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한국 최초의 여성 회장. 세례명은 골롬바.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의 향반(鄕狂) 집안에서 태어났다. 뛰어난 통찰력과 곧고 용감한 마음을 지녔다. 10여 세가 되었을 때 불교에 뜻을 두었으나 얼마 아니 가서 이를 포기하였다. 일찍이 충청도 덕산(德山)에 살고 있던 홍지영(洪芝榮)에게 후처로 시집갔으나 남편의 성품이 용렬하여 행복한 가정 생활을 이루지 못하고 늘 속세를 떠나고 싶은 생각에 젖어 있었다.
결혼한 지 얼마 안되어 충청도 지방에 천주교가 전해지자 "천주란 하늘과 땅의 주인이다. 교(敎)의 이름이 바르니 교의(敎義)도 틀림없이 참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책을 구해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믿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집안 식구들을 권유하여 교화시킴은 물론 이웃 여러 마을 사람들에게도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1791년 신해(辛亥) 박해 때에는 감옥에 갇힌 교우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는 등 밤낮으로 그들을 돌보다가 자신도 체포되어 며칠 동안 갇히는 몸이 되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곧 풀려났다. 평소 강완숙의 열렬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입교를 주저해 오던 남편 홍지영은 자신에게까지 후환이 미칠까 두려워 헤어져 살기를 원하므로 감옥에서 나온 강완숙은 시어머니와 자신의 딸과 전처의 아들인 홍필주(洪弼周, 필립보)를 데리고 서울로 이사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강완숙은 여러 교우들과 접촉하면서 전교에 힘쓰는 한편 지황(池璜, 사바)과 윤유일(尹有一, 바오로) 등이 주문모 신부를 맞아들이는 경제적인 일을 담당하는 등 큰 역할을 하였다.
1794년 12월 23일 조선 입국에 성공한 우리 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는 서울에 들어와 최인길(崔仁吉, 마티아)의 집에 숨어서 1795년 6월까지 전교에 힘썼다. 그러나 한영익(韓永益)의 밀고로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거처가 알려져 체포령이 내리자 강완숙은 자기 집 나무광에 숨겨 주었다가 3개월 후부터는 사랑방에서 기거하게 하여 주문모 신부는 향후 6년 간 그곳을 중심으로 전교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1795년 강완숙은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최초의 여회장으로 임명되어 여자들에 대한 전교를 전담케 됨과 동시에 교회 일을 맡아 보았다.
강완숙은 여회장으로 자상하고 재빠른 행동으로 주 신부를 도와 교회 일을 맡아 처리했고 당대의 일류 학자들과도 교류하여 교리를 토론했으며, 많은 처녀와 부녀자들을 감화시켜, 당시 벼슬하는 집안의 부녀자들까지도 입교하는 자가 많았다. 황사영의 <백서>(帛書)에 의하면 강완숙은 재능이 남보다 뛰어나서 주문모 신부가 모든 대소사(大小事)를 맡겼고, 이에 사족가(士族家)의 부녀자들까지 많이 입교시킬 수 있었다. 이는 당시의 국법에 역적만 아니라면 양반의 부녀자들까지는 형벌이 미치지 않았기에 금령(禁令)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첨례(瞻禮)를 보는 장소로도 강완숙의 집이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강완숙의 집에서 거행된 첨례에 빠짐없이 참석했던 윤점혜(尹占惠, 아가다)가 심문에서 말한 내용에 의하면 매월 첨례에 모여 기도한 것이 6~7회, 또는 10여 회였고 그 날은 각처에서 남녀 교우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강완숙은 상식과 지식에 재치 있는 말재주를 겸비하였기에 많은 부녀자들을 입교시켰는데 그중에는 지체 높은 양반집의 부녀자들이 많았다. 한신애(韓信愛, 아가다)와 그녀의 딸 조혜의(趙惠義), 홍필주의 일가인 홍정호(洪正浩)의 어머니 이소사(李召史)와 그녀의 며느리이며 이윤하(李潤夏)의 아내이며 이경도(李景陶)와 이순이(李順伊, 누갈다)의 어머니인 권소사(權召史), 윤점혜·윤운혜(尹雲惠) 자매, 이들의 어머니인 임소사(任召史), 정광수(鄭光受)의 누이동생 정순매(鄭順每), 조섭의 아내 이희(李喜)와 그의 딸 조도애(趙桃愛), 참판 이중복(李重馥)의 아내 신소사(申召史) 등이 강완숙의 선교 활동으로 입교했다. 또한 당시의 국왕인 정조(正祖)의 서제(庶弟)가 되는 은언군(恩彥君) 이인(李秘)이 그의 아들 상계군(常溪君) 담(湛)의 반역죄에 연계되어 강화도(江華島)로 유배되자 그의 거처인 경희궁(慶熙宮)에 남아 있던 부인 송(宋) 씨와 며느리인 과부 신(申) 씨를 찾아, 복음을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주 신부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아 끝까지 신앙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상하의 계급 질서를 벗어나서 과부 · 머슴 · 하녀였던 김순이, 김월임, 김흥년, 김소명도 입교시켰다.
이와 같은 강완숙의 활약에 힘입어 주 신부 입국 당시 겨우 4,000명에 불과하던 신자수는 5년 만에 1만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는데 특히 그중에서도 여신도의 수가 절대 다수였음을 볼 때, 골롬바의 활약이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1800년 6월 28일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했던 정조가 죽고 그의 아들 순조(純祖)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계증조모인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하며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가하니, 이른바 신유대박해(辛酉大迫害)가 일어나게 되었다. 즉 1801년(순조 원년) 정월에 총회장 최창현(崔昌顯)을 잡아 가두고, 사학(邪學, 천주교)을 금하는 교서를 내리는 동시에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강화하여 천주교의 전파를 막고 이를 믿는 자를 뿌리채 뽑아내려고 시도하였다. 이에 전국 각처에서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잡혀 순교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그해 2월 24일에는 강완숙도 그의 일가족과 함께 잡히게 되었다. 강완숙은 자기가 체포되는 위기 속에서도 주 신부만은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체포를 모면할 수 있게 하였다.
"스스로 사학의 괴수가 되어 여러 곳의 남녀 교우들을 불러들여서 밤낮으로 강습하여 곳곳마다 이르지 않는 곳이 없어 일세를 미혹케 하였다"는 《순조 실록》(純祖實錄)의 기록처럼, 강완숙은 천주교인 중에서도 가장 간악한 요녀(妖女)로 취급되었다. 주 신부 체포에 혈안이 된 포도청에서는 갖은 고문으로 강완숙에게 주 신부의 행방을 다그쳤으나 끝내 함구하여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로 인해서 수많은 신자들이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음을 가슴 아파한 주 신부가 1801년 4월 24일(음 3월 12일)에 자수하여 그 해 5월 30일 처형당하자, 이를 옥중에서 전해 들은 강완숙은 자기 옷을 찢어서 그 동안 주 신부가 조선에서 활동한 경과를 적어 후세에 남기고자 했으나, 이것을 전해 받은 어느 여교우의 부주의로 분실되었다.
강 골롬바는 함께 갇힌 부인 4명과 함께 옥중에서도 신심 수업에 힘쓰면서 순교하는 날만을 기다렸다. 그 동안 모진 형벌인 주뢰(周牢)를 여섯 번이나 받으면서도 끝까지 굽히지 않으므로 형리들도,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라고 감탄까지 하였다. 이렇듯 옥중에서 갖은 고난을 겪은 지 만 3개월 만인 그 해 7월 2일(음 5월 23일), 형장인 서소문 밖으로 나가는 길에서도 강완숙은 김연이(金連伊), 강경복(姜景福), 한신애(韓信愛), 문영인(文榮仁) 등 4명의 여교우들을 격려하고 주의 영광을 노래하였다. 즐거운 빛으로 제일 먼저 목숨을 바치니 그때 나이 41세였다. (→ 주문모 ; 홍필주)
※ 참고문헌 崔奭祐, 《韓國 天主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달레 교회사)/《黃嗣永帛書》/ 《邪學懲義》. 〔尹善子〕
강완숙 (1760~1801)
姜完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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