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바젤에서 1431 ~ 1437년에 열린 제17차 세계 공의회.
[배 경] 바젤 공의회가 소집된 것은 콘스탄츠 공의회 (1414~1418)에서 미완성으로 끝난 교회 개혁과 이로 인 해 강화된 공의회 우위설(conciliarismus) 때문이었다. 이 러한 두 가지 원인은 아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고, 공 의회 우위설은 또한 교황의 수위권과 대결되어 있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서구 대이교(1378~1417)를 종료시키 는 것에는 기여하였으나 또 다른 긴급한 과제인 교회 개 혁 문제는 시작만 하였을 뿐 완성시키지는 못하였다. 그 러나 그 과제를 다음 공의회에서 완성시킬 수 있도록 공 의회의 정기적인 개최를 보증하기 위해 콘스탄츠 공의회 는 유명한 교령 <프레쿠엔스>(Frequens, 1417. 10. 9)를 의 결 · 발표하였는데, 이 교령에 따르면 교황은 앞으로 5년 후, 다음은 7년 후, 그 후로는 10년마다 공의회를 반드 시 소집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선출된 교황 마르티노 5세(1417 ~1431)는 공의회 우위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두려워 마음 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약속대로 5년 후인 1423년 4월 23일 파비아(Pavia)에서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페스트의 돌발로 7월 21일 시에나(Siena)로 이전하였다. 개혁에 대한 큰 희망에서 시작되었으나 공의회 우위설을 앞세운 이들의 주장이 저지당함으로써 회의는 처음부터 암초에 부딪혔고, 결국 파비아 · 시에나 공의회는 다음 공의회를 7년 후인 1431년에 바젤에서 개최하기로 합의 하고 아무런 성과 없이 1424년 3월 7일에 끝났다.
그러나 마르티노 5세는 이미 통고된 공의회임에도 불 구하고 단호한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소집을 주저하였 는데, 이는 물론 공의회 우위설에 대한 거부 반응 때문이
었다. 1430년에 공의회를 즉각 소집하도록 사방에서 거 센 압박이 가해졌고, 특히 독일에서는 공의회의 소집을 요구하고자 독일 국가 공의회를 9월에 뉘른베르크(Nürn- berg)에서 개최하겠다고 위협하였다. 한편 영국과 프랑 스 왕의 사절들은 교황을 설득하였으나 효과가 없자 마 침내 1430년 11월에 로마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교황궁과 로마의 여러 곳에 벽보를 붙이고 공의회의 즉 각적인 개최를 촉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순종을 거부하겠 다고 교황을 위협했다. 결국 마르티노 5세는 이러한 외 적 압박에 굴복하여 1431년 2월 1일 체사리니(Giuliano Cesarini) 추기경을 공의회 의장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공 의회를 바젤에서 개최할 자격을 부여하였으나, 교황은 공의회가 소집되기 전인 2월 20일에 뇌일혈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후계자 에우제니오 4세 교황(1431~1447)은 3월 12일 즉위한 당일에 선임자의 의장 임명을 다시 승 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의회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부정적이었다. 새 교황은 종교적으로는 뛰어 난 인물이었으나 너무나 우유부단하였다. 그로 인해 교 황과 공의회 우위설을 주장하는 이들 사이에 긴장이 고 조됨으로써 교황권에 큰 위협이 되었고, 3월에 예정되었 던 공의회는 이러한 긴장 상황으로 인하여 7월 23일이 되어서야 개최되었다.
〔경 과〕 바젤 공의회는 전기(1431~1437)와 후기(1437~ 1449)로 뚜렷이 구분된다. 왜냐하면 전기는 공식 공의회 이고 후기는 비공식 공의회이기 때문이다.
전기(1431~1437년) : 공의회 의장인 체사리니 추기 경이 바젤에 9월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이 공의회는 그의 대리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처음에는 참석자도 매우 적 었고, 주교도 한 명 참석하지 않은 채 개회가 선언되었 다. 가을에 의장 체사리니 추기경이 도착하였을 때도 참 석자는 여전히 적었다. 그렇지만 공의회의 과제는 많고 도 어려웠다. 미완성인 콘스탄츠 개혁의 지속, 이단의 근 절과 후스파의 진압, 제왕들 사이의 평화 보증, 그리스 정교회와의 일치, 교회 개혁 등이 큰 장애에 직면해 있었 다. 그런데 공의회는 교회 행정부를 자처하며 교황에게 악의를 표명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 회의(1431. 12. 7)에 서는 공의회의 정기 개최에 관한 콘스탄츠 공의회의 교 령을 환기시켰고, 이미 후스파를 바젤로 초대하였으며 (1431년 10월 15일자 서한), 나아가 그리스인들과의 회합 을 수락하면서도 교황과의 합의를 무시하고 이탈리아에 서의 그들과의 회합을 거부하였다.
그러는 동안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바젤과 그 인근의 상황이 매우 불안하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사실 이 보고 들은 부정확하고 과장된 것이었다. 하지만 교황 에우제 니오 4세는 이 보고를 근거로, 또 선임 마르티노 5세 교 황에 의해 1430년에 이탈리아의 한 도시에서 열기로 계 획된 그리스인들과의 합동 회의에 대한 전망을 이유로 1431년 12월 18일 바젤 공의회를 정회시키는 해산령을 선포하면서 새 공의회를 18개월 후 볼로냐에서 소집할 것을 선언하였다.
너무 성급하였던 이 조치는 공의회 우위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입장을 강화시키는 역효과를 초래하였다. 공의회 는 예측대로 교황의 결정에 대한 복종을 거절하였으며, 체사리니 추기경은 의장직을 포기하였다. 그들은 대부분 의 제왕들로부터의 지지를 확신하고 산회는커녕 교황이 개혁을 원하지 않는다는 추측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래서 제2차 회의(1432. 2. 15)에서는 공의회의 개최를 의무화한 교령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교황을 공의회에 예속시킨 콘스탄츠 공의회의 또 다른 교령인 <헥 상타> (Haec Sancta, 1415.4.6)를 갱신하였다. 공의회의 우위성을 뒷받침한 이 교령들은 참석 주교 14명의 지지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큰 대학들과 공의회 우위설을 주장 하는 이들로부터 격려의 서한을 받았으며, 당시 부르주 (Bourges)에서 개최되었던 프랑스 성직자 회의에서도 공 의회 지지를 선언하였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 국왕을 비 롯한 많은 제후들, 심지어 지기스문트(Sigismmd, 1410~ 1437) 독일 황제까지도 공의회를 지지하였다. 새 참석자 들이 공의회에 합류하였는데 4월 말까지 32명의 고위 성직자들이 참석하였고 그중에는 추기경도 몇 명 포함되 어 있었다. 이러한 많은 지지와 격려로 더욱 대담해진 공 의회는 제3차 회의(1432. 4. 29)에서 교황에게 해산령의 철회를 요구하였다. 더 나아가서 교황이 직접 또는 대리 로 하여금 3개월 이내에 자신의 조치에 대해 해명하도록 교황을 공의회에 소환하였다.
이제 공의회측에서는 공의회 우위설을 실천에 옮기고 그 계획에 따라 독자적인 관청과 기구를 창설하고 교회 록을 부여하고 대사까지 발행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급진적인 새로운 심의 규정을 마련함으로써 그들의 승리 를 과시하였다. 1432년 10월에 발표된 새 의사 규정에 따르면 주교와 대수도원장들에게만 주어졌던 종래의 전 통과는 달리 모든 참석자들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주교 대리, 신학자, 박사, 대학 교수, 참 사회원, 수도자, 주임 신부 등 하위 성직자들이 투표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에 비해 1433 년 봄의 바젤 공의회는 주교들보다 이들 하위 성직자들 의 수가 많아 전체의 5분의 3을 차지하였다. 공의회는 최고로 500명 가량의 성원을 이루었었는데 대표를 많이 보낸 국가별로 4개로 나누고 또 4개의 분과로 나뉘어졌 다. 다시 말해서 모든 참석자들은 신앙 분과(deputatio fidei) 평화 분과(deputaio pacis), , 개혁 분과(deputatio refor- mationis) , 일반 사항 분과(deputatio pro communibus) 중 어 느 한 분과 위원으로 선출될 권리가 있었고, 그들의 결의 는 최종적으로 총회에 제출되도록 하였다. 이 4개 분과 위원회 위에는 관리 운영에 관한 중앙위원회가 있어서 전체를 통솔하였는데, 이러한 심의 규정은 근대 의회 제 도와 비슷한 것이었다.
공의회측은 이단의 근절을 위한 후스파와의 협상에서 도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것은 바젤 공의회의 위신을 높 이는 데 적지 않게 기여하였다. 후스파는 거듭된 약탈 행 각으로 여러 나라에서 문제가 되었고, 그들에게 보낸 십 자군에게도 늘 승리를 거두었다. 1433년 초 후스파의 대표단이 바젤에 나타나서 협상 용의를 표명하였으며, 3
개월 간 그들은 공의회에서 토론하였다. 체사리니가 유 명한 연설을 하였고 이에 대해 후스파도 답변하였다. 그 리고 후스파의 양형 영성체, 속권에 의한 대죄의 처벌, 무제한의 설교 자유, 모든 성직자에 대한 복음적 청빈 등 4개 항의 요구를 면밀히 검토하였다. 그러나 이 토의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이에 공의회는 보헤미아(Bohe- mia)로 사절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으며, 1433년 5월 8 일 프라하(Praha)에 도착한 이 사절단은 여러 차례의 협 상을 통해 그 해 11월 30일 유명한 '프라하 협정' (Prager Kompaktaten)을 체결하였다. 이때 일정한 조건하에 평신 도에게도 성혈의 영성체를 인정하고 그 밖의 다른 몇 가 지도 양보함으로써, 간신히 후스파의 맹위(猛威)에서 해 방되는 단서를 잡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소요로 압박당하고 있던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은 결국 양보하여 1433년 12월 15일 칙서(Dudum sacrum)를 통해 바젤 공의회에 대한 해산령을 철회하고 합법적으로 그 속개를 인정하였다. 이것은 공의회 우위 설을 주장하던 이들에게는 더없이 큰 성공을 의미하였 다. 이렇게 공의회는 다시 교황과의 제휴가 시작되었으 나 관용적이지 못하고 곧 승리를 남용하며 반교황적이 되었다. 이리하여 교황과 다시 충돌하게 되었고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공의회는 먼저 교황이 임명한 의장들 에게 공의회 우위설의 요소가 첨가된 선서를 요구하였 고, 이어 공의회 우위설을 재확인하였다. 교회 개혁 문제 에 있어서도 교구 회의와 관구 회의의 정기적인 개최에 관한 사항, 전례와 성무 일도에 관한 사항, 성직자의 축 첩과 성직 매매를 금지한 사항, 성무 집행 정지령의 난발 과 이유 없이 로마에 상소하는 것을 금지하는 사항 등 주 목할 만한 교령들도 있었으나 이러한 교령들은 예외적인 것에 불과하였고, 그 밖의 교령들은 여전히 교황의 권력 을 축소하고 공의회의 행정권을 확대하려는 의도에서 나 온 것들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교회록 취득세(anata)를 비롯해서 교황청에 바치던 여러 세금의 납부를 전면적으 로 정지시킨 규정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말하자면 교황 청의 조세권이 거의 폐지당한 셈이다. 이로써 교황청은 수입의 큰 부분을 잃게 되었고 나아가 그것을 대신할 수 입원을 발견할 수도 없었다. 결국 교황청의 존립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공의회는 이미 교황청 세금 장수인들에게 징수한 것을 바젤 공의회에 바치도록 명했었다. 나아가 서 공의회는 교황의 유보 사항들을 폐지시켰고 교황의 선서를 의무화하고 추기경의 수를 24명으로 줄이는 등 교황의 선거 절차도 일부 개정하였다.
이 무렵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1434년 6월에 일어난 로마 반란에서 간신히 탈출하여 피렌체로 피신해 있었 다. 그는 이곳에서 1435년 8월에 가말돌리회 총장을 통 해서, 1436년 봄에는 추기경들을 통해서, 6월에는 군주 들을 통해서 공의회에 항의하였으나 그 어느 것도 효과 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리스 정교회와의 일 치를 협의할 합동 회의의 개최지 문제가 교황에게 절호 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요한 8세 팔 레올로구스(Joannes VIII Palaeologus)는 오스만 터키 제국의
압박을 받으면서 서유럽과의 연계와 그 원조를 찾고 있 었는데, 이를 위해 우선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일치를 실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요한 8세 팔레올로구스는 동서 교회의 화해 문제에 대해 교황과 공의회측과 각기 교섭을 벌였다. 공의회측은 합동 회의 의 개최지로 바젤이나 아비뇽을 제의하였고 교황은 피렌 체를 제의하였는데, 1434년 7월 말 바젤에 온 그리스인 대표들이 회합 장소로 바젤을 거절하고 이탈리아의 한 도시로 하자는 교황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1437년 5월 7일 제25차 회의에서는 이 개최지 문제를 둘러싸고 두 파로 분열되었다. 알르망(Louis d'Aleman) 추기경이 이끄 는 다수파는 개최지를 바젤, 또는 아비농 또는 사브와 (Savoie)의 한 도시로 결정하였고, 소수파는 교황 사절들 과 함께 교황의 제의를 받아들여 이탈리아의 한 도시에 서 열도록 결정하였다. 소수파의 결의는 교황에게 보내 져 5월 28일에 교황의 승인을 얻었다. 교황이 소수파의 결의를 승인하자 다수파는 7월 31일에 교황의 책임을 묻고 해명을 요구하고자 교황을 바젤로 소환하였다. 이 에 에우제니오 교황은 9월 18일 공의회를 즉각 페라라 (Ferrara)로 이전할 것을 선언하고 그 소집일을 다음해 1 월 8일로 확정 발표하였다. 체사리니, 카프라니카(Dome- nico Capranica), 쿠사의 니콜라오(Nicolaus Cusanus) 추기 경 등 소수파는 교황의 이전 결정에 복종하고 즉시 페라 라로 갔지만, 급진적인 다수파는 바젤에 남아 교황에 대 해 점점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한편 페라라 공의회 는 예정대로 1월 8일에 열려 다음해 피렌체로 옮겨져 계 속되면서 무엇보다도 그리스 정교회와의 일치를 위한 기 초를 마련하는 큰 성과를 이루었다.
후기(1437~1449년) : 이때부터 바젤과 페라라에서 두 개의 공의회가 열렸다. 페라라 · 피렌체는 합법적인 정식 공의회로, 교황과 동로마 제국의 황제 요한 8세 팔 레올로구스를 비롯해서 많은 고위 성직자들과 신학자들 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반면 바젤은 비합법적인 공의회(conciliabulum)로 대다수가 학자와 교수, 하위 성 직자들로 구성된 급진적이고 소위 민주적인 공의회 우위 설을 주장하던 이들이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에서 그 리스도교 국가들이나 제후들은 중립을 선언하거나 또는 어느 한 쪽을 지지함으로써 필요한 이익을 얻으려 하였 다. 영국과 프랑스는 처음에 중립을 선언하였다. 다시 말 해서 에우제니오 교황을 합법적인 교황으로 지지하면서 도 바젤과의 인연을 끊으려 하지 않았다. 특히 프랑스는 부르주에서 개최된 성직자 회의(1438. 5~6)에서 바젤의 23개 교령을 채택했고, 이어 의회의 요구에 따라(1438. 7. 7) 그것을 조서(詔書, pragmatique sanction)로 포고하여 국 법으로 만들었다. 독일에서는 1437년 12월 9일 황제 지 기스문트가 사망한 후 제후들이 중립을 취하였고, 영국 왕은 교황을 완전히 지지하였다.
바젤 공의회는 점점 과격해지고 혁명적이 되었다. 에 우제니오 4세 교황이 페라라와 피렌체 공의회에서 그리 스인들과의 일치를 통해 바젤파들에 대해 큰 성공을 거 두자 알르망이 이끄는 바젤 회의의 활동은 거의 전적으
로 반교황적이고, 자신의 주장과 공의회 우위설을 위한 투쟁에 전력을 기울였다. 1438년 1월부터 1439년 6월 에 걸쳐 교황에게 성무 집행 정지령을 내리고, 페라라 공 의회를 이교 공의회로 선언하였다. 무엇보다도 "교황이 공의회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가톨릭 신앙으로 선 포되었고 그 결과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이 이단자로 선언 되고 마침내는 폐위시키고, 1439년 11월 5일 사브와의 아마데우스(Amadeus)를 대립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 는 자신을 펠릭스 5세(1439~1449)로 명명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비난받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교 황이 되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당시 재정적으 로 궁핍했던 공의회에 풍부한 원조를 제공함으로써 그 영예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콘스탄츠 공의회에 서는 서구 대이교를 종식시키는 데 큰 힘을 발휘하였던 공의회 우위설이 바젤에서는 반대로 새 이교를 탄생시키 게 되었고, 이 이교는 교회사상 마지막 이교가 되었다. 이 이교를 일으킨 것이 공의회 우위설의 최대의 실책이 었고, 동시에 그것은 모두가 새로운 교회의 분열을 원하 고 있지 않았으므로 공의회의 위신을 급속히 하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먼저 프랑스가 교황에게 접근하였 고, 1443년에는 아라곤(Aragon)과 스코틀랜드가, 1447 년에는 새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3세가 교황과 제휴를 맺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1448년 빈 정교 조약을 체결 한 후 바젤에서 공의회의 참석자들을 축출함으로써 바젤 공의회는 결정적인 위기를 맞았다. 이에 로잔(Lausanne) 으로 이전한 공의회는 1년 간 존속한 후 대립 교황 펠릭 스 5세를 폐위시키고 에우제니오의 후계자 니콜라오 5 세(1447~1455)를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한 후 1449년 4월 25일 자진 해산하였다.
〔의 의〕 바젤 공의회에서 교황의 수위권과 공의회 우 위설 사이의 투쟁은 교황권의 승리로 결말이 났다. 그 결 과 공의회 우위설은 끝이 나고 교황권이 다시 강화되었 다.
바젤 공의회의 공의회성(oecumenicitas)에 대해서는 그 것을 완전히 부정하는 교회 내의 보수적인 견해와 그것 을 완전히 인정하려는 극단적인 갈리아주의적 견해가 대 립되고 있다. 전자는 바젤 회의를 공의회로 인정하지 않 음에 따라 피렌체 공의회(148~1445)만을 제17차 공의 회로 인정하려 하는 반면에, 후자는 전기만이 아니라 후 기까지 즉 바젤에서 열린 전 회의를 공의회로 인정하려 한다. 그러나 두 극단을 피한 중도적인 입장이 옳다. 실 제로 페라라로 이전하기 이전인 제25차 회의까지는 공 식 공의회로 인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견해 를 취할 때 피렌체 공의회는 바젤 공의회의 일환이요 그 연속이 된다. 그리고 바젤 공의회 중 전기를 공의회로 인 정한다 하더라도 온건파 갈리아주의자들의 요구대로 그 때의 모든 결의들이 공의회의 교령으로 유효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그중에는 교황 권위에 저촉되는 것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의회성을 지 니는 법령들이란 공의회가 이단의 근절이라든가 교회 개 혁이라는 그 본연의 임무 수행을 위해 반포한 법령들로
국한되어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Monumenta conciliorum generalium saeculi decimi quinti, vol. 4, Vienna-Basel, 1857~1935/ J. Haller et al., Concilium Basiliense, vol. 8, Basel, 1896~1936/Mansi, t. 29~31/J.B. Villiger, 《LThK》 2, pp. 23~25/ Bihlmeyer-Tüchle II , pp. 395~399/ J. Gill, Eugenius IV : Pope of Christian Union, Westminster, 1961/ Hubert Jedin, Kleine Konzilsgeschichte, Herder, 1966. [崔奭祐]
바젤 공의회
公議會
[라]Concilum Basileense · [영]Council fBa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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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1511년에 발행된 <바젤 공의회 교령집》 속표지 그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