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그〕Παῦλος · 〔라〕Paulus · 〔영〕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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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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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오로.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도.
I . 생 애
예수는 팔레스티나 안에서 활동하면서 주로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예수의 비극적인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 후에 예루살렘에서 창립된 원시 교회도 한동안 예루살렘과 그 주변의 유대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만 전도하였다. 그 후 33년경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대표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자, 박해를 피해 달아난 해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몇몇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는데(사도 11, 19-21), 이것이 이방인 전도의 효시(噶矢)이다. 물론 그전에 필립보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하였고(사도 8, 26-40), 베드로가 가이사리아로 가서 고르넬리오 백부장 가족에게 세례를 베푼 사례가 있지만(사도 10, 34-38), 그러한 전도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것이었다.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 사도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인데, 그들은 1년 동안 함께 안티오키아에 복음을 선포한 이후에(사도 11, 25-26) 지중해 동부 여러 지역에서 전도하였다. 특히 바오로는 세 차례에 걸쳐 광범위한 전도 여행을 하였고(13, 1-21, 16), 그의 노력으로 민족적 · 지역적 종교가 인류 전체를 향한 세계 종교로 탈바꿈하였다.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삶을 철저히 산 그리스도인이면서 지중해 곳곳에 예수를 널리 전한 사도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인생을 관조한 신학자였다.
〔자 료〕 바오로의 생애를 엮자면 우선 그가 손수 쓴 편지들을 참고해야 한다. 역사 비평적 방법론을 따르는 신약학계에서는 데살로니카 전서, 고린토 전 · 후서, 갈라디아서, 로마서, 필립비서와 필레몬서 등 7편을 그의 친서로 간주한다. 그 밖에도 바오로가 썼다는 편지가 6편 있으나 이것들은 바오로가 손수 쓴 편지들이 아니고 그의 제자들이나 그를 존경하는 후학들이 스승의 이름으로 펴낸 작품들이라는 것이 신약학계의 통설이다. 다시 말하면 데살로니카 후서, 골로사이서, 에페소서, 디모테오전 · 후서, 디도서는 가명(假名) 서간이라는 것이다. 이 여섯 작품들이 비록 가명 서간들이기는 하지만 바오로의 사상을 계승한 것들이므로 사료 가치가 친서들보다는 떨어진다 하더라도 바오로 사도의 영향을 밝히려면 반드시 참고하여야 한다.
다른 중요한 사료로 사도 행전을 들기도 하는데, 이는 9장과 13-28장에서 바오로의 회심과 활약상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사도 행전의 필자를 루가로 여기는데 그는 바오로를 만난 적도 없고 수집한 정보 가운데는 오보도 더러 있었다. 특히 그는 바오로의 생애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보다는 예언과 성취의 도식에 따라 구원사를 엮으면서 연속성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루가는 바오로를 묘사할 때도 유대교 율법을 준수한 유대인으로, 가믈리엘 1세의 문하생(사도 22, 3 ; 26, 4)으로, 또 예루살렘 교회의 뜻을 받드는 선교사(사도15, 25-32 ; 21, 20-26)로 기술하곤 하였다.
그런데 사도 행전과 바오로의 편지 가운데 같은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서로 맞지 않는 경우에는 바오로의 편지에 더 역사적 신빙성을 둔다. 그렇지만 바오로는 자신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고 예수를 알리는 데 전심 전력 하였으므로(2고린 4, 5) 그의 친서들을 가지고 그의 생애를 엮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루가는 사도 행전 9장과 13-28장에서 바오로의 활약상을 일관된 이야기로 꾸며 놓아서 사도 행전에 따라 바오로의 활약상을 서술하기란 비교적 쉬운 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오로의 생애를 서술함에 있어 흔히 사도 행전을 많이 따르게 된다. 바오로에 관한 사료들을 포괄적으로 참조하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제법 밝힐 수 있다. 물론 완벽하게 밝히기는 불가능하지만 신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람이 바오로이다.
〔초기 생애〕 출생 연대와 출생지 : 33년경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사울로라는 젊은이"가 스테파노를 돌로 쳐죽이던 사람들의 겉옷을 맡았다고 한다(사도 7, 58). 그리고 바오로는 55년경 에페소에서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에서 노인으로 자처한다(필레 1, 9). 바오로의 출생 연대 또는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곳은 이렇게 두 구절뿐인데, 젊은이와 노인의 기준이 매우 모호한 까닭에 이런 표현들을 근거로 바오로의 출생 연대를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학계에서는 흔히 5~1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막연하게 추정할 뿐이다.
바오로는 당시 문화 ·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 다르소(Tarsus)에서 태어났는데(사도 9, 11 ; 21, 39 ; 22, 3), 그곳은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고 스토아 학파의 유명한 철학자들이 활약했던 곳으로, 기원전 64년 로마에 병합되었고 기원전 57년에는 길리기아(Cilicia) 속주의 수도로 승격되었다. 다르소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이민을 와서 정착하고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바오로는 태어나고 성장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는 그리스어와 셈족어를 비롯하여 그 문화들을 익힐 수 있었다.
가족 관계 : 바오로의 출생 · 할례 · 성장 · 처신 등을 살펴보면 그는 독실한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으며 철저한 바리사이로 처신하였다(갈라 1, 13-14). 바오로는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자처하였는데(로마 11, 1; 필립 3, 5-6), 당시 제관이나 레위가 아닌 평신도 유대인들은 유다 지파 아니면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자처하였다. 특이한 점은 그의 부모가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바오로는 태생 로마 시민이었다는 사실이다(사도 16, 37-38 ; 22, 25-29; 23, 27).
사도 행전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 예루살렘에 유학하여 힐렐 율사의 손자이며 당대 최고의 율사였던 가믈리엘 1세 아래서 율법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22, 3 ; 26, 4). 그러나 이것은 루가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연속성을 강조하려고 만들어 낸 허구라는 설이 우세하다(Betz 193 ; Légasse 35~36). 사실 바오로는 히브리 성서를 알았던 흔적도 없고, 그가 성서를 인용할 때면 늘 70인역을 인용한 사실로 미루어 이 학설은 설득력이 있다. 바오로는 고린토 전서를 집필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밝혀 '홀몸' 이라고 하였는데(1고린 7, 7-8 : 9, 5-6), 이 말은 결혼하지 않았거나 결혼하였지만 부인이 죽었다는 의미도 된다.
이름 : 바오로는 친서에서 자신을 일컬어 언제나 '바오로' 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도 행전 7장 58절부터 13장 7절까지에서는 '사울로' 라고 하다가, 13장 9절에서 는 "일명 바오로라고도 하는 사울로"라고 동일시한 다음에 13장 13절-28장 25절에서는 '바오로' 라고만 하였다. 또한 사도 행전에 세 번(9, 1-19 ; 22, 3-21 ; 26, 9- 18) 나오는 바오로의 회심에서는 그를 일컬어 '사울' 이라고 하였다(9, 4. 17 : 22, 7. 13 ; 26, 14). 이 이름은 베냐민 지파 출신이요 이스라엘 초대 임금인 사울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사울(Σαῦλος)을 그리스어로 음역하면 '사울로' (∑αῦλος)가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오로' 는 로마-그리스식 이름이다. 바오로는 이스라엘 문화와 언어권과 아울러 그리스 문화와 언어권에 살았기 때문에 '사울(로)' 과 '바오로' 라는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이다.
직업 : 바오로는 전도하면서 스스로 생계비와 전도비를 조달하였다(1데살 2, 9 ; 1고린 9, 4-18). 그는 신자들에게 신세를 지거나 돈 때문에 전도한다는 오해를 받기 싫어하였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였는지 바오로는 밝히지 않았지만 51~52년경 그가 고린토에서 전도할 때 아퀼라와 브리스킬라 부부와 함께 천막 짜는 일을 하 였다(사도 18, 3). 49~50년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가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할 때, 이 부부는 고린토로 쫓겨와서 살다가 바오로의 전도에 큰 도움을 준 유대 계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바오로는 신자들에게 신세 지는것을 싫어하였지만 필립비 신자들이 주는 도움만은 기꺼이 받아들였는데, 그 까닭은 그들만은 바오로의 무사 무욕(無私無欲)한 본심을 늘 믿었기 때문이었다(필립 4, 10-20 : 2고린 11, 9) .
건강 : 회심 전의 건강 상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그가 지중해 각지에서 전도할 무렵 만성적인 지병을 앓았던 것만은 틀림없다(갈라 4, 13-14). 50년경 제2차 전도 여행 때 바오로는 오늘날의 터키 중부에 위치한 갈라디아 지방을 그냥 지나칠 작정이었으나 뜻밖의 발병으로 한동안 그곳에 머무르면서 여러 교회들을 창설하였다. 바오로는 43년경에 몰아경에서 계시의 말씀을 들은 이후 고질병을 앓게 되었는데(2고린 12, 7-9), 갈라디아 지방 교우들이 바오로에게 큰 심려를 끼치자 그는 편지를 보내 "앞으로는 아무도 내게 괴로움을 끼치지 마십시오. 나는 내 육체에 예수의 상흔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 6, 17)라고 그의 상태를 표현한다.
성격과 언변 : 바오로는 유대교를 믿을 때도 남달리 철저하였고 회심한 다음에는 예수를 열성적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린토 교우들로부터 말주변이 없다 는 평을 받았고(2고린 10, 10), 자기 스스로도 눌변을 시인하였다(2고린 11, 6 : 참조 : 2, 7). 그의 필력에 대하여 살펴보면 그를 비판하는 고린토 교우들조차도 "그의 편 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다"라고 평가하였다(2고린 10, 10). 바오로의 편지는 그의 신앙 체험에서 우러나왔으므로 호소력은 있지만, 수사학적 논리나 기교를 부리
지 않았으므로 짜임새가 부족하고 앞뒤 문맥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가끔 있다. 125년경에 쓰여진 베드로 후서에 보면 바오로의 편지들 가운데 난해한 곳이 있다고 하 였다. "이 편지들 안에 알아듣기 어려운 대목이 들어 있는데 무식하고 경박한 자들은 저 다른 성경(말씀)들을 곡해하듯이 그런 대목도 곡해함으로써 스스로 멸망에 이릅니다" (2베드 3, 16). 바오로는 에페소 감옥에서 필립비교우들 및 골로사이 교우들과 필레몬에게 편지를 쓸 때는 손수 썼지만, 다른 경우에는 대필을 시켰다(갈라 6, 11; 1고린 16, 21 ; 로마 16, 22 : 참조 : 2데살 3, 17 : 골로 4, 18).
성장 배경 : 바오로가 자라면서 받은 영향은 유대교, 그리스 문화, 로마 정치 배경이다. 유대교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바오로는 독실한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철저한 종교 교육을 받았고(필립 3, 5 ; 갈라 1,14)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평신도 단체인 바리사이파에 가입하였다(필립 3, 5 ; 사도 23, 6 : 26, 5). 그의 그리스 문화 배경을 살펴보면, 그는 그리스 견유학파와 스토아 학파에서 애용한 '디아트리베' (διατριβή) 논법을 즐겨 사용하였는데, '디아트리베' 는 반대자의 반론에 맞서 상대방을 2인칭으로 부르면서 독설을 퍼붓는 논법이다(갈라 5-6장 ; 1고린 9장). 바오로가 사용한 낱말들은 히브리어와 아람어에는 없는 그리스 단어들 예를 들면 자유, 양심, 자연, 덕, 의무, 시민권, 입양(入養), 이성(理性) 등이 자주 나온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운동 경기를 하지 않았는데 그는 그리스 경기 종목에 속하는 경주와 권투의 예를 들곤 하였다(1고린 9, 24-27 : 필립 2, 16 ; 3, 13-14). 로마 정치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바오로는 태생 로마 시민으로 시민권에 따르는 특전을 누렸다. 로마 시민이 고문을 통하여 심문을 당하지 않는다는 규정은 '포르치아법' (Lex Porcia)에 나오는데 바오로가 필립비에서 매질을 당한 후에(사도 16, 3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매질을 당할 위험에 처하자(사도 22, 25) 자신의 로마 시민권을 내세워 항의하였다. 또 로마 시민이 지방 관청의 재판을 불신하는 경우에는 로마 황제의 재판정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는데, 60년 가을 페스도 총독이 바오로를 유대 최고 의회에 넘기려 하자 바오로는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였다(사도 25, 6-12).
교회 박해 : 회심 이전에 바오로는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여겼기에 율법 실천과 연학에 몰두하였다(갈라 1, 13-14 ; 필립 3, 5-6). 그러므로 그는 율법을 비판한 예수(마태 5, 21-48)를 용납할 수 없었고 율법과 성전 체제에 도전하다가 처형된 예수는 "저주받은 자(갈라 3, 13)이지 메시아일 수 없다고 확신하였다. 더구나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은 더욱 납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부활은 역사의 종말에 있을 미래 사건이지, 역사 한가운데서 일어난 과거 사건일 수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다혈질인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하는 데 앞장섰다(갈라 1, 13. 23 ; 1고린15, 9 ; 필립 3, 6). 그가 박해한 그리스도인들은 토박이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아니고 율법과 성전에 대해 비판적인 헬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었다(사도 6, 11-14). 사도 행전에 따르면 그는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자인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가담하였고(7, 58-8, 1), 시리아 지방의 다마스커스 교회를 박해하기 위해 그곳에 가기도 하였다(9, 1-19 : 22, 3-21 ;26, 9-18).
〔회 심〕 33년경 바오로는 다마스커스 교회를 박해하러 가던 도중에 예수를 뵙고 그리스도인 및 사도가 되었는데, 부활한 예수를 뵙고 그분을 대하는 시각이 한 순간 에 달라진 회심이야말로 바오로의 앞날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싫어하고 예수를 주님으로 선포하는 데 전심 전력한(2고린 4, 5) 사도 바오로는 그 회심 사건을 그저 몇 차례에 걸쳐 간결하게 언급하거나 암시할 뿐이다 (갈라 1, 15-16 ; 1고린 9, 1 ; 15, 8 : 필립 3, 12 ; 2고린 4, 6). 그런데 루가는 세 번에 걸쳐 자상하게 바오로의 회심에 대해 알려 준다(사도 9, 1-19 ; 22, 3-21 ; 26, 9-18).그러나 이 세 번에 걸쳐 나오는 이야기는 바오로 체험담이 아니고 루가가 그 체험을 극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바오로는 회심한 다음 율법과 성전에 대해서 비판적인 신앙 노선을 따르면서, 유대 민족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들에게도 활발히 전도하며 스스로 이방인들의 사도로 자처하곤 하였다. 사도 행전에 따르면 회심한 다음 그는 우선 다마스커스 교회를 방문하여 세례를 받고(사도 22, 16) 설교하였다고 한다(사도 9, 20-22). 그 후에 그는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도 않았고 아라비아로 떠나갔다가 다시 다마스커스 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 3년 후에 나는 게파를 만나 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와 함께 보름을 묵었습니다'갈라 1, 17-18). 바오로는 아라비아에서 나바테야인의 미움을 사서 다마스커스로 피신하였고, 36년경 다마스커스에 거주하던 나바테야인들이 바오로를 체포하려고 하자 극적으로 탈출하여(2고린 11, 32-33 ; 참조 : 사도 9, 23-25) 예루살렘으로 상경해서 보름 동안 게파(베드로)와 함께 지냈다. 36년경 예루살렘 교회의 두 지도자 게파와 야고보를 만난 후 바오로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가서 한동안(36~44경) 전도하였다(갈라 1, 19-24 ; 참조 : 사도 9, 30 ; 11, 25).
그 무렵 스테파노의 순교를 계기로 흩어진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에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전도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회를 창립하였다(사도 11, 19-20).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그 교회를 돌볼 책임자로 키프로스 섬 출신인 사제 바르나바를 파견하였다. 바르나바는 다르소에 있던 바오로를 초빙하여 만 1년 동안(44~45경) 안티오키아 교회를 함께 돌보았는데, 이 사실은 바오로의 서간에는 나오지 않고 사도 행전 11장 19-26절에만 적혀 있다. 바오로는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 지중해 동부 지역으로 광범위한 전도 여행을 하게 되는데, 이때 안티오키아를 전도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예수를 신봉하는 안티오키아 시민들을 처음으로 '그리스도인' 들이라고 불렀다(11, 26).
II . 전도 여행
〔제1차 전도 여행(45~49년경)〕 제1차 전도 여행기(旅行記)는 사도 행전 13-14장에 쓰여 있다. 바르나바와 그의 사촌 요한 마르코(골로 10)와 바오로는 안티오키아에서 서쪽으로 25km 떨어진 셀류기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바르나바의 고향인 키프로스 섬으로 건너가 살라미스와 총독부가 있던 바포에서 전도하였다. 바포에서 승선하여 터키 남부 지역 베르게에 이르렀을 때 요한 마르코는 전도를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사도14, 13),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베르게에서 터키 중부 지 역으로 가다가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렀다(사도13, 14). 사도 행전 13장 14-52절에 따르면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두 안식일에 걸쳐 회당에서 설교하였는데, 이 방인들은 믿었으나 유대인들은 불신하면서 전도사들을 추방하였다. 그들은 이고니온을 거쳐 리스트라에서 전도하였다. 바오로가 리스트라에서 설교하던 중 태생 앉은뱅이를 고쳐 주자, 주민들은 바르나바는 제우스 신이요 바오로는 헤르메스 신이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제사를 바치려고까지 하였다(사도 14, 8-18). 리스트라에 이어 데르베에서 전도한 다음(사도 14, 20-21), 이제까지 전도한지역들을 다시 들러 보살핀 후 아딸리아 항구에서 출발지였던 안티오키아행 배를 탔다(사도 14, 25-26).
예루살렘 사도 회의(49년경) : 제1차 전도 여행 결과 많은 이방인들이 입교하자 그들에게 예수 신앙만을 요구할 것인지 유대교의 율법 준수까지 요구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크게 부각되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예루살렘 사도 회의가 소집되었고, 이 회의에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바오로와 바르나바도 참석하였다. 이때의 합의 사항은 갈라디아서 2장 1-10절에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고, 예루살렘 거주 사도들은 유대인들에게 전도하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며, 예루살렘 모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방계 교우들을 상대로 모금 운동을 펴기로 약속한다는 내용이다(1고린 16, 1-4 ; 2고린 8-9장 ; 로마 15, 25-28). 사도 행전 15장 1-29절에도 사도 회의에 관한 기록이 나오지만 그 결정 사항들이 사뭇 달라 회의에 참석한 바오로의 발언(갈라 2, 1-10)에 더 신빙성을 둔다.
안티오키아 사건 : 갈라디아서 2장 11-14절에 따르면 예루살렘 사도 회의 후에 베드로가 안티오키아 교회를 방문하였는데, 당시 그곳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는 유대인들이고 또 일부는 이방인들이었다. 그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함께 모여 공동체 회식 겸 성찬을 거행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는 두 부류의 신자들이 함께 어울리는 것을 좋게 여겨 손수 공동체 회식 겸 성찬례를 집전하였다. 이런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로 알려지자 소동이 일어났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해선 안된다는 규정을 베드로가 어겼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를 찾아와서 그의 행동을 나무라자 그만 베드로는 겁을 먹고 이방인 교우들과의 회식 겸 성찬을 사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베드로의 영향을 받아 안티오키아 교회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심지어 바르나바조차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를 끊기 시작함으로써 안티오키아 교회가 양분되었다. 이에 바오로는 그곳 교우들 앞에서 공공연히 베드로의 잘못을 꾸짖고 유대인이 이방인과 식사해서는 안된다는 율법 규정 때문에 교회 일치가 파괴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바오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사도 회의의 규정에 따라 교회 일치의 논리를 전개하였던 것이다. 한편 예루살렘 사도 회의와 안티오키아 사건은 제2차 전도 여행 다음에 있었다고 보는 학설도 있다(Légasse, 83-92).
〔제2차 전도 여행(50~52년경)〕 제2차 전도 여행기는 사도 행전 15장 36절부터 18장 22절에 나온다. 바르나바와 요한 마르코는 키프로스 섬으로 가고, 바오로와 예루살렘 출신의 유대계 그리스도인이요 로마 시민인 실라(사도 15, 22. 32. 40 : 16, 37)는 이미 제1차 전도 여행을 한 터키 남부 지역을 다시 찾아갔다. 아마도 다르소의 치드누스 강을 따라 북상하여 47km 지점에서 길리기아 관문을 통과한 다음 데르베를 거쳐 리스트라로 갔을 것이다. 바오로는 리스트라에서 디모테오를 제자로 삼고(사도 16, 1-3), 이어서 오늘날의 터키 수도인 앙카라 주변을 지나가던 중 갑작스런 발병이 계기가 되어 갈라디아 지방에 이방인 중심의 여러 교회를 창립하였다(갈라 4, 13-15 : 사도 16, 6). 트로아스에 이르러 교회를 세운 다음(사도 16, 8-10 ; 20, 6-12) 밤에 계시를 받고서는 에게 바다를 건너 그리스의 항구 도시 네아폴리스에 닿았다(사도 16, 6-11). 그리고 바오로는 그리스 북부 지역 마케도니아에 필립비, 데살로니카, 베레아 교회를, 그리스 남부 지역 아카이아에 고린토 교회를 창설하였고, 네아폴리스에 닻을 내린 다음 에냐시아 국도를 따라 15km 내륙으로 들어가 필립비에서 전도하였다(사도 16, 13-15). 필립비 교회는 바오로가 유럽 대륙에 세운 첫 번째 교회이며, 바오로의 생계와 전도를 물심 양면으로 후원하였다. 필립비 전도 말기에 바오로는 점쟁이 노비에게서 점귀신을 떼어 준 관계로 감옥에 갇혔고, 그 기회에 간수의 가족을 입교시켰다. 필립비를 떠난 바오로는 암피볼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마케도니아의 수도 데살로니카로 가서 전도하였다. 바오로는 관례대로 안식일에 유대교회당에 가서 설교하여 많은 시민을 입교시켰으나, 유대인들이 그의 전도를 반대하자 바오로 일행은 올림푸스 산중에 있는 75km 떨어진 베레아 마을로 피신하였다(사도 17, 1-10 ; 1데살 2, 13-16).
바오로가 베레아 마을에서 전도할 때 데살로니카에 사는 유대인들이 와서 훼방하는 바람에 바오로는 실라와 디모테오를 베레아에 남겨 두고 홀로 아테네로 갔으나(17, 10-15), 당시 정치적 · 경제적으로 몰락하였지만 문화적으로는 수준이 높은 아테네에서의 바오로의 설교는 거의 성과가 없었다(사도 17, 16-34). 실라와 디모테오가아테네로 오자 바오로는 데살로니카 교회 형편을 알아보고 그곳 교우들을 재교육하기 위하여 디모테오를 데살로니카로 보냈으며(1데살 3, 1-5), 바오로는 실라를 데리고 아테네에서 남쪽으로 89km 떨어진 고린토로 가서 18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큰 교회를 세웠다(사도 18, 1-17). 그리고 디모테오가 고린토로 와서 데살로니카 교회의 실정을 보고하자 바오로는 데살로니카로 편지를 써 보냈는데, 이것이 곧 '데살로니카 전서' 이다. 이는 바오로의 편지들 중에서 첫 번째 편지일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를 통틀어 제일 먼저 쓰여진 작품이다.
고린토 전도 말엽에는 유대인들이 바오로를 아카이아 총독 갈리오의 법정으로 끌고 가서 고발하였다. 갈리오 총독은 당대의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형으로서 매우 현명한 사람이라 함부로 종교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사도 18, 12-17). 델피에서 발견된 금석문에 의하면 갈리오는 51~52년 아카이아 총독으로 재직하였고 바오로 역시 같은 때에 고린토에 체류하였으므로 바오로의 연표들 가운데서 가장 확실한 연대이다. 사도 바오로는 겐크레아 외항에서 배를 타고 아시아 지방의 수도 에페소, 이스라엘 총독이 상주하던 가이사리아,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를 거쳐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사도 18, 18-22).
〔제3차 전도 여행(53~58년경)〕 사도 행전 18장 23절부터 21장 16절은 제3차 전도 여행기이다. 바오로는 제 2차 전도 여행 때 설립한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을 돌 본 다음 아시아 지방의 수도 에페소로 가서 27개월 가까이 활약하였다(사도 19, 8-10 ; 참조 : 20, 31). 에페소에서는 전도가 잘되었고(1고린 16, 9), 바오로는 제자 에바프라를 시켜 에페소 동쪽 500리쯤에 위치한 골로사이, 라오디게이아, 히에라폴리스에 교회를 세웠다(골로 4, 13). 또 갈라디아 지방의 여러 교회에 유대주의를 부르 짖는 그리스도인들이 설친다는 소식을 듣고는 '갈라디아서' 를 써 보냈다(갈라 1, 6-10). 에페소에서는 고린토 교회로 편지를 3통 써 보냈는데, 첫째 편지(1고린 5, 9. 10)는 분실되었고, 셋째 편지(눈물 편지, 2고린 2, 4 ; 7, 8)는 편린만(2고린 10-13장) 전해 오며, 단지 둘째 편지만 고린토 전서로 전해진다. 또한 에페소의 로마군 부대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는 동안(필립 1, 13 : 2고린 1, 8-10) 필립비 교회에, 그리고 골로사이 교회의 신자 필레몬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감옥에서 석방된 후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고린토 교회로 넷째 편지를 써 보냈는데(2고린 2, 12-13 ; 7, 5-7 ; 사도 20, 1), 그것이 고린토 후서 1-9장이다. 마침내 바오로는 에페소를 떠나 마케도니아를 거쳐 고린토로 가서 석 달 가량 머무르는 동안(사도 20, 3) 자신의 사상을 총정리해서 로마 교우들에게 보냈는데, 이것이 '로마서' 이다. 고린토 교회에서 로마서를 집필한 다음 58년 필립비 교회로 가서 과월절을 보내고(사도 20, 6), 에페소 남쪽에 자리잡은 항구 도시 밀레도스, 두로,하이파, 가이사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사도20, 7-21, 6).
〔체포와 구금(58~63년경)〕 바오로가 상경하여 성전에서 체포되기까지의 경위는 사도 행전 21장 17-36절에 적혀 있다. 아시아 출신 해외 유대인들이 나지르 서원 제사를 바치려고 성전에 온 바오로를 알아보고 민족과 종교의 배신자로 규탄하고 그를 폭행하였다. 다행히 성전 북부에 주둔한 로마 군인들이 구해 주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나, 안티바드리스를 거쳐(사도 23, 31) 지중해변 가이사리아 총독부 감옥으로 이송되어 미결수로 2년 동안(58~60) 갇힌 몸이 되었다(사도 23, 12-24, 27). 바오로는 총독의 재판이 불리하게 진행되자 로마 시민권을 내세워 황제에게 상소하였다(사도 25, 1-12). 그리하여 바오로는 로마로 압송되었는데, 사도 행전 27장 1절-
28장 15절에 압송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60년 가을(사도 27, 9) 가이사리아를 떠나, 그레데 섬을 거쳐(사도 27, 8-12) 항해하다가 파선하여 구사일생으로 멜리데 섬에 상륙하여 겨울 석 달 동안 그곳에서 지냈다(사도 28, 11). 61년 봄 다시 배를 타고 시실리 섬을 거쳐 나폴리 만에 있는 보디올리 포구에 닿아 육로로 로마에 도착하였다. 로마에서는 경비병 한 사람의 감시를 받기는 하였지만 (사도 28, 16) 셋집을 얻어 자유롭게 손님을 맞아들이면서 2년 동안 지냈다(사도 28, 30-31). 사도 행전의 바오로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58년 봄 고린토에서 로마서를 쓸 때부터, 바오로는 예루살렘과 로마를 거쳐 스페인에 가서 전도하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로마 15, 24. 28). 글레멘스 1세 교황(90/92~101)이 95년경 고린토 교회로 써 보낸 편지(5, 1-6, 1)를 보면, 바오로가 스페인에 가서 전도한 후에 다시 로마로 와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64년 7월 19일 네로 황제가 로마시에 불을 지르고 나서 여론이 좋지 않자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4년 동안(64~68) 모질게 박해하였는데(타치투스, 《연대기》, 15, 44), 이 박해 때 바오로와 베드로가 순교하였을 것이다. 테르툴리아노에 따르면 베드로와 바오로는 네로 박해 때 순교하였는데, 베드로는 예수처럼 십자가형을 받았고 바오로는 세례자 요한처럼 참수형을 당하였다고 한다(Depraescr. haer. 36, 3 : Adv. Marc. 4, 5 ; Scorp. 15, 3). 전설에 의하면 바오로는 로마 남문 밖 교외에 있는 지하수가 세 줄기 솟아나는 트레 폰타네(Tre Fontane)에서 순교하고, 그 근처 현재의 바오로 대성전(San Paolo Fuori leMura) 자리에 묻혔다고 한다.
Ⅲ. 바오로의 신학
바오로는 유대교 율법은 폐기되었지만 율법의 기본 원리인 이웃 사랑만은 영구히 유효하다고 하였다(갈라 5, 14 ; 로마 13, 8-10). 그는 이웃 사랑을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이름지었으며(갈라 6, 2), 이방인들이 유대교의 무수한 율법을 지킬 필요는 없지만 그리스도 신앙의 실천으로서 그리스도의 법만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바오로는 다마스커스 교회, 예루살렘 교회, 안티오키아 교회로부터 여러 가지 예수 전승들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한 전승들은 거의 기 록하지 않고, 주로 그분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에 관한 전승들을 서한집에 수록하였다(1데살 1, 9b-10 : 4, 14 : 1고린 15, 3b-5 : 16, 22 : 필립 3, 20). 또한 바오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보다도 광범위하게 그분의 일생을 내용으로 하는 전승들도 수용하였으나 그 안에서 예수의 선재(先在)를 암시하거나 명시하였다(갈라 4, 4-5 ; 로마 1, 3b-4 ; 8, 3 : 1고린 8, 6 : 필립 2, 6-11).
바오로는 자기에게 나타난 부활한 예수를 뽑고 나서 본래 종말 사건인 부활이 예수에게 이미 일어났으니 역사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여겼다. 아울러 예수를 '하느님의 아드님'(1데살 1, 9b-10 ; 갈라 1, 16 ; 4, 4-5 ; 로마 1, 3b-4 ; 8, 3), '주님' (1고린 8, 6 ; 9, 1 : 16, 22 ; 필립 2, 6-11 3, 20), '그리스도' (1고린 15, 3b-5 ; 필립 3, 12 2 고린 4, 6), '구원자' (필립 3, 20)로 섬기게 되었다.
〔바오로의 사상〕 바오로가 쓴 친서는 7편이 전하는데, 이것들을 집필 순서대로 살펴보면 그 사상의 발전 과정을 알 수 있다.
데살로니카 전서 : 바오로가 50년경에 쓴 데살로니카 전서의 내용은 매우 소탈하다. 우선 데살로니카 교우들은, 바오로가 선포한 예수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신조(4, 14)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느님을 믿고 재림할 예수를 믿는 신조(1, 9b-10)를 잘 받아들였다고 한다. 예수 재림 때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교우들에게 바오로는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오실 때 죽은 이들이 부활하여 산 이들과 어울려 다 함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이끌려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하리라고 하면서 교우들을 안심시켰다(4, 13-18). 이는 기원전 200~100년경 사이에 이스라엘에서 유행한 묵시 문학의 생각과 표현을 빌린 것이다.
갈라디아서 : 바오로가 갈라디아에서 에페소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갈라디아 교회들로부터 매우 불길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예수만 믿어서는 구원받지 못하고 유대교도 함께 믿어야만 구원받는다는 이설을 퍼뜨리는 유대계 그리스도인 전도사들이 갈라디아 교회들을 찾아와서 교우들을 현혹한다는 것이었다. 이들 유대계 그리스도인 전도사들은 할례와 율법 준수를 교우들에게 요구하였는데, 교우들은 이단자들의 감언이설에 기우는 형국이었다(1, 6-7 : 5, 1-16). 바오로는 격정에 사로잡혀, "어떠한 사람도 율법의 행업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통해서만 의롭게 된다" 고 하였다(갈라 2, 16-21 : 3, 2-5. 10-13. 18-25 : 5, 4 : 6, 13).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에(2, 4-5 : 3, 26-28 : 4, 21-31 ; 5, 1. 13)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율법과 죄와 육의 노예 가 되는 것이다(2, 4-5 : 3, 22-24 : 4, 4-5. 21-31 : 5, 1-12).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비할례가 무슨 힘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사랑으로 행동하는 신앙 만이 중요하고" (5, 6), "사실 중요한 것은 할례나 비할례가 아니라 새로 창조된 인간입니다"라고 주장하였다(6,15).
바오로는 "누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καινή κτίσις)입니입다”(2고린 5, 17)라고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라는 표현은 갈라디아서에 7번 나오고(1, 22 : 2, 4. 17 : 3, 14. 26. 28 ; 5, 6) 다른 서간에서도 무수히 나오는데, 이 표현의 의미는 문맥에 따라 다양하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그리스도와 바오로 사이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가리킨다.
갈라디아서에는 영에 대한 언급이 여러 번 나온다(3, 1-5. 14 ; 4, 6 ; 5, 16-25 : 6, 1. 7-9). 영은 거룩하고 자애로운 힘으로, 하느님의 힘(1데살 4, 8 ; 1고린 2, 10 : 3, 16 ; 6, 11 : 7, 40 2고린 1, 22 ; 3, 3. 6 : 로마 8, 14)이거나 부활한 그리스도의 힘이다(갈라 4, 6 : 필립 1, 19 ; 로마 15, 18-19 ; 참조 : 2고린 3, 17).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일컬어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영에 따라 거니는 것, 또는 영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라고 하였다(갈라5, 16. 25). 영은 육(3, 3 ; 5, 17), 율법(5, 18), 죄(5, 19-21)와 상반되는 성스럽고 자애로운 능력이다(J. Gnilka,101-107).
고린토 전서 : 바오로는 고린토 교회에서 일어난 파당에 대하여 "바오로가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에 처형되기라도 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바오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라고 반론을 제기하였다(1, 13). 그리고 십자가에 처형된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능력이요 하느님의 지혜라고 주장하였다(1, 18-31). 또 고린토 교우들에게 결혼 · 이혼 · 독신 · 재혼 등 성 윤리를 자세히 설명하였으며(7장), 신전에서 우상에게 제사지낸 고기를 아무 거리낌없이 먹어도 되지만 그 고기를 먹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소심한 교우나 외교인 집주인이 동석한 경우에는 먹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신전에서 음복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10, 1-22). 바오로는 복음 선포를 위해서 교우들로부터 접대받을 권리를 포기하고(9, 1-18) 모든이에게 모든 것이 되도록(9, 19-23) 전심 전력한다고 하였다(9, 24-27).
바오로는 성찬의 유래와 의미를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죽음을 회상하고, 빵과 포도주의 상징으로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기리며, 장차 재림할 주님을 기다리는 잔치로 설명하였다(11, 23-26). 12-14장에서는 성령의 은사 문제를 다루면서 그리스도 신앙 고백을 기준으로 삼아서 참 은사와 거짓 은사를 식별하였으며, 일상적이지만 교회 건설에 크게 기여하는 이웃 사랑(아가페)을 최고의 은사로 여겼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을 근거로(15, 1-11)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밝힌 다음(15, 12-34) 장차 부활할 몸은 영체(靈體)라고 강조하였다(15,35-58).
필립비서 : 필립비 교우들은 바오로가 에페소 주둔 로마군 부대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모금을 하여 에바프로디도(Epaphroditus)를 통하여 보냈다. 바오로는 그를 필립비 교회로 되돌려 보내는 기회에 감사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필립비 교회에는 고린토 교회의 분열상 같은 것은 없지만 교우들간의 갈등이 있었다. 그래서 바오로는 일치를 촉구하고, 일치를 도모하자면 겸손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겸손한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하면서 그리스도 겸허가(2, 6-11)를 인용하였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고 선재하였지만 그 특권을 포기하고 인간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요,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겸허한 처신을 보시고 그분을 우주 삼라 만상의 주님으로 격상시키셨다는 것이다. 바오로의 서간집 가운데 겸허가에 강생 신학이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바오로는 자신의 죽음을 심사숙고하였는데(1, 21-24 ; 2고린 5,1-10), 자신의 처지만 생각하면 곧 죽어 저승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낫겠지만 필립비 교우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출옥해서 그들을 좀더 돌보고 싶다고 하였다.
이단 경고 편지(3, 1b-4, 1)에서는, 할례를 받고 유대교 계율을 지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대계 그리스도교의 수구파 이단을 단죄하였다. 그리고 바 오로는 구원의 방편을 율법의 행업이 아니고 단지 그리스도 신앙이라고 단정하였다. "나는 율법에 의거하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로움,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게 됩니다"(3, 9).
필레몬서 : 필레몬서는 바오로의 서한집 가운데서 단하나뿐인 사신(私信)이고 가장 짧은 편지이다. 골로사이 교회의 책임자는 필레몬이었는데(1장) 그의 노예인 오네시모가 도망을 쳐 에페소 주둔 로마군 부대에 갇힌 바오로와 에바프라를 찾아왔다. 오네시모는 바오로와 에바프라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그리스도 신앙을 익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바오로는 노예 오네시모를 주인 필레몬에게 돌려보낼 때, 필레몬서를 써 보냈다. "오네시모가 한동안 그대를 떠나게 된 것은 영원히 그를 돌려 받을 수 있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이제는 종이 아니라 종보다 나은 이로, 곧 사랑스러운 형제로 돌려 받는 것이니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그를 나처럼 받아들이시오"(1, 15-17).
고린토 후서 : 고린토 후서는 편지 한 통이 아니고 여러 통을 모은 서간집이다. 디도가 마케도니아에 머물던 바오로에게로 와서 희소식을 전하였는데, 고린토 교우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바오로와 화해하기를 원하고 전에 바오로를 모욕한 남자 교우를 처벌하였다는 것이다(2, 5-11 ; 7, 6-16). 이 소식에 화해 편지를 써 보낸 것이 곧 지금의 고린토 후서 1-9장이다. 고린토 후서는 고린토 교회 내부에서 생긴 문제를 다루지 않고, 유대계 그리스도교의 전도사들이 바오로의 사도직과 십자가 신학을 부인함으로써 생긴 양자간의 정통성 문제를 다루었다. 바오로에 따르면 사도직은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에 동참하고(2, 14-4, 6),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4, 7-7, 4).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향기이며(2, 15)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새로운 계약의 봉사자들이다(3, 5-6). 사도직은 영과 의로움의 봉사직이며(3, 3-9) 사도직으로 교회가 창립된다(3, 2-3). 바오로는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를 위한 여러분 의 종으로 선포합니다"라고 하였다(4, 5).
고린토 전서 1장 18절부터 2장 16절에서 십자가 신학을 논한 바 있는 바오로는 이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다시 풀이하면서 이제까지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화해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다(2고린 5, 14-21 : 로마 5,10-11). 그 내용을 살펴보면 하느님은 인류를 당신과 화해시키는 화해의 주재자요,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화해의 중보자이며, 사도들은 화해의 봉사자들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그분의 사랑 행위(愛他行)라고 풀이하였다(2고린 5, 14 ; 갈라 2, 20 ; 로마 8, 39). 바오로는 자신이 겪은 고난을 네 번 나열하였는데, 고린토 전 · 후서 특히 사도직 단락(2고린 2, 14-7, 4)에나온다.
화해 편지(1-9장)보다 먼저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는 눈물 편지(10-13장)에서는 바오로가 자신의 사도직을 부인한 반대자들, 곧 외부에서 고린토 교회로 들어온 유대계 그리스도교 전도사들을 맹렬히 공격하고 그들에게 동조한 고린토 교우들을 꾸짖는다. 눈물 편지를 자세히 읽어 보면 반대자들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반대자들과 고린토 교우들로부터 지독한 수모를 겪은 바오로는 격분을 참지 못하고 본의 아니게 자화자찬을 늘어놓는다(11, 1-12, 13).
로마서 : 바오로는 57년경 고린토 교회에서 모처럼 석달 동안 조용히 지내는 기회에 자신의 신학을 총정리하여 로마 교우들에게 보냈다. 장차 그는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에 들렀다가 스페인에까지 가서 전도할 작정이었다(로마 15, 22-29). 바오로는 자신을 소개하는 뜻에서 그가 설립하지 않은 로마 교회로 이 서간을 써 보냈다. 또한 바오로는 반대자들이 자신을 헐뜯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로마 3, 8 ; 6, 1)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할 필요를 느꼈다. 아울러 예루살렘으로 가면 생명의 위협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에(로마 15, 30-32) 유언 삼아 이 로마서를 썼다. 바오로는 우선 유대계 그리스도교에서 물려받은 신조를 인용하였다. "그분은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부터 태어나셨으며 거룩함의 영으로는 죽은자들의 부활 이후 권능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로 책봉되신 분,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 3-4). 그리고 인간 구원에 관하여 "과연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믿는 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먼저 유대인 그 다음에는 헬라인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느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실상 이 (복음) 안에 하느님의 의로움이 신앙에서 신앙으로 계시됩니다. '신앙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1, 16-17). 이 구원 명제를 이해하자면,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의로움' (δικαιοσύνη θεοῦ)이란 표현을 정확히 밝혀야 한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상반되는 표현은 '하느님의 진노' (ὀργὴ θεοῦ, 1, 18 : 3, 5)이고 같은 표현은 '하느님의 신의' (ἡ πίστις τοῦ θεοῦ, 3, 3)와 '하느님의 진실' (ἡ ἀλήθεια τοῦ θεοῦ, 3, 7)이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예수에 관한 희소식인 복음을 믿으면 죄인을 의인으로 간주해서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서, 이는 오늘날 학자들 (Schlatter, Käsemann, Stuhlmacher, Kertelge, Lyonnet, Fitzmyer) 로부터 큰 호응을 얻은 학설이기도 하다. 인간 구원 명제(1, 16-17)에 이어 나오는 부분은 이 명제의 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유대인 이방인 가릴 것 없이 결코 자력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오로지 '하느님의 의로움' 에 힘입어 구원받는다는 바오로의 주장을 일컬어 의화론(義化論, 또는 義認論, 成義論)이라 한다. 바오로는 의화론을 갈라디아서와 필립비서에서도 언급하였으나, 로마서에서는 이것을 주제로 삼아 가장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방인들인 만민은 본성적으로 하느님을 알면서도 우상을 섬겼으며 태어날 때부터 자연 도덕률을 알지만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진노 대상이 되었다(1, 18-32). 이스라엘 선민은 율법을 알면서도 어긴 까닭에 그들에게도 하느님의 진노가 쏟아 내렸다(2, 1-3, 2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과거에 저질러진 죄들을 너그럽게 보아 넘기심으로써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할례를 신앙으로 의롭게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할례도 신앙을 통해서 (의롭게 하실
것입니다)" (3, 25-30)
바오로는 아브라함부터(4장) 이스라엘이 구원될 때까지(9-11장)의 구원사, 이를 좀더 확대한다면 아담부터(5, 12) 종말까지(2, 5. 16 ; 8, 31-39 : 13, 11-14)의 구원사 를 논하였다. 아브라함은 할례와 율법이 있기 전에 살았지만 오로지 하느님을 돈독히 믿음으로써 의인이 되었다(4, 1-12).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 신 분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다(4, 13-25).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으며 또한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산다(5, 1-11).
사도 바오로는 아담을 예형(豫型)으로 보고 그리스도를 본형(本型)으로 보는 예형론(豫型論, 또는 豫表論)을 이미 고린토 전서(15, 21-22. 45-49)에서 언급하였지만, 로마서(5, 12-21)에서는 더욱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써 온 인류에게 죄와 죽음이 닥쳤지만(5, 12-14),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써 온 인류에게 의로움과 생명이 훨씬 더 넘쳐 흐른다고 하였다(5, 15-21). "결국 한 사람의 범행의 결과로 모든 사람이 단죄에 이르게 된 것과 같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의 결과로 모든 사람이 생명의 의로움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5, 18)
로마서 6장 1-11절의 입교 의식인 세례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신비스런 사건(秘事)이다. 바오로는 세례론에 이어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길게 논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죄에서 해방된 삶(6, 12-23), 율법에서 해방된 삶(7, 1-25), 성령에 의한 삶(8, 1-30)을 누린다고 하였다. 끝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복하여 종말 구원에 대한 확신을 장엄히 읊조린다(8, 31-39).
바오로는 유대인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을 보고 몹시 상심하였다. 그는 이러한 마음을 "나는 혈통상으로 나의 동족인 나의 형제들을 위해서라면 그리스도로부터 갈라져 기꺼이 저주라도 받고 싶은 심정입니다"라고 토로하였다(9, 3). 그런데 바오로는 이방 민족들이 모두 그리스도교로 입교하면 결국 이스라엘 선민도 회개하여 구원받으리라는 희망을 지녔다(11, 25-26).
〔바오로의 구원론〕 바오로는 초창기 교회로부터 물려받은 신조와 시가(詩歌) 등의 그리스도 전승을 중심으로 자신의 신학을 펼쳤다. 그가 수용한 그리스도 신조와 시가를 살펴보면 그 내용은 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선재 사상이 나타나고 재림 사상은 선재 사상보다 훨씬 더 뚜렷하게 나오지만 바오로가 물려받은 그리스도 전승의 핵심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다.
하느님의 의로움 : 바오로는 '하느님의 의로움' 이란 표현을 교회 신조에서 물려받았다(로마 3, 24-26). 이 표현은 바오로의 친서에 9번 나온다(2고린 5, 21 ; 로마 1, 17 ; 3, 5. 21. 22. 25. 26 : 10, 3에 2번). 필립비서 3장 9절에는 이와 비슷한 "하느님에게서 비롯하는 의로움"이란 표현이 한 번 나온다. '하느님의 의로움' 은 인간에 대 한 하느님의 품성인 '하느님의 자비' 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특히 그분의 대속적 죽음으로 드러났고, 사도들의 복음 선포로 선민과 만민에게 알려졌으며, 인 간은 복음 선포를 받아들이는 믿음으로써 그 은혜를 받는다. 동사 '의롭게 하다' 또는 '의롭게 되다' 는 바오로의 친서에 26번 나오는데 갈라디아서에 8번(2, 16에 3번 : 2, 17 : 3, 8. 11. 24 : 5, 4), 고린토 전서에 3번(4, 4 ; 6, 11에 2번), 로마서에 15번(2, 13 ; 3, 4. 20. 26. 28. 30 ;4, 2. 5 : 5, 1. 9 ; 6, 7 ; 8, 30(2번). 33) 나온다. '의롭게 하다' 또는 '의롭게 되다' 의 뜻은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고 인간은 그 자비를 입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점은 '하느님의 의로움' 과 '의롭게 하다' 또는 '의롭게 되다' 속에는 하느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뜻이 함께들어 있다는 것이다(갈라 3, 6 : 로마 4, 5. 6. 11). 이를 감안해서 '의롭게 하다' 를 의역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자비 를 베푸시어 죄인을 의롭다고 선고하시다' 라는 뜻이다.
화해 : 바오로는 이 개념도 교회 신조에서 물려받은
것 같다(2고린 5, 19). 바오로의 친서에는 명사 '화해' (καταλλαγή)가 4번(2고린 5, 18. 19 ; 로마 5, 11 ; 11, 15), 동사 '화해시키다' (καταλλάσσω)가 6번(1고린 7, 11 ; 2고린 5, 18. 19. 20 ; 로마 5, 10에 2번) 나온다.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는 바오로 친서에 26번 나오는 '평화', 3번 나오는 '평화롭게 지내다'가 있다. 속량(속졸임, 값) : 동사 '사들이다' (ἐξαγοράζω)가 갈라디아서에 2번 나오며(갈라 3, 13 ; 4, 4-5), 바오로는 또 고린토 교우들에게 "여러분은 값(τιμή)을 내고 사들인 (ἀγοράζω) 사람들입니다"라고 하였다(1고린 6, 20 ; 7, 23). 사들임과 값 같은 표현들은 노예 주인에게 값을 내고 노예를 양민으로 만드는 속량 행위에서 유래한 것 같다(A. Deissmann). 여기에서 값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 희생을 뜻하고, 그 희생으로 그분은 율법의 노예들을 하느님의 양자로 만드셨다. 자유 : 자유라는 개념은 셈족에게는 없는 반면 그리스인들에게는 지극히 소중한 가치였다. 바오로의 친서에 명사 '자유' (ἐλευθερία)는 7번(갈라 2, 4 ; 5, 1. 13에 2번 ; 1고린 10, 29 ; 2고린 3, 17 ; 로마 8, 21), 동사 '자유롭게 하다' (ἐλευθερόω)는 5번(갈라 5, 1 ; 로마 6, 18. 22 ; 8, 2. 21), '자유로운'과 '자유인' (ἐλεύθερος)은 14번(갈라 3,28 : 4, 22. 23. 26. 30. 31 : 1고린 7, 21. 22. 39 : 9, 1. 19 : 12, 13 ; 로마 6, 20 ; 7, 3) 나오는데, 자유의 개념은 의화론과 관련되어 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받아 의롭게 된 사람은 죄와 율법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누리는 자유는 불완전하다. 그리스도인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때(필립 1, 12-26 ; 2 고린 5, 1-10) 완전한 자유를 누릴 것이다. 이 완전한 자유를 바오로는 '영광' 이라고 이름지었다. 이 밖에도 구원 개념으로 그리스도 안에' 와 '성령' 이 있다.
하느님의 사랑 · 그리스도의 사랑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두고 바오로만큼 심사숙고한 사람도 드물다. 그는 '사랑' 의 관점에서 예수 사건을 풀이하면서 하느님은 사랑의 원천이라고 하였다(로마 5, 8 : 8, 32. 39 ; 1요한 4, 8. 16). 예수는 그 사랑을 목숨 바쳐 이룩하였고 (갈라 2, 20 ; 2고린 5, 14 로마 8, 39 ; 요한 15, 13), 하느님은 그 사랑의 영원성을 예수의 부활로써 드러내셨다. → 바오로 대성전 ; 베드로 ; 사도 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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