫자 318에서 300(T)은 십자가를, 10(ι)과 8(η)은 예수 (Ἰησοῦς)란 이름의 첫 두 철자를 나타내기 때문이다(9, 4-9).
〔평 가〕 저자는 우의적 · 예형론적 해석으로 반유대교 논쟁에 관한 호교론적 특징, 즉 유대인의 문자적 해석에 대한 전적인 거부와 동시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철저히 이분(二分)시켰다. 우의적 해석의 관점에서 그는 유대인의 제도(계약, 할례, 신전, 식사 규정, 희생 제물, 단식, 안식일 등)가 유대인이 이해한 것과 다른 의미를 지님을 증명하려 하였으며, 예형론적 해석의 관점에서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원사(육화, 수난,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 종말론)를 그리스도교가 구약의 예표를 통해 하느님에 의해 본래 의도된 종교임을 증명하였다. (-> 성서 사본)
※ 참고문헌 Aristeas, Lettre d'Aristée a Philocrate, Introduction, textecritique, traduction et notes, index complex des mots grecs par A. Pelletier, 《SC》 89, Paris, 1964/ F.S. Barcellona, Barnabas, Epistle of Encyclopedia of the Early Church, vol. 1, 1992, pp. 111~112/ Ch. Blönnigen, Dergriechische Ursprung der jiudisch-hellenischen Allegorese und ihreRezeption in der alexomdrinischen Patristik, Diss., Berlin · Paris . Wien, 1992, pp. 146~151/ H. Lohmann, Drohung und Verheissung. Exegetische Untersuchungen zur Eschatologie bei den Apostolischen Vaitern, Berlin · New York, 1989, pp. 195~241/ H. Lothar, Studien zur typologischen Schriftauslegung im zweiten Jahrhundert, Barmabas und Justin, Diss. Heidelberg, 1970/ P. Meinhold, Geschichte und Exegese im Barnabasbrief, (ZKG) 59, pp. 255~303/J. Schnid, Barnabas, 《RAC》 1, pp. 1207~1217/ K. Wengst, Tradition und Theologie des Barmabasbrief, Berlin, 1971. 〔河聖秀〕
《바르나바 편지》
〔라〕Epistola Barnabae · 〔영〕Epistle of Barnab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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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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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나바 편지》의 저자는 모세가 구리뱀을 기둥에 단 것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예형으로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