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리노, 놀라의 Paulinus deNala(353~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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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의 바울리노.

놀라의 바울리노.

성인. 놀라의 주교(409~431). 시인. 축일은 6월 22일. 본래 이름은 메로피우스 폰티우스 바울리누스(Meropius Pontius Paulinus). 353년 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서 그 리스도교 신자인 로마의 부유한 상원 의원 가문에서 태 어난 그는 보르도의 학교에서 그리스-라틴 문화를 접하 였고, 로마 황제 그라티아누스(Gratianus, 375~383)의 스승 이었던 데치무스 막누스 아우소니우스(Decimus Magnus Ausonius)에게서 수사학과 시(詩)를 배웠다. 그의 아버지 는 갈리아 지방의 총독으로서 상당한 지위에 있었으며, 갈리아의 나르보넨시스(Narbonensis), 캄파니아의 놀라, 스페인, 아퀴타니아(Aqutania)에 개인 토지들을 가지고 있었다. 세련되고 매혹적인 시적 재능을 지녔던 바울리 노는 주위의 관심과 존경을 받았으며, 30세 때에는 이탈 리아 캄파니아 지방의 집정관이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처음으로 놀라와 접촉을 갖게 되었고, 이 마을의 수호 성 인인 성 펠릭스(St. Felix of Nola)의 영성과 삶을 알게 되
었는데, 후에 성 펠릭스의 영성은 그의 전생애에 깊은 영 향을 주었다. 383~384년 보르도로 돌아와 잠시 체류한 후 다시 카탈로뉴(Cataloge)로 간 그는 이곳에서 스페인 의 상류층 가문 출신인 테라시아(Therasia)를 만나 결혼 하였다.
〔세례와 활동〕 보르도에서 바울리노는 아내와 함께 상 속받은 막대한 영토를 관할하면서 그 지방의 문화 · 사회 적인 생활을 통해 명사들과 친교를 나누는 모임에 자주 참석하였는데, 이때 그는 밀라노의 바울리노(Paulinus de Milano)를 통하여 성 암브로시오를 만나게 되었고, 이 만남은 그리스도교로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 었다. 마침내 이들 부부는 389년에 보르도의 주교 성 델 피노(St. Delphinus)에게서 세례를 받았는데, 이때 초기 그 리스도교의 금욕주의자인 술피치오 세베루스(Sulpicius Severus)도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그들은 편지를 통 해 서로의 믿음을 강화시켰다. 그들은 세례를 받은 후 보 르도를 떠나 390년부터 스페인 바르셀로나(Barcelona)에 서 생활하면서 아들 철수스(Celsus)를 낳았으나 태어난 지 8일 만에 사망하자,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팔아 교회
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희사한 후, 본격적으로 금욕적인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주민들의 요청을 받은 바울리노는 394/395년 성탄절 에 바르셀로나의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러 나 그는 놀라 지방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다음해 자 신의 대부분의 재산을 팔아 놀라에 있는 성 펠릭스의 성 당 근처로 아내와 함께 이주하여 투르의 성 마르티노(St. Martinus de Tours)의 모범을 본받는 작은 수도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이들 부부는 결혼 관계를 포기하고 몇몇 회 원들과 더불어 성 펠릭스의 공경 예식을 증진시키는 일 에 몰두하였으며, 방문자들을 맞아들이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교회의 직무를 수행하고 연구하면서 수도자 생활 을 해나갔다. 바울리노는 성 펠릭스의 무덤 위에 큰 성당 을 새로 지어 헌정하였으며, 그 건물의 벽에 성서의 내용 으로 벽화를 그려 넣었고 정규적으로 사람들이 순례 오 기를 소망하였다. 409년에 놀라의 주교로 서품되어 22 년 동안 주교직을 수행하였는데, 고트족의 침입으로 고 통을 겪은 사람들을 돌보았고 펠라지우스파 이단으로 인 해 발생한 신학적인 난관에서 올바른 판단이 이루어지도 록 중재 역할을 하였다. 바울리노는 431년 6월 22일 놀 라에서 저녁 기도 중에 사망하여 성 펠릭스의 무덤 곁에 묻혔다.
〔작품과 영향〕 그는 당시의 저명한 그리스도교인들, 특히 암브로시오, 예로니모, 아우구스티노, 마르티노, 교 황 아나스타시오 1세, 빅트리치오(Victricius), 술피치오 세베루스, 아망드(Aman), 델피노, 아퀼레이아의 루피 노 등에게 운문 형식의 서간을 보내 친분을 나누었다. 현 재 51편의 서간이 전해지는데, 이는 395년부터 426년 까지 쓰여진 것으로 바울리노의 애정적인 성격과 진심 어린 마음, 그의 겸손과 온화함이 깃든 작품들이다. 또한 이 서간들에는 그 당시 교의적인 논쟁이나 그리스도교 정신과 고대 문화와의 관계 등이 언급되기도 하였다. 그 리고 바울리노는 31편의 시를 남겨 놓았다. 특히 그는 해마다 성 펠릭스의 영광을 찬양하는 시를 지었는데, 성 펠릭스에게 헌정한 성당에 모자이크 장식과 더불어 이 시들을 장식해 놓았다. 이 시들은 389~408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그리스도교 정신이 섬세하게 깔려 있다. 전반적으로 바울리노의 작품은 고전적인 형식과 사상들 을 담고 있으나, 이것은 희망과 사랑 등의 그리스도교 사 상이 기술적으로 변형된 것이다. 그의 시는 라틴 시를 그 리스도교화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그의 친교적인 성격과 더불어 그의 작품은 그 당시 많 은 명사들과 학자들로부터 찬사를 얻었으며 특히 아우구 스티노와 예로니모,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는 그의 작품 들에 대해 높은 찬사를 보냈다. 8세기에 이르러 그의 서 간집이 엮어졌고 그의 가르침들, 특히 성인 공경 예식에 대한 가르침은 종종 프로테스탄트 신자들과의 논쟁 때 가톨릭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데 자주 인용되었다. 그의 작품들이 처음으로 편집되어 출판된 것은, 1685년 르 브랭-데마레트(J-B. le Brun-Desmarettes)에 의해 파리에서 이루어졌으며, 이것은 또한 미뉴(J-P. Migne)의 《라틴 교
부 선집》(Patrologie latine) 제61권에도 수록되어 있다. 1736년에는 무라토리(L.A.A. Muratori)의 22개의 논문들과 함께 마페이(F.S. Maffei)에 의해 베론(Vérone)에서 또 한 번 편집되었으며, 1894년에 폰 하르텔(W. von Hartel)은 《라틴 교회 작품 전집》(Corpus Scriptorum Ecclesiasticorum Latinorum) 안에 그의 작품을 편집 · 수록하였다.
〔성인 공경〕 바울리노의 유해는 오토 3세(Otto Ⅲ, 980~1002) 황제의 명령으로 로마로 옮겨져 성 바르톨로 메오 성당에 안치되었으나, 1908년 9월 18일 교황 비오 10세는 교황 교서 <상토스 인트라 안티스테테스)(Sanc- tos intra antistetes)를 발표하여 성인의 유해를 놀라로 되돌 려 보내는 것을 허가하였다. 이듬해 5월 14일 그의 유해 가 놀라로 옮겨졌지만 바울리노에 대한 공경 예식은 한 번도 끊긴 적이 없었고, 특히 그의 축일에는 백합꽃으로 장식한 성인의 동상을 성당에서 장엄하게 축복한 후 온 마을을 돌며 행렬하였다. 오늘날 이 예식은 놀라에서 새 롭게 변천 · 확장되었다.
한편 19세기에 보르도 교구에서도 성 바울리노 공경 예식이 정착되었는데, 도네(Donnet, 1836~1881) 추기경은 성 바울리노에게 두 개의 성당을 봉헌하였고, 20세기에 는 안드리외(Andieu, 1909~1935) 추기경이 보르도의 주 교좌 성당의 한 경당을 성 바울리노에게 봉헌하였다. 보 르도의 주요 도로들은 성인의 이름을 따고 있으며, 성인 에 관한 연구서가 지금도 계속 발행되고 있다.
※ 참고문헌  M.P. Cunningham, 《NCE》 11, pp. 28~291 R. Darricau, 《Cath》 10, pp. 947~9491 G. Biirke, 《LThK) 8, pp. 208~209/ D.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Saints, Oxford, 1987, pp. 341~342/ D. Attwater, The Penguin Dictionary of Saints, Great Britain, 1983, PP. 262~263/ E. Lode, Saints ofthe Roman Calendar, trans. by J. Aumann, O.P., New York, 1992, pp. 154~156/ 최정오 편, 《가톨릭 성인 사전》, 계성출판사, p. 323. [梁蕙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