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트, 카를 Barth, Kad(1886~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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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바르트.

카를 바르트.

스위스의 신학자. 20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계의 대표적인 인물.
〔생 애〕 1886년 5월 10일 스위스 바젤(Basel)에서 요한 프리드리히 프리츠 바르트(Johan Friedrich Fritz Barth)와 안나 카타리나(Anna Katharina)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876년에 설립된 목회 연수원(Predigerschule)의 교사였고, 어머니는 개혁 장로교 정통주의의 목사 딸이었다. 1889년부터 아버지가 슐라터(A.Schlatter) 후임으로 베른(Bern) 대학에서 신약학을 가르치게 되자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으며, 1904년 베른대학에 입학하여 자유주의 신학자인 뤼더만(H. Liider-mann)에게서 2년 동안 조직 신학을 배웠다. 그렇지만 별다른 신학적 흥미를 찾지 못하던 중 칸트 철학과 슐라이어마허(F.E.D. Schleiermacher)의 종교적 경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보수주의 신학을 원했던 아버지의 권유로 1906년 가을 학기부터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했는데, 당시 베를린 대학에는 교회사학자 하르나크(A.K.G.G.von Harnack)를 비롯하여 루터교 신학자 홀(K. Holl), , 카프탄(H. Kaftan), 궁켈(J.F.H. Gunkel) 그리고 교리사학자이며 조직 신학자인 제베르크(R. Seeberg) 등이 있었다. 카프탄과 궁켈에게서 배운 바르트는 하르나크의 제자가 되었지만, 또다시 아버지의 권유로 1907년 가을 학기부터 튀빙겐 대학으로 옮겨 조직 신학자인 헤링(D. Häring)에게서 배웠다. 1908년에는 마르부르크 대학으로 옮겨 불트만(R. Bultmann)과 헤르만(W. Herrmann)의 강의를 들었다. 그는 또한 신(新)칸트 학파인 코헨(H. Cohen)과 나트로프(P. Natrop)를 통해서 칸트를 연구했고, 바이스(J.Weiss) · 하이트물러(W.Heitmüller) · 율리허(A. Jülicher)에게서 역사 비평적으로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론을 배웠으며, 라데(M. Rade)에게서도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23세 되던 1909년에 바르트는 베른으로 돌아와 목사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다시 마르부르크로 가서 《그리스도교 세계》(Die Christliche Welt)의 편집부장인 라데를 도우면서, 자신의 첫 번째 저서인 《현대 신학과 하느님 나라 사업》을 발표하였다. 1910년에는 바젤 개혁 교회 부목사가 되어 1911~1921년 아르가우(Aargau) 주의 자펜빌(Safenwil)에서 목회 생활을 하였다. 한편 1913년에 바이올린 연주자 넬리 호프만(Nelly Hoffmann)과 결혼한 바르트는, 이 기간 중에 마르부르크 대학 동창생인 투르나이젠(E. Thurneysen)과 깊은 친분 관계를 맺었으며, 1917년에는 공동 설교집인 《하느님을 찾으라! 그러면 살 것이다》를 출판하였다. 바르트는 투르나이젠의 소개로 종교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인 쿠터(H. Kutter)와 라가츠(L. Ragaz)를 알게 되어 1915년 투르나이젠과 함께 사회 민주당에 입당하였다. 한편 그는 93명의 독일 지성인들이 1914년 9월 황제와 독일의 전쟁 정책을 지지하는 선언서에 서명하자 자유주의 신학과 쿠터와 라가츠에 의해서 주도되는 '하느님 나라 운동' 과 결별하면서 "종교 사회주의의 '대의' 가 끝난 곳에서, 하느님에 관한 진지한 물음은 시작된다" 고 하였다.
하느님에 대한 진지한 물음에 대하여 초대 교부들과 칼뱅과 콜부뤼게(Kohlbrügge)로부터 영향을 받은 바르트는, 그로 인해 로마서를 연구하게 되었는데, 그는 모든 신학적 방법론을 동원하여 1916년부터 《로마서 주석》 (Der Kommentar zum Römerbrief)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1919년에 초판을 출판하였다. 뭔헨의 카이저(ChristianKaiser) 출판사의 제의로 1922년에 출판한 《로마서 주석》 제2판은 아주 새롭게 쓰여진 것이다. 또한 1922년에 창간되어 1933년까지 발행되었던 잡지 《시간과 시간사이》(Zwischen den Zeiten)를 통해서는 고가르텐(F.Gogarten), 투르나이젠, 그리고 메르츠(G. Merz)와 함께 변증법적 신학 사상을 발표하였다. 1924년에는 괴팅겐 대학에서 교의 신학을 가르쳤는데, 이때 그는 17세기 프로테스탄트의 정통주의 신학자인 헵페(H. Heppe)의 《개혁된 교의 신학》(Reformierte Dogmatik)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게 된 바르트는, 1924년 논문 <죽은 자의 부활>과 논문집 《하느님의 말씀과 신학》, 그리고 투르나이젠과의 두 번째 공동 설교집인 《창조의 영이여 오시옵소서!》(Veni creator spiritus)를 출판하였다.
1925년 민스터(Muinster) 대학에서 명예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이 대학의 조직 신학 교수로 활동을 하다가 1930년에 본(Bonn) 대학으로 옮긴 그는, 이곳에서 《교 회 교의학》(Die Kirchliche Dogmatik) 제1권 1부(말씀론)를 출판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1967년까지 13권이 출판된 채 그의 사망으로 미완성되었다. 1933년 1월 히틀러 정권이 들어서고 같은 해 4월 7일 '아리안 입법' 이 공포되자 바르트는 히틀러에 대항하는 정치 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는 국가 사회주의와 독일 복음주의 교회 내의 독일 그리스도인' 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갖고, 1933년부터 투르나이젠과 함께 《오늘의 신학적 실존》(TheologischeExistenz heute)이란 소책자를 발행하여 히틀러와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운동에 대해 저항하도록 신자들을 규합하였으며, 반(反)나치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1934년 5월에 바르멘 회의를 조직하였고, 1935년 5월 27일에는 <바르멘 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선언에 기초한 고백 교회 운동' 을 통하여 히틀러 정부에 항거하다가 1935년 독일에서 추방되어 스위스로 되돌아갔다.
1935년부터 《교회 교의학》을 본격적으로 집필하기 시작하여 1938년에 제1권 2부를 출판한 그는, 1937~1938년에는 스코틀랜드의 애버딘(Aberdeen) 대학에서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 를 강연하였으며, 1948년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Amsterdam)에서 개최된 세계 교회 협의회(W.C.C)에서 '세계의 무질서와 하느님의 구원 계획' 이란 제목으로 주제 강연을 하였다.
1961년 여름 학기를 마지막으로 바르트는 바젤 대학의 교단을 떠나려 했으나, 그의 후임이 결정되지 않아 한 학기를 더 강의하였다. 1962년 은퇴하고 미국을 방문한 후부터 그는 노환으로 연구를 계속할 수 없었다. 1966년 제자 부슈(E. Busch)로부터 80세 생일 기념 논문집인《파루시아)(Pansia)를 헌정받고 같은 해 교황청을 방문하기도 한 바르트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스위스의 〈음악 초대석>이란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나의 긴 생애 동안에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 이름(예수 그리스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외의 다른 이름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고 강조하였다. 1968년 12월 8일 대림 제2 주일에 "마리아의 예수 잉태"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설교를 듣고, 그 다음날인 12월 9일 밤 평소 준비하던 강연 원고를 남겨둔 채 사망하였다.
〔신 학〕 바르트의 신학은 그의 주저 《교회 교의학》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아주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다. 일반적으로 그의 신학적 특성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세가지 시대로 구분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형식적일 뿐, 그의 신학은 항상 시대적 상황에 직면하여 언제든지 성서에 근거하여 삼위 일체론적으로 전개한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었다.
종교 사회주의적 역설의 신학(1919년까지) : 초창기 바르트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 곧 칸트, 슐라이어마허, 그리고 헤르만의 전통 속에서 형성되었다. 이때 그는 헤르만에게서 배운 '그리스도론 중심' 의 신학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의 신학적인 주된 관심은 '하느님 나라의 활동' 에 있었다. 그는, '하느님, 계시, 기적' 등이 학문적 인 개념만으로 존재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절대적 개입이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의 초창기 신학은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역사' 와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세상과 역사 혹은 하느님 나라의 긴밀한 결합을 강조하였던 그는 블룸하르트 부자(父子, Joh. Chr. Blumhardt, Chr. Blumhardt)와의 만남으로 서서히 변화되었다. 그는 이들을 통하여 '종교' 와 참된 '하느님의 나라' 의 대립을 인식하였다. 그에 의하면, 하느님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자기 스스로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에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신앙의 실천을 요청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은 세상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시다." 세상과 하느님 나라의 결합에서 분리로의 전환은 '하느님 나라' 와 '세계 혹은 사회'의 긴밀한 결합에서 "세상은 세상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다" 라는 명제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 속에 있는 인간은 죄를 지니고 있는 존재이며, 인간은 연약한 육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와 사회의 직접적 결합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바르트의 신학적 입장을 전환시킨 것은 성서의 재발견이었고, 성서에 대한 그의 관심은 《로마서 주석》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이 책 초판에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절대적 '대립' 을 역설적으로 극복하였다. 그에 의하면, 복음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옛 것이고, 전적으로 특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반적인 것이다. 역사적인 그 어떤 것이 아니라 모든 역사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옛 고백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고백이고,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특별한 것이다. 단순한 전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가 역사이다." '아주 특별한 것' 은 동시에 '아주 일반적인 것이다." 라는 표현은 그의 역설적 신학 방법을 적절하게 표현해 준다. 바르트는 이 초판을 "너희는 부활을 너희 뒤에 갖고 있다" 라는 명제에서 기술하였는데, 그에게 부활은 이 세상의 저편에 있는 것이 이 세상 안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이다. 이 사건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으로, 인간성을 변화시키는 '신적 사건'이다. 따라서 '구원에 대한 확신' 은 다분히 종말론적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윤리적 가능성, 즉 인간에 의한 의(義)의 실현을 배척하였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최종적인 관점 아래에서는 윤리란 없다. 그 속에는 단지 하느님의 운동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즉 하느님의 운동인 예수의 강생, 죽음, 부활 사건은 그 자체로서 '윤리의 정립'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역사의 끝에 계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 있는 운동, 그 운동 속에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 선하고 자유로운 분이시며, 이 운동 속에서 우리에게 들어오시길 원하신다." 이러한 부활의 종말론적 입장에서 그는 예수를 '승리자' 로 표현하였다.
변증법적 신학(1920~1930년) :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은 《로마서 주석》 초판과 제2판 사이에 작성된 탐바허(Tambacher)의 강연 <사회 안에서의 그리스도>(Der Christ in der Gesellschaf)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강연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전적 타자' (全的 他者, totaliter aliter)로 규정하였다. 왜냐하면 예수의 강생 사건은, "하늘로부터 수직으로 내려온"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서" 그 의미가 드러난다. 그 의미는, 인간적인 '긍정' (Ja)에 대한 하느님의 '부정' (Nein)이다. 그에 의하면 '부정' 적인 것에 대한 '부정' 으로서의 하느님의 '긍정' 은 곧 변증법적 '종합' 이다. 그는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종합 명제" 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변증법적 신학 방법은 고가르텐과의 만남으로 발전하였으며, 이 만남은 오버벡(F. Overbeck), 칸트, 플라톤(Platon), 키 에르케고르(S.A. Kierkegard)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F.M. Dostoevsky)의 영향을 받으면서 슐라이어마허에 대한 공개적인 반론(反論)으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첫 번째 문서가 바로 1920년에 아르가우어(Aargauer) 협의회에서 행한 <성서적 질문들과 통찰과 전망>이다. 그는 이 강연에서 성서가 우리에게 제공 해 주는 것은 예수 안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운동이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긍정의 실체' (Realität des Ja)라고 하였다. 이러한 표현 자체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질적 차이를 재차 강조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여기(이 세상)와 저기(저 세상)의 대립이 결합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대하여 순수한 부정 (否定)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부정의 부정이고, 이 세상적인 것을 위한 저 세상적인 것이다.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고, 비존재들(Nicht-seins)의 비존재(Nicht-sein)를 뜻한다.
이러한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은 한 가지 사실이 갖고 있는 '긍정' 과 '부정' 의 양면성을 통찰하고, 상호 대립시키고, 그 대립 속에서 종합을 찾아내는 방법을 취한 다. 이러한 그의 변증법적 신학은 "유한은 무한을 품을 수 없다"는 사고에 근거하여 계시와 역사, 신학과 인간학, 교회와 사회를 철저히 분리시킴과 동시에, 그 분리를
그리스도론적으로 종합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종합의 이면(裏面)에는 '계시의 주체로서의 하느님' 사상과 실재하는 역사에 선재하는 보편적 하느님의 구원 경 륜 사상이 있다. 그는 계시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단 한 번 일어난 '원(原)역사적 사건' 으로 이해하고, 이 사건 속에서 "하느님은 말씀하셨다" 고 한다. 이러한 의미 에서 신학은 '하느님의 말씀하심' 에 대한 봉사이고, 신학의 과제는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설교의 과제' 와 하나이며, 윤리는 '교의학의 보조 학문' 으로 여겼다. 바르트 는 1928~1931년에 행한 윤리 강의에서 "하느님의 말씀 속에 있는 윤리"를 기초로 하였다. 그에 의하면, 윤리의 주제는 '거룩한 인간' 이 아니라, 오히려 선포된 하느 님의 계명을 통하여 인간을 거룩하게 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주장이며, 요청이다. 이것은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은 부룬너(E. Brunner), 불트만 그리고 고가르텐과의 입장 차이로 멀어지게 되고, 결국 변증법적 신학 동인지인 《시간과 시간 사이》도 폐간되었다.
교의학적 신학(1930년 이후) : ① 신론과 그리스도론 : 바르트가 교의학적 신학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는 캔터베리의 안셀모(Anselmus, 1033~1109)에 대한 연구였는데, 안셀모의 신 존재 증명 방식은 그에게 새로운 신학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즉, 그가 취한 신학 방법은 '유비론'(類比論)이다. 그는 세상 밖에 있는 진리는 "유비를 통하여" 인식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은 하느님에 대한 그 어떤 것도 이성으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에 기초한 신뢰"만이 하느님을 인식하게 해준다. 그의 《교회 교의학》의 논증은 신앙 고백적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가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로 해결하고자 한 것은 첫째 구별 속에 있는 자기 자신〔卽者〕과 대상〔對者〕 사이의 갈등 해결, 둘째 하느님의 계시와 그 계시를 풀이하고 있는 성서 언어 사이에 있는 구조 분석, 셋째 계시의 언어적 능력과 교의학적 진술 사이에 있는 갈등 해결이었다. 따라서 그는 '존재의 유비' (analogia entis)를 거부하고, 이를 계약 신학적 '관계의 유비' (analogia relationis)로 대치하였으며, 인식론적으로는 '신앙의 유비' 를 고수하였다.
바르트의 교의학적 신학의 체계와 조직은 그리스도론' 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의 그리스도론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은 <바르먼 선언>과 《교회 교의학》의 장 · 절 분류에서 외적으로 드러나며, 이는 성서 신학적 '계약신학' 에 기초를 두고 있다. 따라서 《교회 교의학》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신학적 특성은 '신앙의 유비' 를 인식의 방법으로 하는 '그리스도론적 계약 신학' 이다. 이러한 신학적 특성은, 그의 신학적 증언은 언제든지 하느님 말씀의 현실성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말씀의 신학' 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 서론에서 그는 "계시되고 기록되고 선포된 말씀"의 세 토대 안에서 하느님 말씀의 진리의 표현을 그리스도론적으로 종합하였다. 이어서 그는 삼위 일체, 말씀의 육화, 그리고 성령 강림에 관한 진술로 계시론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그는 성서와 교회 가르침에 관한 규범을 전개한다(KD 1, 1-2). 그는 하느님의 계명 안에서 윤리의 토대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요청 형태로서 복음과 다를 바 없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선택론과 예정론을 하나로 묶어 전개하였다(KD 2, 1-2)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하시는 하느님' 이시며, 동시에 '선택된 인간' 이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로고스' (1ogos) 속에 이미 존재하신 분이고, 그의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의 "영원한 결의"가 역사 안에서 실현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구원받은 인간"이다. 여기서 선택하시는 분과 구원하시는 분, 그리고 선택받은 인간과 구원받은 인간의 유형이 형성된다. 그의 선택론은 그리스도론에 기초한 교회 공동체 선택을 포괄하고 있다. 특히 그는 '절대 이중(二重) 예정론' (Praedestinatio gemina)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자기 규정' (Gottes Selbstbestim-mung)으로 이해하였다.
② 창조론 : 바르트는 그리스도론적 계약 신학의 전망속에서 창조론을 전개하였다. 창조는 하느님의 계약 의지가 우주론적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 도의 화해 사건을 "창조의 내적 근거로서의 계약과 "계약의 외적 근거인 창조" (KD 3, 1. 41)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은총의 계약사(契約史)가 창조에 뒤따른다. 그러나 은총의 계약사는 창조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가 은총의 계약사에서 나오고, 계약사의 외적 전제로서 뒤따른다(KD 3, 1, 46). 창조는 계약의 표식이며 증언 자체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영원한 결의' 로서의 계약이 갖고 있는 특성은 창조에 뒤따라 일어난다. 따라서 세계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의 무대이며, 계시의 시간 적 공간적 형태이다. 이러한 계약사적 전제 속에서 인간은 하느님 계약의 동반자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의 형상' 을 계약 관계로 이해하였다. 즉 창조이 전에 하느님의 내재적 삼위 일체론적 관계와 이 관계에 상응하는 관계로 하늘과 땅의 관계,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이해하였다. 이렇듯 인간 존재와 하느님의 존재 사이에는 계약 신학적 '관계의 유비' 가 있다. 이 유비는 실존적으로 '나와 너' 의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의 유비' 속에서 예수는 육화된 하느님 말씀의 존재 방식 속에서 현존하고 있으므로 이웃을 위한 인간으로서, 삼위 일체성 안에 존재하고 있는 하느님의 형상이다. 그의 창조론은 인간론(KD 3, 2), 섭리론, 악마론 그리고 천사론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교제, 생명, 하느님 앞에 선 피조물의 자유에 관한 윤리로 끝난다.
③ 화해론 : 바르트의 화해론(KD4, 1-4)은 그리스도론이고, 그의 그리스도론은 계약 신학적 화해론이다. 그의 그리스도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하느님이며, 참 인간인 '인격' 과 왕 · 사제 예언자라는 세 '직분' 과 예수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이라는 '양위' (兩位)에 관한 프로테스탄트 교리의 결합이다. 예수 인격의 결합은 공 간적으로는 그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의 운동 속에서, 그리고 역사적 차원에서는 창조 이전에 결의된 하느님의 영원한 계약, 혹은 구원 의지의 성취로 설명된다. 이러한 그리스도론적 요지에서 그는 죄론, 구원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 역사적 실존 양식으로서의 교회론을 화해론에 포함시켰다.
그리스도론에서 구원론으로 연결될 때 성부의 심판, 성자의 예언, 성령의 약속은 인간 예수와 모든 인간의 존재론적 결합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우리 밖에서" (extranos), "우리를 위해서" (pro nobis) 완성되어진 예수의 활동은 모든 인간을 위한 활동이 된다. 계약 신학적 화해론으로서의 바르트 그리스도론은 종교에 대한 비판과 자연신학에 대한 철저한 거부로 전개된다. 그래서 그는 형이상학적 삼위 일체론과 추상적인 단일신론(單-神論)을 거부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의 운동 속에 인간의 높아짐을 포함시킴으로써, 예수의 신성이 인성(人性)을 포함하는 '신(新)인간론' 을 전개한다. 그는 성사를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하고, '물의세례' 를 인간의 행위로 이해하여, 그는 유아 세례를 문제시하였다.
〔신학적 영향〕 바르트 신학의 영향은 수용과 비판 속에서, 그리고 이해와 오해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의 변증법적 신학' 과 <바르멘 선언>은 독일 고백 교회의 자기 이해를 도왔고, 전후(戰後) 독일 주정부 교회(Landes-kirche)에 신학적인 기본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그의 교의학적 신학은 이반트(H.J.-Iwand) , 포겔(H. Vogel), 베르 쿠버(G.C. Berkouwer), 글뢰게(G. Gloege) 등으로부터 구조적인 비판을 받았고, 골비처(H. Gollwitzer), 볼프(E.Wolf), 베버(O. Weber), 크렉크(W. Kreck) 등에게서는 그의 신학적 특성이 비판적으로 수용되었다. 반면, 그의 교의학적 신학은 가톨릭 교회와의 교회 일치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교의학적 신학은 일찍이 프로테 스탄트 측의 고가르텐, 불트만 그리고 푹스(E. Fuchs)에 의해서 해석학적 반대 질문이 제기되었고, 가톨릭 측으로부터는 손겐(G. Sohngen), 발타사르(H.U. von Balthasar) ,부이야르(H. Bouillard), 큉(H. Küng)이 바르트와 신학적 토론을 하였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바르트의 견해 때문에 발타사르는 바르트 신학에 관한 책을 저술하였고, 큉은 바르트의 의인론(義認論)이 트리엔트 공의회의 의인론과 일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바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신학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은 마르퀴르트(Marquardt)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방대한 저작에도 불구하고 미완성되었기 때문에-그는 종말론을 채 전개하지 못하였다-그의 신학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고려해야 할 문제들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의 방대한 저작들은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놓았다. (-> 프로테스탄트 신학 ; 변증법 신학)
※ 참고문헌  K. Barth, Die kirchliche Dogmatik, 1-1, 1932, 1975(9판) ; 1-2, 1938, 1975(6판) ; 2-1, 1940, 1975(5판) ; 2-2, 1942, 1974(5판) 3-1, 1945, 1970(4판) ; 3-2, 1948, 1974(4판) ; 3-3, 1950, 1961(2판) ; 3-4, 1951, 1969(3판) ; 4-1, 1953, 1975(3판) ; 4-2, 1955, 1964(2판) ; 4-3, 1959, 1974(2판) ; 4-4, 1967 ; 색인 목록집, 1970/ 박봉랑, 《신학의 해방》, 대한기독교출판사, 1991, pp. 127~5291 Kim Jae Jin, Die Universalitàt der Versöhnung im Gottesbund, Hamburg, Münster, 1992. 〔金在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