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Pau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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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3세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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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3세 교황.

① 바오로 3세(1468~1549) : 교황(1534~1549). 반 종교 개혁의 첫 번째 교황. 본래 이름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Alessandro Farnese) 1468년 2월 29일 카니노(Cani-no)의 저명한 파르네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12세기 이후 이탈리아 역사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 집안으로 볼세나(Bolsena) 호수와 비테르보(Viterbo) 남쪽의 땅을 갖고 있었는데, 그의 할아버지 라누초(Ranuzo)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1431~1447) 치하에서 교황 군대의 주요 지휘관이었으며, 그의 둘째 아들 피에르 루이지(Pier Luigi)는 세르모네타(Sermoneta) 군주의 누이인 조반넬라 가에타니(Giovannella Gaetani)와 결혼을 하여 줄리아(Giulia)와 알레산드로를 낳았다.
알레산드로는 로마에서 레투스(Pomponius Laetus)에게, 그리고 피렌체에서는 메디치 가문에서 인본주의 교육을 받았으며, 훗날 교황 레오 10세가 된 조반니 데 메디치(Giovanni de Medici)와 친분을 맺은 것도 이때였고, 피사(Pisa)에서도 공부하였다. 1492년 로마 교회의 재산 관리자(measurer)가 되었고, 이듬해 9월 20일 교황 알렉산델 6세(1492~1503)로부터 부제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이 임명은 그의 누이인 줄리아가 교황의 애첩이었기 때문이라 하여, 당시 사람들은 알레산드로를 페티코트 추기경' (Cardinal Petticat)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알레산드로는 추기경단의 의장이 될 때까지 율리오 2세(1503~1513), 레오 10세(1513~1521), 하드리아노 6세(1522~1523), 글레멘스 7세(1523~1534) 등 4명 의 교황 밑에서 일을 하였다. 아울러 그는 로마 귀족 부인과의 관계에서 피에르루이지(Pierluigi), 파올로(Paolo), 라누치오(Ranuccio) 등 세 명의 아들과 콘스탄차(Cons-
tanza)라는 딸을 두었다.
1509년 교황 율리오 2세로부터 파르마(Pama)의 주교로 임명된 후 애첩과의 관계를 청산하는 등 사생활을 정리한 그는, 이 새로운 직무에 대한 책임감에서 1519 년에 교구 회의를 개최하고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2~1517)의 개혁 훈령들을 실행에 옮겼으며, 1519년 6월 사제 서품을 받은 후부터는 비난받을 사생활을 하지 않 았다. 1534년 교황 글레멘스 7세가 사망하였을 때, 알레산드로는 추기경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67세였지만 경험과 재치를 인정받아 같은 해 10월 13~ 14일의 교황 선거(conclave)에서 만장 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업적 : 새 교황 바오로 3세는 로마 대학을 복원하고 바티칸 도서관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화가와 건축가들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였다. 특히 문학과 예술을 사랑한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성 시스티나 성당에 <최후의 심판> 벽화를 그리게 하였고, 성 베드로 대성당 설계도를 완성하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교황은 회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누드라고 미켈란젤로를 책망하자 미켈란젤로는 당나귀 귀를 하고 몸에는 뱀이 감겨있는 단죄된 모습으로 교황을 묘사하였다.
당시는 르네상스라는 문화적 경향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 바오로 3세는 교회를 이끌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현대의 역사가들은 교황을 가리켜 첫 번째 개혁 교황' 이라고 칭한다. 물론 그는 1534년 12월에 자신의 손자인 14세 된 알레산드로와 16세밖에 안된 스포르자(Guido Ascanio Sforza)를 추기경으로 임명해 교회 내의 개혁파와 프로테스탄트로부터 불평과 비난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 교황이라고 칭해지는 것은 교회 내부의 많은 부분들을 개혁하였기 때문이다. 1538년 교황은 자신을 영국 교회의 수장이라고 선언한 헨리 8세를 파문시켰고, 또 그 해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알 5세를 설득하여 니스에서 휴전 협정을 조인하게 하였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가톨릭 군주들에게는 루터파의 슈말칼덴 동맹에 반대하여 군대를 일으킬 것을 촉구하였고, 프랑스의 왕에게는 위그노파에 대해 강력한 정책을 펼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재위 초부터 교황은 추기경들에게 보다 절제 있는 생활을 하도록 요청하였으며, 로마 성직자들이 먼저 개혁되지 않으면 나머지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교황의 정책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교회 개혁을 담당할 추기원 회의(consistorium)의 신설이다. 여기에는 피셔(JohnFisher), 폴(Reginald Pole), 훗날 교황 바오로 4세가 된 카라파(Giovami Pietro Caraffa)와 교황 마르철로 2세가 된 체르비니(Marcello Cervini) 그리고 뛰어난 인본주의자인 알레안드로(Girolamo Aleandro), 평신도 콘타리니(GasparoContarini)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회칙 <수블리미스 데우스>(Sublimis Deus)를 통해 교황 바오로 3세는 교회의 상황을 검토하고 개혁을 수행할 위원회의 위원들을 임명하였는데, 폴, 콘타리니, 카라파 등과 약간 명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1538년 1월 자신들의 보고서(Consilium de emendenda ecclesia)를 출판하여 트리엔트 공의회의 기초 자료로 제공하였다. 또한 교황은 1540년 9월 27일 칙서 <레지미니 밀리탄티스 에클레시에>(Regimini militantis ecclesiae)로 예수회를 인준하였고, 1544년에는 우술라회를 인준하였으며, 바르나바회와 테아티노회(Theatines)를 후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소마스카회(Somaschi)의 설립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한편 1542년7월 21일에 교황은 "가톨릭 신앙을 떠났거나 공격하는 이들을 거스르고 이단의 혐의가 있는 이들의 가면을 벗 기기 위해" 로마에 종교 재판소를 세웠으며, 그 다음해에는 금서들을 판매하는 이들에 대해 엄격한 벌을 세우기도 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 : 교황이 수행한 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공의회의 소집이었다. 1536년 6월 2일 교황은 다음해 5월에 만투아(Mantua)에서 공의회를 개최한다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자국(自國)의 성직자들을 공의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결국 교황은 새로운 칙서를 통해 이 공의회를 1538년 5월 1일로 연기하여 비천차(Vicenza)에서 개최한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카알 5세와 프랑수아 1세의 반대로 무산되자, 1544년 11월 19일 칙서 <래타레 예루살렘>(Laetare Jerusalem)을 통해 1545년 3월 15일 트리엔트에서 공의회를 개최한다고 선포하였다. 이 공의회의 첫 회기(1545~1547)에서는 신앙의 규범으로서의 성서의 역할, 정경(正經), 의화, 성사, 원죄 교의 등을 확정하였고 개혁 규범 등도 선포되었다. 1548년 2월에는 전염병과 프로테스탄트 군대의 공격 위협으로 공의회 장소를 볼로냐로 옮겼으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스페인과 독일 지역의 성직자가 볼로냐로 가는 것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2차 회기는 트리엔트에서 1549년 9월에 개최되었다.
〔평 가〕 열병에 걸려 1549년 11월 10일 82세의 나이로 사망한 바오로 3세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전 내에 묻혔다. 교황은 사제 서품 전의 외도와 지나칠 정도의 르네상스 지원, 그리고 자신의 가문에 대해서는 연약함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역사적인 판단은 호의적이다. 그래서 "바오로 3세가 지닌 최고의 미덕은 다각도로 펼쳐진 목소리, 즉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의 목소리에 귀기울였고, 자신의 방식에 따라 그 목소리를 하나로 묶었다는 것이다" 라고 평가되고 있다. (-> 트리엔트 공의회)
※ 참고문헌  C.L. Hohl, 《NCE》 11, pp. 13~14/ James F. Loughlin, 《CathEnc》 J.N.D. Kelly, The Oxford Dictionary ofPopes, Oxford, Oxford Univ. Press, reprinted, 1986/ G. Schwaiger, 《LThK》 8, pp. 198~200/ P. Levillain ed., Dictiomaire historique de la Papauté, Fayard, Paris, 1994, pp. 1263~1268. 〔邊宗燦〕
② 바오로 4세(1476~1559) : 교황(1555~1559) 본래 이름은 조반니 피에트로 카라파(Giovannni Pietro Ca-raffa) . 1476년 6월 28일 베네벤토(Benevento) 부근의 나 폴리 남작 가문에서 태어나 대부분의 교육을 로마에 있던 삼촌 올리비에로(Oliviero Caraffa) 추기경 관저에서 받은 그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하였는데, 그가 훌 륭한 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세 가지 언어에 능통한 것을 보고 에라스무스(Erasmus)가 칭찬하였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또 에라스무스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의 도움을 받았다는 데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카라파 추기경 관저에서 그와 함께 공부한 유명한 인본주의자 사돌레토(Jacob Sadoleto) 추기경도 그의 학덕이 출중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조반니 피에트로는 삼촌의 도움으로 일찍부터 교회 일을 하였다. 1505~1524년 테아데(Theate)라고도 불렸던 압루치(Abruzzi)의 키에티(Chieti) 교구 주교로서 열정적으로 활동함으로써 당시 사람들에게 좋은 표양을 보여주었던 그는, 교구장으로서의 책임을 수행하면서도 베드로 대성전 건립 기금 모금을 위하여 1513~1514년 영 국에 교황 대사로 파견된 데 이어 1515~1517년에는 플랑드르(Flandre) , 1517~1520년에는 스페인에 파견되었다. 이미 교회의 개혁 의지를 갖고 있던 그는 엄격한 개인적 금욕주의를 인본주의적 관심사와 결합시켰고 에라스무스와 계속적으로 연락을 취하였다. 나폴리 사람이었던 그는 당시 나폴리에 대한 스페인의 주도권에 대해 깊은 혐오감을 지니고 있었다.
로마로 돌아온 다음 '하느님 사랑의 오라토리오회'(Oratory of the Divine Love)에 가입하여 자신의 교구에서 남용되고 있는 것들을 개선시켜 나가던 중 1524년에 교황 글레멘스 7세(1523~1534)의 허락을 받아 주교직을 사임하였다. 그리고 엄격한 청빈 생활과 사도들 삶의 방식으로의 회귀, 교회 내에서 남용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쇄신을 목표로 성 가예타노(St. Cajetanus da Thiene)와 함께 테아티노회(Theatines)를 창설하였다. 조반니 피에트로는 재속 사제들로 구성된 이 성직 수도회의 초대 총장을 맡았는데, 이 회의 명칭은 그가 교구장이었던 교구의 다른 명칭인 '테아테' 에서 따온 것이다. 1527년 5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알 5세의 군대에 의해 로마가 침략·약탈되었을 때 로마에 있는 테아티노회 건물이 파괴되자 베니스로 피난간 그는,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가 1536년 12월 22일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여 로마로 부르기 전까지 새로운 테아티노회 건물에 머물러 있었다.
추기경으로 19년 간 활동하면서 스페인과 황제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었고 개혁파의 지도자로서 타협 없는 개혁을 추진한 반면 루터파와의 화해에는 반대하였던 그는, 1542년에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종교 재판소의 책임자가 되어 자신의 성격대로 과격하고 엄격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1549년 2월에는 나폴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550년에는 교황 율리오 3세(1550~155)에 의해 현 신앙 교리성의 전신인 감찰위원회(Romane Univer- salis Inquisitionis Congregatio)의 감찰관(inqusitor generalis)으로 임명되었고, 1553년부터는 추기경단의 의장이 되었다.
1555년 교황 마르철로 2세가 사망하자, 바오로 3세 교황의 손자인 알레산드로(Alessandro Farnese) 추기경은 조반니 피에트로 카라파를 교황으로 당선시키고자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알 5세는 당시 79세의 고령이었던 그를 교황으로 선출하는 것에 반대하였으나, 추기경단은 조반니 피에트로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고, 그는 바오로 3세에 대한 존경에서 자신의 이름을 바오로 4세라고 명명하였다.
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개혁파는 그를 매우 지지하였으나, 황제보다 교황이 수위권을 갖는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던 바오로 4세는 자신의 선임자들이 중립을 지켰던 것과는 달리 이탈리아 안에서 스페인의 영향력을 없애고자 자신의 조카인 카를로(Carlo Caraffa) 추기경을 통해 프랑스와 협상을 맺고 1555년 12월에 스페인과의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나폴리 총독에게 패하여 1557년 9월 12일 스페인과 협상을 맺음으로써 전쟁은 막을 내렸다. 또한 교황은 1555년 9월 25일 독일에서 가톨릭 신자들과 루터파 간의 공존을 인정하였다는 이유로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강화 조약을 비난하였다. 영국의 메리 1세 여왕이 1558년에 사망하자 교황은 후임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 잉글랜드 왕권을 자신에게 복속시킬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로 인해 영국 내에서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1557년 이후 교회 개혁에 주력한 교황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의 사항을 수행하기 위하여 덕망 있는 추기경들을 중심으로 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성직 매매에 대 해서도 타협하지 않았고, 자신의 조카인 카를로 추기경을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쫓아냄으로써 족벌주의(nepo-tism)를 결정적으로 분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주교들은 자신의 교구를 지켜야 하고 로마나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자신의 수도원을 떠나 로마에서 배회하는 수도자들을 체포하도록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또한 미사 경본과 성무 일도를 개혁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교황이 가장 크게 열정을 쏟은 것은 종교 재판소였다. 그는 스페인과 전쟁 중일 때에도 종교 재판소 재판에 참여할 정도였다. 훗날 바오로 5세(1605~1621)가 된 기슬리에리(Michele Ghislieri) 추기경을 이 재판소의 책임자로 임명한 그는 정기적으로 종교 재판소 재판에 참석하였는데, 정통에 대한 그의 열정은 지나칠 정도여서 1557~1559년 모로네(Giovanni Morone) 추기경과 같이 무죄한이가 비정통이라는 거짓 죄목으로 천사의 성(Castel Sant.Angelo) 감옥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또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가 사이의 불화를 막으려고 애쓴 캔터베리 대주교 폴(Reginald Pole) 추기경의 영국 교황 대사직을 박탈한 데 이어 1557년 4월에는 이단 혐의로 로마에 소환하기도 하였다. 감찰위원회를 통해 교황은 금서 목록(Index Librorum Prohibiorum)을 발표했으며, 유대인들이 종교 개혁에 영향력을 발휘하여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교사한다고 오해하여 로마와 교황령에 유대인들의 거주 지역인 게토(ghetto)를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독특한 모자를 쓰고 다니도록 하기도 했다. 1559년 8월 18일 사망하였다.
〔평 가〕 정통 신앙에 대한 교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티즘은 북유럽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교황 자신의 개인적인 열심과 완전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책은 편협하였고 종종 독재적이었는데, 이는 16세기의 정치에서는 채택되지 않은 중세기적 교황권의 개념을 적용하려고 한 탓이었다. 그로 인해 그의 정책은 대중적이지 못하였고 사람들에게는 공포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의 비대중적 정책은 그가 사망하였을 때 보인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로마인들은 그의 동상을 깨버렸고 종교 재판소의 감옥을 열어 교황의 엄격하고도 비대중적 통치가 끝났음을 보여 주었다. 교황의 재위 기간 중 보여 주었던 긍정적 요소가 종교 재판소로 인해 많은 부분이 모호해졌지만, 바오로 4세 교황의 재위 기간은 후대 개혁 교황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준 주요한 시기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비오 5세 교황은 그를 기억하여 로마에 미네르바의 성 마리아(S. Maria sopra Minerva) 성당을 짓고 성당 안에 그의 무덤을 만들었다.
(-> 테아티노회)
※ 참고문헌  H.H. Davis, 《NCE》 11, pp. 14~16/ James F. Loughlin, 《CathEnc》/.N.D. Kelly, The Oxford Dictionary ofPopes, Oxford, Oxford Univ. Press, reprinted, 1986/ G. Schwaiger, 《LThK》 8, pp. 200~202/ P. Levillain ed., Dictiomaire historique de la Papauté, Fayard, Paris, 1994, pp. 1268~1269. 邊宗宗燦〕

③ 바오로 6세(1897~1978) : 교황(1963. 6. 21~1978.8.6). 본래 이름은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 1897년 9월 26일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 콘체시오(Concesio)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아버지 조르지오(Giorgio Montini)는 변호사였는데, 1881~1912년 일간지 <브레시아 시민>(Ⅱ Cittadino di Brescia)의 편집자로서 반교회적 사상과 투쟁하였고, 1919~1926년에는 브레시아의 대표로 의회에 진출하였으며, 어머니 주디타(Giuditta Alghisi)는 교회 여성 운동의 지도자였다. 허약한 체질에 수줍음을 잘 타는 성격이었으나 총명하고 신심이 깊었던 몬티니는 1903~1914년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체사레 아리치 학교(Cesare Arici Institute)에서 공부한 후 아르날도 다 브레시아(Amaldo da Brescia) 고등학교를 거쳐, 1917년 브레시아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집에서통학하였다. 1920년 5월 29일 사제 서품을 받고 같은 해 11월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과 교회법을, 로마 대학에서는 문학을 배웠으며, 1922년부터는 교황청 외교관 학교(Academia dei Nobili
Ecclesiastisi)에서 공부하였다. 1923년 3월 폴란드 바르샤바(Warszawa) 주재 교황 대사의 보좌관으로 파견되었으나 그곳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고 11월에 로마로 돌아와 1년 동안 교회법과 외교학을 연구한 후 1924년 10월부터는 교황청 국무성에서 근무하였다.
1925년에는 이탈리아 가톨릭 학생 연맹(F.U.C.I.)의 지도 신부로 임명되어 파시즘 학생 연맹과 대립하여 싸웠는데, 훗날 F.U.C.I. 회원들은 전후 이탈리아의 정치 · 경제 · 사회 · 종교 지도자로 진출하여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그의 지도 방법이 너무 과격하며 종교적 색채가 적다고 비난하였다. 이로 인해 지도 신부직 에서 물러난 몬티니는 학생들을 위하여 《대학의 양심》 (Conscienza universitaria, 1930), 《그리스도의 길》(La via del Cristo, 1931), 《그리스도 연구 입문》(Introduzione allo studio di Cristo, 1934) 등을 저술하였고, 프랑스 철학자 마리탱(J.Maritain, 1882~1973)의 《세 명의 개혁가 : 루터, 데카르트, 루소》(Tre Riformatori : Lutero, Cartesio, Rousseau)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하여 1928년에 출간하였다. 그리고 1931년부터는 다시 국무성에서 근무하는 한편, 교황청 외교관 학교에서 교황청 외교사를 강의하였다.
1937년 12월 13일 몬티니는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국무성 장관 파첼리(Euginio Pacelli) 추기경의 비서로 발탁되어, 몬시놀로 임명되었다. 1938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Budapest) 세계 성체 대회에 파첼리 추기경이 교황 특사로 파견되었을 때 그를 수행하였으며, 이듬해 그가 비오 12세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는 국무성의 새 장관인 막리오네(Luigi Maglione) 추기경을 보좌하였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 포로 문제 · 전재민 문제 · 유대인 문제 등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였으며, 1944년에는 전쟁으로 인한 무주택자들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 미국의 난민 구호 기관인 미국 가톨릭 복지 협회(N.C.W.C.)와 교황청 사이의 연락 업무를 담당하여 구호 사업을 폈고, 국제 까리따스(Caritas Internationalis)와 국제 가톨릭 이주자위원회 (International Catholic Migration Commission)의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몬티니 신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여러 가지 문제 해결에 기여하였으며, 과학적 · 사회적 발전 문제와 이탈리아를 비롯한 세계 여러 곳의 공산주의 세력 등에 많은 자문을 하였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를 표출하기도 하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 교황청의 역할에 대하여 특히 의견을 달리 하였다. 1950년의 성년 선포와 1954년의 성모 성년 선포 등에 기여한 몬티니 신부를 1952년 11월 교황 비오 12세는 추기경으로 선임하려 하였으나 일부의 반대와 본인의 고사로 포기하고 그 대신 국무성 차관에 임명하였다.
〔밀라노 대주교〕 1954년 11월 1일 밀라노(Milano) 대주교로 임명되어 12월 12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추기경단의 수석 추기경인 티스랑(E. .Tiserant)에 의해 대주교로 서품된 몬티니는, 이듬해 1월 6일 세계적으로 가장 큰 교구 중 하나인 밀라노 대교구에 부임하였다. 본래 밀라노 대교구는 추기경좌였으나 교황청 일부에서 그가 너무 혁신적이라고 견제함으로써 추기경으로 서임되지 못하였다는 소문도 있다. 8년 반 동안의 사목 기간 중 전쟁복구 사업과 산업 발전에 따르는 사회 재구성에 큰 기여를 한 그는, 72개의 성당을 신축하였고, 19개는 건축 중이었으며 32개의 소성당을 새로 지었고, 694개의 본당을 사목 방문하였다. 또한 근로자들을 교회에 이끌도록 노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노동 사제 문제 등에도 관심을 가졌다. 자신을 노동자들의 대주교 라고 부른 몬티니 대주교는, 교회에 등을 돌린 노동자들을 되찾기 위해 복음의 사회적 교리를 설교하였으며, 공장 · 제작소 · 광산 등을 방문하여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고 고용주들에게는 윤리적 의무의 준수를 강조하였다.
그는 평신도 사도직을 양성하기 위하여 '암브로시오사회 학교 (Instituto sociale Ambrosiano)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1963년에는 '성 가롤로 아카데미' (Academia di S.Carlo)를 세워 문화 활동을 적극 격려하였고, 가톨릭 대학교나 신학 대학에서 사회 과학을 강의하도록 권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노조 활동도 적극 지원하였다. 청소년 문제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8편의 사목 교서를 발표하였고 성목요일마다 교구 사제들에게 서한을 보내기도 하였던 그는, 흑백논리를 피하여 신중을 기하였는데 때로는 너무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친다는 비난도 받았다.
1958년 12월 15일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몬티니 대주교는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1960년 여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노트르담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고 브라질을 방문하였으며, 1961년 봄에는 더블린(Dublin) ,1962년 여름에는 남아프리카 · 남부 로데시아 · 나이지리아 · 가자 등에서 활동하는 밀라노 대교구 출신의 선교사들을 방문하였다. 공의회 준비로 격무에 시달렸지만, 1962년에는 준비위원회와 실무적 조정위원회의 임원으로 임명되어 공의회 첫 회기 때 공의회 비서국(De Conciliinegotiis extra ordinem)에서 공의회 교부들의 문제를 절충하였다. 그는 공의회 첫 회의 기간 중에 두 번 발언하였는데, 10월 22일에 전례 문제에 관하여, 12월 5일에는 교회 문제에 관하여 재검토하자고 제의하였다.
〔교황으로서의 활동〕 1963년 6월 3일 교황 요한 23세가 사망한 후, 6월 19일부터 교황 선거가 시작되었는데 다섯 번째 투표가 이루어진 6월 21일 몬티니 추기경 이 새 교황으로 선출되어, 6월 30일 베드로 광장에서 바오로 6세란 이름으로 착좌식이 거행되었다. 그는 교황 선임 후 곧 공의회의 성공적 속개를 발표하였으며, 치코냐니(Almeto Cicognani) 추기경을 국무성 장관으로 임명하였고, 교황청 구성을 탈(脫)이탈리아화하여 국제화할 것을 표명하였다. 또한 개방적인 신학의 기초 위에서 교회법 개정과 사회 정의 문제, 국제 평화 문제, 교회 일치 문제 등을 연구하게 함으로써 교회의 정확한 방향을 제시하였다. 교황 바오로 6세는 간섭을 최소화하면서 소수파의 의견도 존중하고 설득과 타협을 통해서 업무를 추진하였는데, 특히 교황권 문제, 교회 일치와 비그리스도교인 문제, 종교 자유 문제, 공의회에서 토의 자체를 금한 사제 독신제 문제와 산아 제한 문제 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 1963년 9월 29일에 소집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제2차 회기에서는 쇄신된 교회상을 거의 만장 일치로 채택하였다. 계시 문제 등 현대 정신이 추구하는 소망과 참된 전통과 부합하고 인류 발전에 기여하는 내용을 담은 <전례 헌장>(Sacrosanctum Con-cilium)과 <매스 미디어에 관한 교령〉(Inter Mirifica)을 제정 · 반포하고 같은 해 12월 4일 회기를 마쳤다. 그리고 1964년 9월 14일 시작된 제3차 회기에서는 놀랄 만한 유연성으로 세계 여러 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선교 문제를 재검토하도록 하였으며, 티스랑 추기경의 주도하에 종교 자유 문제에 대한 제의를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조처했다. <교회 현장>(Lumen Gentium)<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Unitatis Redintegratio), <동방 교회에 관한 교령>(Orientalium Eccle-siarum) 등을 반포한 후 11월 21일에 회기를 마쳤다. 또한 영성체 전 공심재, 미사 때의 모국어 사용, 전례 쇄신 등을 결정하였다. 1965년 4월 8일에는 비신자 사무국(Secretariate for Non-Believers)을 설립하여 무신론자나 타종교인들과의 대화를 촉구하였으며, 1967년 8월 15일에는 사도적 헌장 <레지미니 엑클레시에 우니베르세> (Regimini Ecclesiae Universae)를 통해 교황청 조직의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1968년 3월 1일부로 발효되었다.
사목 여행 : 바오로 6세 교황은 비행기와 헬리콥터로 여행한 최초의 현대적 교황으로, 1964년 1월 예루살렘을 순례하면서 중동 지방의 정치 · 종교 지도자들과 만나 평화와 화해를 중재하였다. 이때 그리스 정교회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아데나고라스(Athenagoras)와 만나 함께 주의 기도를 바쳤다. 또 그 해 12월 2~5일 세계 성 체 대회 때 인도 봄베이(Bombay)를 방문함으로써 바오로 6세는 아시아를 최초로 방문한 교황이 되었다. 1965년에는 뉴욕의 유엔(U.N.) 본부를 방문하여 평화를 호소
하는 연설을 했고, 1967년 파티마와 이스탄불(Istanbul)방문, 1968년 보고타(Bogota) 국제 성체 대회와 메데인(Medellin)의 라틴 아메리카 주교단 총회 참석, 1969년 제네바의 국제 노동 기구와 세계 교회 협의회의 교회 일치 사무국 방문 및 중앙 아프리카 방문, 1970년 극동 지역 방문 등 약 11만 km를 여행함으로써 교황청의 현대화를 과시하였다.
교회 일치와 사회에 대한 관심 : 바오로 6세 교황은 1964년과 1967년 두 차례에 걸쳐 그리스 정교회의 아테나고라스 총주교와 만나 서로 포옹하고 주의 기도를 같이 바침으로써 화해와 일치를 촉구하였으나 기본적 교리에 대한 도전은 용납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하였다. 또 세계 교회 협의회(W.C.C.)와의 대화를 위하여 1965년 2월에 베아(Bea) 추기경을 파견하여 교회 일치 운동을 촉구했다.
그는 여러 차례의 성명을 통하여 인구 문제, 세계 평화 문제, 과격한 민족주의와 인종 차별주의 등에 대해 경고하였으며, 세계적으로 군비 축소를 호소하면서 군사 예산을 인도주의적 목적에 전용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의 첫 회칙 <엑클레시암 수암>(Ecclesiam Suam, 1964. 8. 6)에서는 교회 활동에 대한 몇 가지 실질적인 기준과 교리에 대하여 분명하게 밝혔으며,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 1965. 9. 3)에서는 성체성사에 대한 교리와 공경에 대해 명확한 태도를 표명하였다. 또, 원자력 폭발 시험 중지 협정이 이루어졌을 때에는 각국 지도자들과 유엔 사무총장에게 감사 전보를 보냈으며, 1964년 이후에는 유엔에 상주 참관인(observer)을 파견하였다.
1967년 3월 26일에 발표한 회칙 <민족들의 발전> (Populorum Progressio)에서 교황은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경제 체제의 중대한 변화를 제안하였고, <노동 헌장>(Rerum Novarum, 1891) 반포 80주년을 기념하여 1971년 5월 14일에 발표한 회칙 <80주년>(Octogesima Adveniens)에서는 모든 사람이 정의와 평화 문제의 해결에 동참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현대 사회에서 야기된 문제에 대한 이러한 회칙 외에도 복음화에 대해 폭 넓은 방향을 제시한 <현대의 복음 선교> (Evangelii Nuntiandi, 1976)는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이 복음 전파에 있으며, 다양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 복음화를 위한 보다 새로운 노력들이 시도되어야 함을 강조한 중요한 문헌이다.
〔평 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 내에 야기되었던 일시적 혼란, 성직자 · 수도자들의 위기감, 신자들의 교회 참여도 저하, 전통적 윤리관에 대한 재고찰 요청 등은 교황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일부 보수파에 너무 양보한다는 불평을 듣기도 하였고 너무 혁신적이라는 비난도 받아, 양쪽 극단 어디에도 기반을 두지 못하고 용단 내리기를 주저함으로써 호기를 놓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바오로 6세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현대적 요구 사항과 전통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는 평가도 받고 있지만, 교황 비오 12세와 요한 23세의 후계자로서 교회를 근본적으로 쇄신하였으며, 전환기의 교황으로서 미래를 준비하는 큰 역할을 하였다. 1978년 8월 6일 그가 사망하였을 때 많은 역사가와 신학자들은 그가 고령과 격무에도 불구하고 보여 주었던 그의 풍부하고 다양한 지성을 찬양하였다.
(-> 바티칸 공의회)
※ 참고문헌  J.G. Clancy, 8, pp. 265~2671 R. Trisco, 11, pp. 16~23/T. Early, 《NCE》 16, pp. 233~235/ F.X. Murphy, 《NCE》 17, pp. 491~494. 〔崔鏞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