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사이파

〔히〕 פְּרוּשִׁים , פָּרִישָׁי · 〔그〕 Φαρισαίοι · 〔라〕Pharisaei · 〔영〕 Pharis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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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파인과 세리(6세기경 이탈리아 라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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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파인과 세리(6세기경 이탈리아 라벤나)


기원전 2세기 중엽부터 율법에 대해 보다 엄격한 해석과 실천으로 대부분의 유대인들과 자신들을 구별하기 시작한 무리들을 지칭한 용어. 〔용어와 정의〕 바리사이파라는 용어는 히브리어 ‘프루쉼’ (פְּרוּשִׁים)과 ‘페리쉰’ (פָּרִישָׁי), 그리고 아람어 ‘프리쉬’ (פְּרִישָׁיָּא)에서 파생된 말이다. 요세푸스(F. Josephus, 37/38~100)의 저서와 신약성서에서는 그리스어 ‘파리사이오이’ (Φαρισαίοι)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이 말은 '분리된 자' 혹은 '구별된 자' 라는 뜻을 갖고있다. 랍비 문학에서도 바리사이파라는 용어는, 부정적으로는 모든 이단자들을 언급하는 데 사용되었지만, 요세푸스의 저서나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바리사이파들과 같은 의미로 호칭되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라는 용어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며, 또 무엇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다시 말해 바리사이파가 즈루빠벨이나 에즈라 시대처럼 이방인들이나 비율법적인 유대인들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의적으로 부정한 모든 것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용어가 기원전 2세기 중엽부터 율법에 대한 보다 엄격한 해석으로 이방인들이나 반유대인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유대인들과 자신들을 구별하기 시작한 무리들에게 적대자들이 붙여준 이름으로 여긴다.
바리사이파라는 용어가 적대자들에 의하여 경멸조로 불려진 명칭이라면, '하시딤' (חֲסִידִים)은 바리사이파들과 에세네파의 조상들이 자신들에게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하시딤은 조상들의 관습을 따르며 마카베오를 따르던 무리들로, 유대교를 박멸하려고 했던 에피파네스와 예루살렘의 부패한 사제들에게 대항한 마카베오를 도와 독립 투쟁에서 성공하였는데, 그들은 그 후 타락한 마카베오 후예들에게 등을 돌리고 율법의 엄격한 해석과 실천에 더욱 열성을 쏟았다. 결국, 바리사이파는 마카베오 후예들과 하시딤의 갈등 속에서 탄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바리사이파들은 자신들을 '동지들의 모임' 을 뜻하는 '하베림' (חֲבֵרִים)이라고 생각하였다. '하베르' (חָבֵר)는 율법 가운데서도 특별히 레위기의 정결 예법과 사제의 의무 조항을 엄격하게 지키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모든 바리사이파들이 하베림에 속한 것은 아니었다. 하베림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도시 가까운 곳에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계약의 형제들로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공동체라고 자부하였다. 하베르로서의 바리사이파는 율법을 모르거나 준수하지 않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암 하아레츠’ (עַם הָאָרֶץ)나 이방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으며, 한 식탁에서 함께 음식을 나눌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바리사이파들은 이외에도 ‘서기관’ (סוֹפֵר)이나 ‘현인’ (חֲכָמִים)이란 이름을 선호하기도 하였다(마태 23, 2. 7. 13. 15. 23. 25. 27. 29 참조).
〔기원과 역사〕 페르시아 시대 : 이스라엘 역사에서 유대교는 페르시아 시기 초기에 에즈라로 말미암아 탄생되었다. 이때 유대에는 정치적으로, 해외에서 페르시아의후광을 업고 귀국한 '해외파' 와 '국내파' 가 주도권 쟁탈전을 하고 있었다. 율법서와 예언서에서는 이 주도권 싸움을 '땅' 의 문제로 신학화하였고, 에즈라서에서 '국내파' 는 이방인들과 피가 섞인 사마리아 사람들(Sama-ritans)이며 우상 숭배자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암 하아레츠' 인 것처럼 왜곡되었다. 요세푸스는 이때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사제들이 세겜의 그리짐 산 정상에 사마리아인 성전을 짓고 사마리아 공동체를 형성했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이끄는 포로 귀환 공동체가 사제들의 권위를 훨씬 뛰어넘어 엄격한 결혼 예법을 적용하고 있었으며, 율법(Torah)을 공개적으로 가르쳤고, 정결 예법과 십일조를 자신들의 법해석에 따라서 실시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이방인이나 비율법적인 유대인들과 구별하여 생활하였다. 반면에 제 3 이사야의 예언 그룹은 사제들과 정치적인 대결을 하기보다는 이 세상 마지막 날 예루살렘 성전이 참된 하느님의 집이 되리라는 것과 그때에 자신들만이 의로운 존재로 인정받게 되리라는 종말론적 사고와 행위를 보여 주었다.
이러한 여러 그룹들이 그리스 시대에 어떤 모습으로 발전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시기에 예루살렘의 사제들과는 다른 평신도 조직인 서기관 그룹이 형 성되어, 사제들의 위치를 대신한 랍비들이 회당을 중심으로 율법을 교육시키고 종교 생활을 관장하기 시작하였다.
마카베오 왕조 시기 :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Ⅳ Epipanes, 기원전 175~164)의 유대교 박멸정책과 성전 모독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마카베오가 독 립 전쟁을 지원하게 함으로써 예루살렘 성전과 타락한 대제사장직을 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요나단이 대제사장직을 강탈하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성전과 대사제직의 정통성에 대해 의문과 반감을 갖게 되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유대교 분파들이 싹트게 된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다고 주장한다.
하스모네 왕가 시기 : 요세푸스에 따르면, 바리사이파인들과 사두가이파인들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때는 요한 히르카누스 1세(기원전 134~104)가 통치하던 시기였다. 마카베오 시대에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는 대립적인 두 정당의 모습으로 출현하고 있다. 사독(Sadok)의 후손들로 자처하는 사두가이파는 대사제 그룹과 귀족층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모든 사제, 대사제, 그리고 귀족들이 다 사두가이파는 아니었으며, 바리사이파들도 많았다. 그들은 조상들의 관습과 율법에 대한 열정으로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는데, 히르카누스의 그리스식 군주제에 식상한 바리사이파들이 왕에게 대사제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함으로써 왕과 바리사이파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Am. XIII, 288~ 298). 히르카누스는 바리사이파들에 대한 반감으로 그들이 제정한 율법들을 폐기하고 종교적으로 타협적이었던 사두가이파의 편으로 기울어졌다(M.Masser Sheni, 5, 15;Sotah,9, 10). 하스모네 왕가와 바리사이파 사이의 갈등은 히르카누스의 셋째 아들인 알렉산더 얀나이(기원전 103~76) 때 절정을 이루었다. 백성들에게 알렉산더가 대사제로서 자격
이 없다고 선동한 바리사이파들은 초막절 축제 예식 때 그에게 레몬을 던져 의식을 방해하도록 하였으며(Ant. XIII 372f. 88), 알렉산더는 이 일로 6,000명의 바리사이파를 학살하였다. 그 후 왕이 전쟁으로 피난하였을때 바리사이파들은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6년 동안 내전이 계속되었는데, 그때 목숨을 잃은 유대인만도 5만명이 넘었다(Ant. XIII, 376).
바리사이파와 하스모네 왕가 사이의 평화는 알렉산더얀나이의 아내며 후계자이자 살로메 알렉산드라(기원전 76~67) 시기에 이루어졌는데, 이는 알렉산더가 임종하면서 아내에게 바리사이파들과의 화해를 유언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살로메는 바리사이파였던 자신의 아들 히르카누스 2세(기원전 63~43)를 대사제로 임명하였으며 산헤드린(Sanhedin)을 바리사이파에게 맡겼다. 실권을 잡은 바리사이파는 해외로 망명했던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포로들을 석방하였으며, 알렉산더 얀나이에게 협조한 많은 귀족들을 처형하였다(Ant. XIII, 409). 그러나 사두가이파의 사주를 받은 살로메의 맏아들 아리스토블루스 2세(기원전 67~63)가 바리사이파의 정책에 반대하여 하스모네 왕가는 결국 두 형제의 싸움으로 몰락하였으며, 팔레스티나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로마 시기 :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의 갈등으로 이득을 얻은 것은 로마와 헤로데였다. 헤로데 대왕(기원전 37~서기 4)이 유대의 통치자가 되었을 때, 바리사이파였던 폴리온(Polion)과 사마이아스(Samaias)는 동료 유대인들에게 헤로데의 통치를 받아들이도록 권하였다. 그 이유는 헤로데의 지배를 불순종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로 여겼기 때문이다(Ant XV, 4). 이 일로 바리사이파들은 헤로데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헤로데 궁전의 여인들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쳤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로데 시대 때 유대에는 6,000명의 바리사이파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유대 전쟁(66~74)이 발발하기 직전 대사제 그룹과 연대하여 열성당원(Zealos)들에게 전쟁을 야기시키지 말도록 호소하는 평화적 중재자들로 묘사되었다(BJ.Ⅱ.410~417). 그러나 바리사이파들이 모두 평화주의자로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바리사이파의 지도자들중에는 유대 전쟁이 일어나자 혁명에 가담한 사람도 여럿 있었다.
유대교의 형성에서 특별히 중요한 사건은 70년의 예루살렘 멸망과 132~135년에 있었던 바르 코크바(BarKochba)의 항쟁이었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팔레스티나 지역의 유대인 사회가 이방화로 인해 위기를 맞고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유대적인 삶의 함양과 보존을 위하여 구전되어 오던 율법을 문서화하였고, 그것을 후손들에게 교육시키려는 랍비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바리사이파의 유산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1세기경 바리사이파는 사제들과 평신도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들은 조상들로부터 구전된 전승들과 모세 율법을 모두 권위 있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특징과 신학〕 바리사이파들의 특징과 신학에 관한 기록은 요세푸스(Ant. XVIII, 12~15 ; BJ. II, 162~163), 참란 문서(4QpNah, 3, 1~4. 6~7. 9b~11), 랍비 문학(mYad. 4, 6~8 ; mHag. 2, 7 ; mSot. 3, 4등), 그리고 신약성서에 나타나 있다. 이 문서들 대부분의 자료들은, 그 기록 목적이 논쟁적이었기 때문에 자료의 신빙성에 문제가 있지만, 바리사이파에 대하여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생활 : 요세푸스는 바리사이파인들을 검소한 생활을 하며 전혀 사치하지 않는 사람들로 묘사하였다. 그들은 교리에 따라서 선을 행하며, 계명의 준수를 가장 중요하 게 생각하였다. 또 그들은 특별히 조상들을 존경하며 순종하였고, 그들의 교훈을 거스르려고 하지 않았다(Ant. XVIII, 12).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조상들로부터 전승되어 온 규례와 율법의 해석(구전 율법)을 모세의 율법과 같은 권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였던 것이다(Ant. XIII, 297). 반면에 사두가이파인들은 이 점에서 바리사이파와 의견을 달리하였다. 바리사이파인들이 조상들의 전승을 중요시한 사실은 예수와 바리사이파의 논쟁 부분에도 잘 암시되어 있다(마르 7, 3. 5-8 : 참조 : 갈라 1, 14)
요세푸스가 바리사이파인들은 대중으로부터 전적인 신뢰를 얻고 있었다고 전한(Ant XIII, 298 ; XVIII, 1) 반면에, 사두가이파인들은 일부의 부유 계층을 제외하고는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직무를 수행하려고 할 때, 비록 그것이 자신들의 마음에는 내키지 않더라도, 바리사이파를 신뢰하는 일반인들의 눈이 두려워바리사이파의 가르침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바리사이파의 가르침은 도시에 사는 일반 대중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모든 기도와 예배의 주요 부분은 바리사이파의 해석에 따라서 거행되었다(Ant. XVIII, 15).
그런데 복음서 중에서 특히 마태오 복음은 논쟁 대상으로 바리사이파를 지목하고 있다.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은 모두 행하고 지키시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을 따라 행하지는 마시오. 사실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습니다"(마태 23, 2-3). 바리사이파에 대한 원시 그리스도교의 논쟁은 요한 복음에도 잘 반영되어있다(요한 8, 39-47). 이 같은 논쟁은, 한편으로는 1~2세기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벌어졌던 다양한 종교적 그
룹들간의 알력과 견해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바리사이파가 이 시기에 율법에 대한 그들의 지식과 경건으로 인하여 다른 유대인 그룹에 비해서 월등한 위치에 있었다는 점을 암시해 주고 있다.
율법의 실천 : 바리사이파는 율법의 정확한 해석과 그 엄격한 실천을 자랑으로 생각한 사람들이었다(B.J. Ⅱ, 162). 이 점은 사도 바오로가 언제나 바리사이파로 살아 왔음을 자랑하였다(사도 22, 3 : 26, 5 ; 갈라 1, 14 : 필립 3, 5-6)는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마태오 복음 23장 15-26절은 안식일법과 정결 예법, 결혼 · 개종에 관한 것, 각종 서약과 십일조 등 바리사이파들의 엄격한 율법 조항들이 삶의 전반에 걸쳐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에세네파는 동료 유대인들의 율법 준수를 신랄하게 공격하였으며, 예루살렘 성전의 신성함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 나름대로 성서를 해석하였다. 복음서는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초기 예수 공동체도 이와 마찬가지 모습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부정적인 면에서 바리사이파는 율법에 대한 엄격성으로 인해 동료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그들과 분리된 생활을 하였다.
신학 : 바리사이파는 영혼은 불멸한다고 믿었으며, 선한 삶을 산 사람과 악행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보상과 징벌이 있다고 믿었다. 악한 영혼들은 영원히감금되는 형벌을 받지만 선한 영혼들은 다른 삶으로 이어지는 평탄한 길을 부여받는다고 확신하였다(Ant XVIII, 14). 의인은 마지막 날 부활하여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지만, 악인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리라는 바리사이파의 응보와 부활 사상은, 다니엘서 12장 2절에서처럼 랍비적 유대교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사두가이파는 부활 사상을 믿지 않았으며(마태 22, 23 ; 마르 12, 18 ; 루가 20, 27 : 사도 23, 8), 영혼 불멸 사상이나 이승에서의 보상과 징벌, 영과 사람의 직접적인통교(사도 23, 9)도 받아들이지 않았다(B.J. II, 165). 또한 사두가이파는 영혼은 그 몸과 함께 소멸된다고(Ant. XVIII, 16) 가르쳤고, 천사와 영의 존재도 부인하였다(사도 23, 8). 그러나 바리사이파인들은 메시아 대망론자들이었다(Pss. Sol., 17, 23~18, 9). 이 같은 사실은 예수에게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올 것인지 묻는 그들의 질문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루가 17, 20).
바리사이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운명론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 만사는 운명과 하느님에게 달려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 인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의지가 신의 섭리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쳤으나(Ant. XVIII, 13), 세상 만사 가운데 어떤 일들은 신의 섭리이지만 어떤 일들은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하였다(Ant. XIII, 172) 반면에 사두가이파는 운명을 철저하게 부인하였다. 그들은 선과 악은 인간의 선택에 달린 것이고, 이 일을 행하거나 저일을 행하는 것도 오로지 자신의 판단에 달려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B.J.Ⅱ,16). 그러나 에세네파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철저하게 신의 섭리로 돌렸다. 그들은 바리사이파처럼 영혼 불멸과 부활을 믿었다. 따라서 신의 섭리와 인간의 의지를 모두 인정한 바리사이파는 에세네파와 사두가이파의 중간 입장을 견지하였다.
〔예수와 바리사이파〕 바리사이파라는 용어는 신약성서에서 95번(마태 27번, 마르 12번, 루가 27번, 요한 19번, 사도 9번, 필립 1번) 사용되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복음서 자료들은 예수와 바리사이파들이 서로 격렬하게 대적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마태 12, 14. 23 : 마르 3, 6 ; 12, 13 : 요한 11, 46-52. 57 ; 19, 39). 예를 들어 바리사이파는 예수의 말을 책잡으려고 하였으며(마태 22, 15 ; 22, 35 ; 마르 12, 13 ; 요한 8, 13), 그의 권위를 의심하여 끈질기게 표징을 요구하였다(마태 12, 38 : 16, 1 : 마르 8, 11). 또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았으며(루가 6, 7 : 요한 11, 46), 그를 죽이려고 의논하였고(마태 12, 14 : 마르 3, 6 : 요한 11, 47), 체포하려고 하였다(마태 21, 46 ; 요한 7, 32). 예수의 가르침을 비난하였고(루가 5, 21. 30), 그가 행한 기적은 귀신 두목에게서 힘을 얻었기 때문이라 하였을(마태 9, 34 : 12, 24) 뿐만 아니라, 예수를 거짓말쟁이로 매도하였고(마태 27, 63), 예수의 제자들을 저주받은 자들로 단정하였다(요한 7, 49).
한편 예수로부터 바리사이파들은 독사의 자식들(마태 3, 7 ; 23, 33), 뱀 같은 자들(마태 23, 33), 위선자들(마태 15, 7 ; 23, 13. 15. 23. 25. 27. 29)이며, 소경 같고(마태 15, 14 : 23, 26 : 요한 9, 40-41), 회칠한 묘소이며(마태 23, 27), 예언자를 죽인 사람들의 후손(마태 23, 31)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또한 그들은 성서에 대해 무지하며(요한 4, 22 ; 7, 28 : 8, 19 등), 하느님을 믿지 않고(요한 8, 45 ; 10, 26. 38 ; 12, 37 등), 스스로 하느님의 뜻을 저버렸다(루가 7, 30)고 예수는 비판하였다. 그리고 탐욕적이며(마태 23, 25), 돈을 좋아하고(루가 16, 14 : 마태 23, 16 이하), 남에게 보이기를 좋아하며(마태 23, 5 이하), 의로운 척하고(루가 18, 10 이하), 거드름 피우며 대접받기를 좋아한다(마태 23, 6-7 : 루가 11, 43)고 하였다. 바리사이파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한 까닭도 바로 이와 같은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다(요한 8, 37. 40. 59 : 10, 31 이하)
바리사이파에 대한 루가 복음서의 자료는 복합적이지만, 다른 복음서처럼 예수에게 적대적인 바리사이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루가 복음에서 예수는 바리사이파의 가정에 식사 초대를 받기도 하며(7, 36-50 : 11, 37-54), 안식일에 바리사이파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 식사를 함께 나누기도 한다(14, 1-24). 더욱이 헤로데가 예수를 죽일 계획을 세웠을 때 예수에게 피하도록 도움을 준 사람이 바리사이파였다(13, 31). 사도 행전의 기록에 의하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는 바리사이파 출신의 사람들도 있었다(15, 5). 바리사이파에 대한 루가 자료의 변화에 대하여 일부 학자들은 루가 자료의 역사성을 의심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학자들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한 바리사이파의 공헌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예수가 선포한 하늘 나라의 개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루가 복음서의 저자가 편집 의도상 바리사이파들을 등장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모든 자료들은 일차적으로 초기 예수 공동체와 바리사이파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즉 예수 공동체와 바리사이파는 하느님(마태 22, 41-46), 조상들의 전통이나 율법(마태 12, 1-8 ; 15, 6 : 23, 23 등), 일상적 삶(마태 9, 11 ; 마르 2, 16 : 루가 5, 30)에 대한 이해와 해석에 있어서 서로 갈등을 느꼈던 것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바리사이파 사이의 논쟁은 주로 조상들의 전통 가운데서 정결 예식(마태 15, 1 이하 : 마르 7, 1-5)과 금식(마태 9, 14 : 마르 2, 18 : 루가 5, 33), 안식일(마태 12, 2 : 마르 2, 24 : 루가 6, 2 ; 14, 3 : 요한 9, 16), 이혼(마태 19, 3 : 마르 10, 2) 등에 관한 것이었다. 정결 예식에 대하여,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후의 바리사이파는 가정에서의 식탁을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레위기에서 사제들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제의적으로 정결해야 했으며, 하느님께 바쳐진 음식 또한 제의적으로 정결한 상태에서 먹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정결 예식은 사제에 의하여 오직 성전에서만 지켜졌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는 성전 밖에서 정결 예식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레위기법의 생활화를 가정의 식탁을 중심으로 실천하였던 것이다. 바리사이파는 모든 유대인들이 마치 성전의 사제인 듯 일상 음식을 제의적으로 정
결한 상태에서 먹도록 하였다.
바리사이파는 성전과 그 제의를 존중할 뿐만 아니라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된 후에도 그 성전이 다시 건축될 때를 기다리며 성전에 관한 율법을 생활 중에 지키도록 가르쳤다. 그들은 "성전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제단이 이스라엘을 속죄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인간의 식탁이 속죄한다" (b. Berakhot 55a)고 주장하였다. 바리사이파들은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왕국이 되고 거룩한 민족이되리라"(출애 19, 6)는 계명을 문자적으로 실천하였다.초기 예수 공동체와 바리사이파들이 모두 식탁 공동체를 형성하였지만, 바리사이파들은 그것 때문에 다른 동료 유대인이나 이방인들과의 사귐과 나눔을 거부하였으며, 예수 공동체는 '암 하아레츠' 와도 식탁을 마주보고 앉았다(마태 9, 11 ; 마르 2, 16 : 루가 5, 30).
〔바리사이적 유대교〕 70년 이전의 바리사이파들은 성전에서의 제의적 정결을 가정으로 연장시켰다. 그들은 성전의 제단을 각 가정이나 동네 길거리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더불어 새로운 랍비 운동의 주역들은 율법의 학습을 성전 제사로 대체하였고, 사랑의 구체적 행위가 속죄를 가져온다고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70년 유대 전쟁의 실패와 132~135년 바르 코크바 항쟁의 실패는 유대인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부정적인 면에서 이 시기에 유대인 사회는 정치 · 경제 · 문화 · 종교적인 면에서 이방화를 감수하여야 했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에서는 새로운 랍비 운동의 출현과 회당을 중심으로 한 율법 교육, 그리고 구약성서의 정경화와 미쉬나(Mishah) 토세프타(Tose-fta), 탈무드(Talmud) 등의 문서화를 이 시기의 중요한 역사적 업적으로 들 수 있다.
66~70년 유대 전쟁 동안에 로마군은 열성당이나 시카리(Sicarii) 같은 혁명 세력을 거의 근절시켰다. 쿰란 공동체는 68년에 멸망되었으며, 사두가이파인들의 숫자도 성전 멸망과 더불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70년 후 유대교 종파로서의 바리사이파도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유대 사회의 현자나 랍비들로 변형시켰다. 그렇다고 모든 랍비들이 다 바리사이파였고 바리사이파의 후손들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70년 후 요하난 벤 자카이(Johanan ben Zakkai)를 중심으로 한 야브네(Jabneh)의 랍비들은, 진보적이며 자유주의적인 힐렐(Hiillel) 학파와 보수적이며 엄격한 샴마이(Shammai) 학파로 나뉘어져 있었던 바리사이파 사상의 계승자들이었다. 랍비 전승은 근본적으로 율법에 대한 바리사이파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포로 후기 유대교, 바리사이파, 그리고 랍비적 유대교는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용어들로 생각할 수 있다. (→ 사두가이파 ; 유대교)
※ 참고문헌  R.T. Beckwith, The Pre-History and Relationships of the Pharisees, Saducees and Essenes : A Tentative Recons-ruction, Revue de Qumran, vol. 11, 1982, pp. 3~461 M. Black, 3, Pp. 774~781/ F.C. Burkitt, Jesus and the Pharisee, 《JTS》 28, pp. 392~3971 John T. Carrol, Luke's Portrayal of the Pharisees, 《CBQ》 50, pp. 604~621/ Louis Finkelstein, The Pharisees The Sociological Background oftheir Faith, I ~ II , Philadelphia : Jewish Publication Society, 1962/ -, The Pharisees and the Men of Great Synagogue, New York, 1950(Hebrew)/ 一, The Pharisees, Philadelphia, 3rd ed., 1963/ L. Gaston, Pharisaic Problems, Approaches to Ancient Judaism, New Series, vol. 3, Historical and Literary Studies, ed. by J. Neusner, 1993, Pp. 85~100/ R.T. Herford, The Pharisees, New York : The MacMiklan, 1924/ T.W. Manson, Saducee and Pharisee The Origin and Significance of the Names, 《BJRL》 22, pp. 144~159/ S. Mason, Pharisaic Dominance before 70 CE and the Gospel's Hypocrisy Charge(Matt 23, 2-3), 《HTR》 83, 1990, pp. 363~381/ -, The Problem of the Pharisees in Modern Scholarship, Approaches to Ancient Judaism, New Series, vol. 3, Historical and Literary Studies, ed. by J. Neusner, 1993, pp. 104~140/ R. Marcus, The Pharisees in the Light of Modern Scholarship, Joumal of Religion 32, 1952, pp. 153~65/ D. Muller, Pharisee, The New Intre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vol. 2, 1976, pp. 810~814/ J. Neusner, From Politics to Piety The Emergence ofPharisa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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