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크인

〔영 · 프〕Basques · 〔스〕Vasc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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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반 모양에 십자가를 그려 넣은 바스크인의 묘비.

원반 모양에 십자가를 그려 넣은 바스크인의 묘비.

스페인과 프랑스의 경계를 이루는 피레네 산맥 서쪽 대서양변의 기슭인 바스크 지방에 사는 민족. 이들이 사는 지역을 스페인에서는 '바스크국(國)' 이란 의미로 파 이스 바스코(PaisVasco) 혹은 바스콘가다스(Vascongadas)라고 부르고, 프랑스에서는 페이 바스크(Pays Basque)라고 부른다. 전체 바스크 지방의 80%는 스페인에, 나머지는 프랑스에 속해 있다. 인구는 약 300만 명(1990)이며, 총면적은 7 254km²이다.
〔지리 · 산업〕 바스크인들은 스페인령에서는 기푸스코아(Guipúcoa) · 비스카야(Vicaya) · 알라바(Alava) 등 3개 주와 나바라(Navarra) 자치 주에 거주하며, 프랑스령 에서는 라부르(Labourd) · 바자 나바라(Baja Navarra) · 술(Soule) 등 3개 주에 모여 산다. 프랑스쪽은 피레네 산맥 북서쪽 기슭의 해발 2,000m 이하의 구릉 지대이며, 날씨는 따뜻하지만 습기가 많아 양 · 젖소 등의 목축과 옥수수 · 포도 등을 경작한다. 대서양 비스케이(Biscay) 만의 해안에서는 어업과 관광업이 활발하며, 공업은 중심 도시 바욘(Bayonne)에 집중되어 있다. 피레네 산맥 남서쪽의 스페인 지역은 피레네 산맥과 칸타브리아 산맥 사이의 구릉 지대로 거의 1,500m 이하에 위치한다. 온화한 서안 해양성 기후로 목축과 낙농업이 발달하였고, 스페인 북부 최대의 도시 빌바오(Bilbao)를 중심으로 하는공업 지대에 인구가 밀집해 있으며, 금속 · 기계 · 화학 등의 중공업이 발달하였다.
바스크의 산악 지방에는 광산물이 매우 풍부하다. 높은 산이 많아 내륙은 겨울에 눈이 많이 오고, 해안 지방은 일 년 중 160일 이상 비가 오며, 바람은 대개 대서양 에서 불어오는 북서풍이 주류를 이루고, 우기(雨期)는 늦가을에서부터 초겨울까지이다. 빌바오와 산 세바스티안(San Sebastián) 같은 천연의 항구가 있다.
〔성 격〕 바스크인은 매우 독특한 민족적 성격을 띠고있다. 일반적으로, 바스크인의 성격은 충직하고 곧으며 자존심과 인내심이 강하다. 그들은 독립성이 강해서 민 족주의자들이 많은 반면, 낙천적이고 유머가 많으며 매우 깊은 종교심을 지니고 있어 스페인 성직자 중 상당수가 바스크 출신이다. 그들은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주의
자이며 성격이 단순하면서도 용감한 편이다. 반면 그들의 문학에선 자유로운 상상력과 시적 감각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그리고 도덕은 보편적 규범보다는 가족이나 지역 공동체의 독특한 전통에 더 의지한다. 그들의 약점으로는, 인종적 우월주의가 강하여 매우 폐쇄적인 사회를 이루며 타민족이나 이방인에게 쉽게 적대감을 드러낸다. 단순하면서도 돈독한 성격으로 인해 바스크인들은 많은 종교인과 철학자를 탄생시켰는데, 성 프란치스코사베리오(San Francisco de Javier, 1506~1552)와 예수회의 창설자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San Ignacio de Loyola, 1491~1556)가 대표적인 바스크 종교인이며,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살라망카 대학 총장을 지냈던 우나무노(Miguel de Unamuno, 1864~1936)와 작가 겸 사상가 바로하(Pio Baroja, 1872~1956)도 바스크 출신이다.
〔기 원〕 바스크인의 기원은 인종학적 · 언어학적 · 고고학적 측면에서 전문가들 사이에 많은 논란을 일으켰고, 아직도 완전히 해명되지 않은 난제에 속한다. 바스크 지방은 오랫동안 폐쇄된 사회를 구성하였기 때문에 외부의 발달된 문화와 종교가 침투되지 못한 이교 지역(異敎地域)으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바스크 지방에는 고대의 비명(碑銘)이 거의 전무한 상태이고, 그들의 고대 역사는 자체 내에서 기록되지 않았으며, 외부인에 의해 기록되지도 않았다. 또한 초기 바스크인들은 주로 깊은 산악 지대에 흩어져 살아서 유물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바스크인들은 기원전 3~4세기경 스페인의 에브로(Ebro) 강을 따라 올라와 리오하(Rioja) 지방을 거쳐 현재의 피레네 산맥 서안에 정착한 것으로 여겨진다. 바스크인들은 인도 유러피언(Indo-European)계 토착 인종으로서 켈트족의 침입에 맞서 싸우면서 고유의 전통 문화를 수호하였으나, 바스크 남부 지방의 아우트리곤(Autigon)족은 켈트족의 지배를 받아 그들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기원전 2세기에 로마의 장군 카톤(Caton)은 이베리아 반도의 원주민 이베로족과 켈트족의 연합군(Celtibero)을 정벌하기 위해 바스크인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 전쟁에서의 승리의 대가로 바스크인들은 피레네서쪽 일대에 광범위한 바스크국을 세우고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역 사〕 바스크인들의 기록이 남겨지기 시작한 것은 로마의 카톤 장군과 접촉한 이후부터이다. 로마는 교통의 요지인 지금의 팜플로나(Pamplona)에 폼페요폴리스를 세우고 해안 지방에는 병영을 건설하여 로마 제국의 군사적 · 상업적 통로를 지켰다. 로마의 대학자 플리니우스(Plinius Secundus)의 《박물지》(博物誌)와 프톨로메우스(Claudios Ptolomeus)의 글에 바스크 지방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그 글에는 현재의 영토보다 조금 더 넓은 땅들이 바스크국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예로부터 광물이 많이 생산되어 로마도 여기에 제련소를 만들고 무기 공장을 세웠다.
게르만 민족의 남하(南下)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이베리아 반도는 서고트족이 점령하여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바스크인들은 서고트인들에게 끝까지 저항하 여 자신의 영토를 지켰으며, 게르만 민족인 남쪽의 서고트족과 북쪽의 프랑크족 사이에서 끊임없이 시달리면서도 산악 지역의 요충지에서 독립을 유지하였다. 711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 무어인들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하였을 때, 서고트 왕국의 왕 로드리고(Don Rodrigo)는 바스크 남부 팜플로나 성을 포위하였다. 그는 군사를 거두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무어인들에 대항해 싸웠지만 그 힘을 막아내지 못하였고, 이베리아 반도를 침입한 무어인들은 서고트 왕국을 무너뜨리고 북진을 거듭하였다. 그들은 프랑스로 진출하기 위하여 바스크 해안 지방을 통과하였지만 산악 지역에 거점을 둔 바스크국을 정복하지는 못하였다.
1492년 무어인의 마지막 왕조인 그라나다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781년 간에 걸쳐 이슬람교도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였지만, 북쪽의 바스크 지방만은 그들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이 시기 바스크 지방에서 가장 번성하였던 왕국은 나바라 왕국이었다. 곧 이어 서부 해안 지방의 비스카야가 나바라 왕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비스카야 영국(領國, Señorio Vizcaya)이 되었다. 알라바와 기푸스코아 지역의 마을들은 이웃과 합쳐 공동체를 구성하였으며 주로 깊은 산지에서 생활하였으므로, 큰 나라의 간섭을 별로 받지 않았다. 그런데 공동체가 커지면서 그들 사이에 충돌이 생겼으며 영토 싸움은 외세의 개입을 불렀고,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Enrique IV 1425~1474)는 바스크의 여러 영주들을 차례로 복속시켰다. 카스티야에 흡수된 바스크의 각 부족들은 해마다 게르니카(Guernica) 시(市)에 있는 고목나무 아래에 모여 의회를 열었는데, 여기서 다시 힘을 뭉친 알라바, 기푸스코아, 비스카야, 라보르, 수베로아 주(州)들은 정식으로 동맹을 결성하고 카스티야 왕국의 동의하에 자치권을 획득하였다. 이 동맹의 수도는 게르니카로 정해졌고, 이미 하나의 왕국으로 독립한 나바라 왕국은 이 동맹에서 제외되었다. 바스크 동맹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특권은 15세기 후반 카스티야 왕국이 아라곤 왕국과 결합하면서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한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17~18세기 동안 정치적 안정을 통해 바스크 지방은 문화적 ·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하였으며, 18세기에 아스코이티아 기사단(Caballeritos de Azcoitia)을 주축으로 결성된 '바스크국 형제회' 는 각 지역에 많은 학교와 도서관을 세워 문화를 크게 진작시켰다.
〔바스크어〕 바스크인이 사용하는 고유의 언어는 인종의 기원만큼 그 성격이 모호하다. 19세기까지 바스크어는 이베리아 반도 원주민어인 이베로어의 일종으로 여겼다. 그러나 모레노(Gómez Moreno)가 이베로어의 기본 알파벳을 해독해 냄으로써 유전학적으로 두 언어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 후 언어학의 발달에 힘입어 카프카스 어족(Caucasian languages)과의 관계가 유력하게 제기되었다. 오늘날 약 60만 명이 바스크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방언의 차이가 심하고 갈수록 사용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바스크어 사용자의 분포는 동서로는 빌바오에서 마울레온까지 170km에 걸쳐 있으며, 남북으로는 팜플로나에서 비아리츠(Biarritz)까지 60km내외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바스크어로 쓰인 16세기 이후의 문헌이 현재 전하며, 19세기 후반에는 문학 작품이 부흥하였다. 음운은 모음이 5개이며 자음은 마찰음과 파찰음이 많다. 문법적으로는 많은 접사(接辭)를 쓰며 술어 동사는 문장 끝에 사용한다. 형용사는 명사의 뒤에서 수식하며, 명사의 성(性) 구분은 없다.
〔관 습〕 바스크인의 집은 초기에 알프스풍의 나무로 지었으나 차츰 돌집이 주류를 이루었고, 남부 지방에는 벽돌집이 아직도 상당수 있다. 피레네 산악 지방의 집들은 눈 피해를 줄이기 위해 지붕의 경사면이 매우 급하게 되어 있다. 전통을 중시하는 바스크인들은 대개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 제도를 이루고 살면서 전통적인 가정의식을 지켜 왔는데, 특히 결혼식과 장례식은 관습에 따라 성대히 치러진다. 각 가정은 성당에 자신의 묘역을 정해 두기 때문에, 늘 그곳에다 촛불을 켜 놓고 빵 등 식품과 꽃을 갖다 놓는다.
바스크인의 신화에는 마리(여신), 라미악(半人半鳥의 여인), 에이스타를테(사냥꾼), 바소하운(숲의 신), 이렉소(정령) 등이 등장한다. 축제 기간에는 고유의 운동인 펠로타(벽에 공을 치는 경기), 무거운 바위 들기, 통나무 자르기 등이 펼쳐진다. 숲이 우거진 바스크 지역에는 좋은 나무가 많아, 농부들은 겨울철에 주로 가구를 만든다. 부지런하고 뛰어난 기술력과 풍부한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는 바스크인들은 스페인에서 가장 높은 국민 소득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오늘날 스페인 중공업의 50% 이상이 이곳에 몰려 있다. (-> 프랑스 ; 스페인)
※ 참고문헌  Encyclopedia de la Cultura Espaiolal Enciclopedia Laroussel Breve Historia de Espaiia. 〔金洪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