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 유배

流配

〔라〕Captivitas Babylonica · 〔영〕Babylonian Ex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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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유대인들(니느웨 부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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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유대인들(니느웨 부조) .

신(新)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잡는 과정에서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아시리아와 이집트의 통치 아래 있던 많은 도시 국가들을 점령하고 유대 왕국을 침입하여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유대 왕국의 왕족과 상류층 사람들과 전문직에 종사한 사람들을 두 차례에 걸쳐 바빌로니아로 강제 이주시킨 사건.
〔역사적 상황〕 기원전 598년 겨울 느부갓네살이 군대를 이끌고 유대 땅을 침입하여 예루살렘으로 진격할 때 유대 왕국의 왕 여호야킴이 죽고 18세 된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되었다. 그때 바빌로니아 군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하였고 여호야긴은 즉위한 지 3개월 만에 바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 앞에 나가 항복하였다. 유대 왕의 항복으로 예루살렘은 바빌로니아 군대에 의해 파괴되지 않았으나 왕 자신과 그의 신하들과 왕족들, 그리고 수많은 유대 군인들과 전문 직공인들이 바빌로니아로 강제 이주되었으며 성전과 궁전의 보물들은 약탈당하였다.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의 삼촌인 마따니야를 왕으로 세우고 그의 이름을 시드키야로 바꾼 다음 바빌론으로 돌아갔다.
기원전 595년에 시드키야는 바빌로니아에 반대하는 국수주의자들이 득세하는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었는데, 이때 예언자들 중에는 예레미야와 같은 온건주의자도 있었지만 하나니야와 같은 국수주의자들은 바빌로니아가 곧 망한다고 예언을 하며 유배 간 사람들까지도 선동하였다. 이 사건으로 느부갓네살은 많은 유대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예레미야는 그들을 거짓 예언자들이라고 외쳤지만 격변하던 강국의 패권 다툼에 유대 백성들과 왕은 국수주의자들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다. 시드키야는 섭정자였지 왕의 위치는 아니었다. 그 당시 바빌로니아의 행정 문서에 의하면, 바빌론에 강제 이주당한 여호야긴과 그의 다섯 아들은 바빌론 왕실에서 식량 분배를 받았으며, 여호야긴은 유대 왕 칭호를 그대로 간직하고 바빌로니아의 왕으로부터 특별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바빌로니아에 유배 간 유대 사람들은 여호야긴을 유대 왕조의 정통을 지키는 왕으로 인정하였으며, 유대 땅에 남아있던 백성들 중에는 그들과 연락을 취한 사람들도 많았다.
기원전 594년 이집트 왕 느고가 죽고 전쟁 용사인 프사메티쿠스 2세(Psametichus Ⅱ)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에돔과 모압, 암몬, 띠로와 시돈의 대사(大使)들이 비밀리에 예루살렘에 모여 국제 정세를 논의하였는데 그 주요 주제는 바빌로니아와의 관계였다. 이해에 느부갓네살은 팔레스티나 지역으로 두 차례 원정을 하였다. 한편 시드키야는 바빌론을 방문하여 공물을 바치고 그의 충성을 재확인하였다. 그런데 기원전 592년에 이집트 왕 프사메티쿠스 2세가 에티오피아로 원정갈때 유대 군인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아 시드키야는 이집트와 비밀리에 동맹을 맺은 것 같다. 이집트에서 볼 때 유대 땅은 팔레스티나 지역을 다시 이집트의 수중에 넣을 수 있는 중심지였으며, 필요할 때에 프사메티쿠스가도와 줄 것을 확신한 시드키야는 바빌로니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노렸다. 반란이 언제 일어났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기원전 589년 이집트 왕 프사메티쿠스 2세가 죽고 호프라(Hopha)가 왕위를 계승하자 느부갓네살은 반란을 일으킨 유대 왕국을 다시 침입하여 시드키야의 재위 9년째인 587년 겨울에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이집트 사람들은 그들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집트 군대를 파견하여 잠시 예루살렘 포위를 저지하였으나 실패하고, 스스로 방위하던 예루살렘은 굶주림에도 불구하고 586년 여름까지 버티었으나 결국 성벽은 무너지고 도시는 함락되고 말았다. 시드키야는 도망갔으나 곧 붙잡혀 느부갓네살 앞에 끌려 와 그의 자식들은 시드키야의 면전에서 처형당하였고 그의 두 눈은 뽑혀 장님이 된 후 사슬에 묶여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유대 왕국의 마지막을 의미하였으며, 바빌로니아 군대는 궁전과 성전의 보물은 물론 도시 전체를 약탈한 다음 가난한 사람들만 제외하고 나머지 백성을 바빌로니아로 강제 이주시켰다(2열왕 25, 8 이하) .
많은 유대 사람들은 바빌로니아 군대가 유대 왕국을 침입하였을 때 이미 다른 나라로 피신하였으며 예루살렘이 무너진 후에 바빌로니아로 유배 간 사람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 군대는 유대 땅을 떠나면서 2년 전에 바빌로니아에 대한 반란을 반대한 온건파의 지도자 게달리야를 유대의 집정관으로 임명하였다. 그 후 도망간 유대 군인들이 미스바에 자리를 잡은 게달리야에게 모여들었고, 게달리야는 소유주가 없는 땅을 경작하면 경작자가 소유주가 될 수 있다는 토지 개혁을 단행하여 유배 가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이 이례 없이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예레 40, 9-10). 그러나 게달리야의 운명은 왕족의 한 사람이 그를 살해함으로써 집정관이 된 지 52일 만에 끝났으며 유대의 자치제(自治制)는 종말에 이르게 되었다. 미스바 사람들은 바빌로니아의 보복이 두려워 예레미야 예언자를 데리고 이집트로 도망갔는데, 예레미야서 40-44장은 이 비참한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7년 동안 이집트에 피신하여 살았으나 8년째 되는 해에 느부갓네살이 이집트를 침략하여 유대 사람들을 처형하고 살아 남은 사람들은 바빌로니아로 끌고 갔다.
비록 바빌로니아의 강제 이주 정책이 아시리아의 정책을 모방한 것이었지만, 아시리아처럼 두 곳의 주민들을 서로 바꾸는 강제 이주 정책이 아니라 점령된 지역에서 상류층 사람들과 전문 직공들과 건축 사업에 부역할 수 있는 중산층 사람들만을 바빌로니아로 데려갔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은 폐허가 된 유대 도시를 그대로 버려 두고 오히려 이집트와의 완충 지역으로 삼았기 때문에 50여년이 지난 후 페르시아 제국이 바빌론을 점령하고 바빌로니아로 강제 이주된 사람들을 그들의 고향으로 되돌아갈수 있게 하자 일부의 유대 사람들은 유대 땅으로 돌아와 그들의 선조들이 소유했던 농토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바빌로니아에 유배 간 유대 사람들을 정착시킨 곳은 주로 폐허가 된 도시였으며 대부분이 농사일에 종사하였다. 기술공이나 숙련공들은 바빌론의 도시 개축 사업에 불려가 바빌론의 성벽을 쌓고 신전과 궁전, 지구라트를 짓는 일 등에 종사하였다. 기원전 597년에 처음으로 여호야긴과 함께 유배되어 왔던 사람들은 곧 바빌로니아가 망하고 그들은 유대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바빌로니아 제국은 더욱더 강해져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이집트 세력을 물리치고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더구나 이집트에 동조하였던 유대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나머지 백성들도 바빌로니아로 강제 이주되자 유대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유대 민족이 오직 회개하고 속죄하는 길만이 더 큰 재앙을 면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구할 주 있다고 외쳤다.
한편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드릴 수 없었던 유대의 지도자들은 함께 모여 기도문을 읽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회당을 세워 안식일을 지키기 시작하였으며, 토라 학교를 세워 토라의 법규를 열심히 가르쳤다.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 군대가 바빌론을 점령하고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바빌론의 왕이 되자 그 동안 바빌로니아로 강제 이주되어 왔던 모든 외국인들은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를 얻었으며, 유대 사람들도 유대 땅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이때 유대 땅으로 돌아온 유대 사람은 일부였고 많은 유대 사람들은 근 50여 년 동안 그들의 생업을 누리고 있었던 바빌로니아에 머물렀다. 그 후 점차 회당이 늘어났고 토라 학교가 많이 생겼으며 이렇게 시작된 바빌로니아의 유대 지식인들의 학문적 토대로 기원전 1세기의 힐렐(Hilel과 아키바(Akiba) 같은 위대한 토라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기원전 500년 경에 완성된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유대교 법과 규례, 또한 수백 년 동안 구전으로 내려오던 많은 랍비들과 현자들의 논쟁 등을 망라하여 수십 권으로 편집된 것으로, 이러한 방대한 전집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
들의 선조들이 바빌로니아에 토라 학교를 세워 그들의 전통을 지키고 발전시켰던 바빌로니아의 토라 학자들의 노력의 결실이다.
〔예언자들〕 바빌로니아 유배에 대하여 이스라엘의 여러 예언자들은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고 매우 열성적으로 비판하였다. 그 당시 주요 예언자들은 이사야서 40-55장에 나오는 제2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하깨, 즈가리야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의 비판적이며 건설적인 조언과 충고는 후대 유대교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바빌로니아에 유배된 이스라엘의 지식인들은 외국인들 가운데 집단 거류민으로 살면서 자신들의 조상의 전승을 다시 찾아 자기 민족의 주체성을 회복할 계기를 만들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국가와 성전이 없는 민족에게 조상의 땅으로 돌아갈 확신과 희망을 이야기했다.
바빌론 유배가 야훼의 심판이라고 선포한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그 함락이 가까운 때에 부동산을 매입(買入)함으로써 미래에 희망을 거는 그의 확신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고 언젠가는 "사람들이 이 땅의 집과 농토와 포도밭들을 다시 사게 되리라"고 선포하였다(예레 32, 6-15). 그리고 유배 이후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그들이 유배 생활 중에 안식일을 지키고 작은 성소(회당)를 세우기 시작하였다(에제 11, 16)는 것이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이스라엘 땅에서 행하였던 축제일을 지키고 종교법을 더욱 자세히 해석하여 민족의 유대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근동의 중심지인 바빌로니아 같은 부유한 나라에 거주하였던 많은 유대 사람들은 주변의 생활과 관습에 동화되기도 하였다(에제 20, 32-33). 유배 생활에 익숙해진 유대 사람들은 이러한 예언자들과 지도자들의 충고와 조언에 귀를 기울이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회개의 삶을 살기 시작하였으며,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다(에제 33, 11 이하). 또한 절망에 빠져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에제키엘은 그가 계곡에서 마른 뼈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본 환시(vision)를 이야기하면서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내가 이렇게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에제37, 12-13)고 선포하였다. 후대 탈무드 학자들은 "하느님은 그의 분노를 나무와 돌에 쏟으시고 그의 민족을 아끼셨다" 라고 전한다. 에제키엘과 같은 지도자들의 활동은 유배 생활을 하던 유대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유대사람들은 바빌로니아로 유배 가기 이전 세대의 사람들이 우상 숭배를 하였기 때문에 하느님이 분노하여 이방인들로 하여금 성전을 파괴하도록 하고 자신들은 유배 가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바빌로니아로 유배간 유대 사람들은 그들과 그들 선조들의 죄를 회개하고 죄를 짓지 않도록 종교법을 더욱 자세히 실제 생활에 적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유대 사람들도 그들의 고향 땅으로 돌아가 성전을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에즈 1, 1-4). 이 사건에 대하여 예언자 이사야(제2 이사야)는 야훼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해방시킬 구원자로 고레스를 선택하였다고 예언한다. "나는 예루살렘에게는 '사람들이 살지어다' 하고 유대의 성읍들에 대하여는 '이것들은 재건될 것이며 그 폐허들을 내가 복구하리라' 고 말한다. 나는 깊은 물에게 '말라 버려라. 너의 물줄기들을 내가 메마르게 하리라' 고 말한다. 나는 고레스에 대하여 말한다. 그는 나의 목자. 그가 나의 뜻을 모두 성취시키며 예루살렘을 두고 그것은 재건되고 성전은 그 기초가 세워지리라고 말하리라”(이사 44, 26-28). 또한 고레스는 유대 사람들이 유대 도시로 돌아가 성전을 짓는 데 사용하라고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약탈해갔던 예루살렘 성전의 금은 접시 등 성전 도구들을 유대왕자 세스바쌀에게 넘겨주었다(에즈 1, 9-11). 세스바쌀의 인도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남녀 종을 제외하고 모두 42,380명이었으며 예루살렘 성전 터에 제단을 쌓고 성전의 기초를 놓았다. 그 후 예루살렘 성전의 개축을 반대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로 성전 개축 사업이 중단되었으나, 예언자 하깨나 즈가리야 등의 노력으로 성전의 기초를 놓은 지 약 20년 후인 기원전 515년에 성전을 완성하여 봉헌식을 올리고 그곳에서 과월절 행사를 거행하였다. 이후에도 바빌로니아에 남아 있던 많은 유대 사람들이 돌아왔으며 그 당시의 역사를 상세히 기록한 에즈라나 느헤미야도 이때에 돌아온 지식인들이다. 기원전 458년 예루살렘에 돌아온 에즈라는 많은 유대남자들이 외국인 여자들과 결혼한 것을 통탄하여 성전에서 단식하며 야훼에게 그들을 용서해 주시라고 간구하였고, 많은 유대 사람들은 이혼을 약속하였다(에즈 9-10장). 에즈라는 모세의 법을 가르칠 선생들이 부족한 것을 깨닫고 학자들을 여러 도시로 보내 모세의 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에즈라보다 약 13년 후에 돌아온 느헤미야는 온 주민의 협력으로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을 개축하고 성문을 만들어 외부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게 하였다(느헤 6, 15 이하). 또한 그 당시 유대 사람들이 안식일에도 물건을 나귀에 실어 나르며 짐을 지고 성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안식일에 성문을 닫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라고 하였다(느헤 13, 15-22). 이렇듯이 에즈라와 느헤미야는 사람들의 일상 생활에 모세의 법을 잘 지킬 것을 강조하여 그들의 전통은 다음 세대부터 시작되는 유대교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 바빌론)

※ 참고문헌  H. Tadmor, The Period of the First Temple, the Baby-lonian Exile and the Restoration, H.H. Ben-Sasson ed., A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London : Weidenfeld and Nicholson, 1976, pp. 139~ 182. 〔曹哲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