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1869년에 비오 9세 교 황(1846~1878)에 의하여 소집된 제20차 세계 공의회와 1962년에 교황 요한 23세(1958~193)에 의해 소집되고 바오로 6세 교황(1963~1978)에 의해 진행된 제21차 세 계 공의회.
: I .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역사적 배경〕 프랑스 대혁명(1789~1799)은 나폴레옹 (Napoleon Bonaparte, 1769~1821)의 쿠데타로 끝났으나, 혁 명의 자유주의라는 이념은 나폴레옹의 대외 정복 전쟁을 통해서 유럽 국가들에 널리 전파되었다. 또 1815년 빈 (Wien) 회의 이후 오스트리아 수상 메테르니히(Klemens Wenzel Lothar Meternich, 1773~1859)는 정통 왕조주의를 내 세우며 군주들의 국제적 단결을 강조하였고, 그가 주도 한 4국 동맹과 신성 동맹의 국가들은 절대 군주 체제를 강화하면서 자유주의자들의 혁명 운동을 저지하였다. 한 편 프랑스 대혁명으로 어려움을 겪은 교회는 혁명과 자 유주의에 대한 혐오 속에서 '구질서' (Ancien Regime)를 회복하려는 보수적 전제 군주들과 제휴하였는데, 이러한 제휴로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에 시행되었던 반 (反)가톨릭적 정책은 파기되었으며, 몰수된 교회 재산을 되찾고 교황령도 수복되었다.
그러나 1848년 프랑스의 2월 혁명과 오스트리아의 3 월 혁명으로 보수적 전제 군주 체제가 무너지면서 유럽 에서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민족적 자유주의자들에 의하여 '리소르 지멘토' (Risorgimento, 국가 통일 운동)가 전개되었는데, 1858년에 사르데냐(Sardegna) 왕국의 수상인 자유주의 자 카부르(Camillo Benso Cavour, 1810~1861)의 주도로 이 탈리아의 통일 국가 건설 운동이 시작되었고, 1860년에 는 름바르디아(Lombardia)가 사르데냐 왕국에 합병되었 으며, 민족 운동의 지도자인 가리발디(G. Garibaldi, 1807~ 1882)는 '적의대' (赤衣隊)를 이끌고 시칠리아(Sicina)와
나폴리(Napoli)를 점령하여 사르데냐 왕국에 합병하였 다. 또 1861년 2월에는 토리노(Torino)에서 새 의회가 소집되어 사르데냐 국왕이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으 로 추대되었고, 로마가 수도로 선포되었다. 이제 대부분 의 교황령은 영토를 잃고 붕괴될 위기에 놓였다.
교황 비오 9세는 자유주의자로서 교황령의 민주적 정 치 개혁을 단행하여 평신도를 수상으로 임명함으로써 민 족주의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1848년에 교황령 의회가 오스트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독립 전쟁을 결의하였을 때 교황은 오스트리아가 가톨릭 국가라는 점 에서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따라서 로마에서는 폭동이 일어났고, 민족 진영의 극단파에 의해 교황령의 첫 수상 이 중상을 입었으며 교황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혁명 분 위기에 휩싸인 로마를 벗어났다. 1849년에 교황은 프랑 스 군대의 도움을 받아 민족주의자들의 봉기를 진압하고 로마는 프랑스 군대의 보호를 받았으며, 교황은 자유주 의적 태도를 전제적 자세로 바꾸었다. 그리고 교황은 교 회가 직면한 정치적 난국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 로 공의회 소집을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 자유주의가 독일에서는 지성의 자유를 내세우는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될링거(Johan Joseph Ignaz von Döllinger, 1799~1890)가 이끄는 지성인들은 스콜라 사상 에서 벗어나는 지성의 자유가 학문 연구의 필수 조건이 라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신학에 새로운 과학적 학문 방법이 개발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합리주의자들이 제기하는 논증으로 가톨릭 신 학을 부흥시킬 수 있다고 주창하였다. 또 세속 문화를 수 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한 그들은, 교회
가 세속 문화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자세를 지녀 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세속 문화에 반가톨릭적 요소가 담겨 있다고 본 교황 비오 9세는, 가톨릭 자유주 의자들이 스콜라 사상을 반대하는 자세에 유감을 표시하 면서 가톨릭 학자의 교도권(敎導權)에 대한 승복을 요구 하였으며 자유주의의 전파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이처럼 프랑스 대혁명 이후 가톨릭 교회의 위상과 교 황의 권위가 약화되었고 1848년 혁명으로 이탈리아에서 는 교황령이 통일 국가 건설에 장애물로 여겨지면서, 반 가톨릭적이며 반교황적 분위기 속에서 민족주의는 가톨 릭 교회의 존립 자체에 위협이 되었다. 아울러 가톨릭 자 유주의는 교회의 권위와 그리스도교 신앙에 의문을 제기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갈리아주의(Gallicanismus), , 요셉 주의(Josephinismus) , 페브로니우스주의(Febronianismus) , 안센주의(Jansenisims)us)에 대응하여 교황권 강화를 내세운 '교황 지상주의' (ultramontanismus)가 서유럽의 젊은 신부 들과 평신도 지성인들 사이에서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신(新)교황주의(neo-ultramontanismus)를 내세우는 가 톨릭 신자들은 강력한 교황 중앙 집권 체제를 주장하며 교황이 없는 가톨릭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고 역설하고, 교권(敎權)과 속권(俗權)을 함께 지닌 교황의 수위권(首 位權)과 무류권(無謬權)을 강력하게 내세웠다.
〔공의회의 준비〕 1849년 이래 공의회 소집에 대한 생 각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비오 9세 교황은, 1864년 12 월 6일 성사성 모임에 참석한 21명의 추기경들에게 이 러한 속내를 밝히면서 비밀리에 의견을 제시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2명의 추기경은 공의회 소집을 분명하게 반 대하였고, 6명의 주교들은 공의회의 소집이 시기적으로
좋지 않다면서 주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나머지 주교들은 널리 유포된 오류들을 단죄하면서 가톨릭 교리 중에서 논쟁 부분들을 명백하게 밝히고 성직자들의 교육 과 생활을 개선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공의회가 소집되 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일부에서는 공의회가 선교의 활성화에 도움이 되고 갈라져 나간 동방 교회들 과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가톨릭 교회로 돌아와 그리스 도교 일치를 향한 길이 마련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2 명의 추기경은 공의회에서 교황의 무류권이 정의(定義)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65년 4월 말 교황이 선정한 34명의 서방 라틴 전례 교회의 주교들과 몇 명의 동방 비잔틴 전례의 가톨릭 주 교들에게 공의회 소집을 알리고 공의회에서 다룰 의제에 관한 의견을 묻는 편지가 비밀리에 발송되었다. 그중 6~8명의 주교들은 공의회의 좋은 점을 인정하면서도 세계가 혼란한 상황 속에서 공의회를 소집하는 것이 지 혜로운지 또는 현실적으로 가능한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 하여 연기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대부분의 주교들 은 공의회 소집에 찬성하였다. 그들은 서유럽 사회에 만 연된 그릇된 사상들과 가톨릭 교회 안에 유포된 프로테 스탄트적 성서관을 다루어 단죄하여야 한다고 보았던 것 이다. 그들은 교회론과 교황의 수위권과 같은 그리스도 교 원칙들이 천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8명의 주교 들은 교황의 교도권에 대한 뮤류성도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주교들은 표준 교리서의 간행과 교회법의 개정을 공의회 의제로 제시하였다.
한편 공의회 준비를 지휘하는 5명의 추기경으로 조직 된 '중앙위원회' 는 1865년 3월, '신앙과 교리' , '교회 규율과 교회법' , '수도회' , '동방 교회와 선교, '정교 (政敎) 문제와 교회와 국가의 관계' 에 대한 초안을 마련 하는 5개의 준비 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위원들은 대부 분 로마 교황청의 구성원들이었다. 그리고 교황 대사의 지도 아래 지역 교회의 주교들의 추천을 받은 신학자들 과 교회법 학자들이 자문 위원으로 로마로 뽑혀 왔다. 96명의 자문 위원들 중에서 61명이 로마에 거주하는 이 탈리아인들이었고 이탈리아 밖에서 초대된 신학자들은 35명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교황 지상주의의 성향을 지 니고 있었고, 될링거와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자의 든 타의든 간에 선정되지 않아 일부 지역에서는 자문 위 원 선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각 준비 위원 회에서 초안 작성 작업에 들어간 것은 1867년부터였다.
1868년 9월 8일 교황 비오 9세는 가톨릭 교회에서 갈 라져 나간 동방 교회의 주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 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임 을 밝히고,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분열이 치유되기를 바란다고 표명하였다. 그리고 공의회 소집을 알리면서 그들의 선인들이 제2차 리용 공의회(1274)와 피렌체 공 의회(1439)에 참석하여 함께 일치 교령을 작성할 만큼 협조 자세를 보여 준 역사적 사실을 들어 공의회에 참석 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아울러 동방 교회 주교들에게 서 방 교회와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로마 가톨릭 교회로 돌아오는 것이 동방 교회가 그들의 원천에 충실하는 표시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 초청 편지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도착하기 전에 언론 에 보도됨으로써 동방 교회는 편지 접수를 거부하였다.
또 교황은 9월 13일에 프로테스탄트 교회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였다. 이 편지에서도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 사도를 대리자로 하여 하나이고 거룩 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가톨릭 교회를 세웠음을 밝히 면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에게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분 열시킨 수많은 교파들의 출현과 그리스도교 교리가 희석 되어 가는 과정에 놓여 있는 그들의 위상을 상기시키고 그들의 선인들이 떠나간 로마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올 것을 권고하였다. 이 편지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단일성 과 프로테스탄트의 분열을 비교함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호교론적(護敎論的) 논증의 성향을 지니고 있어 두 교회 사이의 논쟁을 불러일으킬 요소를 담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 교회로 돌아와서 공의회에 참석하라는 권고 는 거부당할 수밖에 없었다.
1869년에 들어서면서 준비 위원회는 교황의 무류성 정의에 대한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교황 지상 주의자들은 정의를 강력하게 촉구하였고, 반대자들은 무 류성은 계시된 교리로 정의될 수 없기에 현 상황에서는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공의회가 열리 기도 전에 무류성 의제 채택 문제로 교회는 혼란에 빠졌 다. 1869년 2월 독일에서 될링거가 익명(匿名)으로 무 류성 정의를 반대하는 글을 잡지에 실은 데 이어 14명의 독일 주교들도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으며, 프랑스와 오 스트리아에서도 일부 주교들이 반대하거나 주저하는 입 장을 보였다. 반대로 예수회에서는 《가톨릭 문화》(Civiltà Cattólica)라는 잡지를 통해 진정한 가톨릭 교회인들은 다 가오는 공의회에서 무류성이 정의되기를 원한다고 선언 하였다. 이러한 논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교황 비오 9세 는 1869년 6월 29일에 공의회 소집을 공표하였다.
공의회 준비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유럽 국가, 특히 국 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들인 국가의 정부들은 공의회에 대해 경계하는 반응을 나타냈다. 공의회가 무류성에 관 한 문제를 다루려는 계획이 정치적 관점에서는 교회와 교황이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를 지배하던 중세기의 교 황권을 다시 부흥시키려는 의도로 추정될 수 있었기 때 문이었다. 프로이센 정부와 오스트리아 정부는 공의회가 정치 영역을 침범한다면 반대하겠지만 종교 문제로 제한 한다면 주교들은 공의회에 참석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 였다. 다른 정부들도 공의회에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정치 문제에 관한 교령을 반포하려는 시도가 엿보 이지 않는 한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세속 국가 들은 공의회 때문에 국가와 교회가 유지하고 있는 평온 한 관계가 파괴됨으로써 비참한 결과가 일어나지 않기를 경고하였다.
〔진행 과정〕 공의회는 1869년 12월 2일 시스티나 성 당에서 열린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비오 9세 교황은 총 회의 사회를 담당할 5명의 추기경을 임명하고 공의회 진
행 규정을 담은 지침서를 발표하였는데, 이 규정에 따르 면 교황만이 공의회 의제를 선정할 수 있고, 공의회 중에 교부들이 제안한 의제 채택을 결정하는 특별 위원회를 설정하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회의 형태는 공개 회의 와 총회로 구분되었다. 총회에서는 준비 위원회가 마련 한 안건을 심의하여 결정할 때에는 '찬성' (placet), '조건 부 찬성' (placet per modum) '반대' (non placet)로 투표할 수 있으며, 총회에서 마무리된 문헌은 공개 회의에서 교 황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찬성' 과 '반대' 만이 허용된 표결에 붙여지게 하였다. 또한, 지침서는 교부들이 명백 한 허락 없이 로마를 떠나는 것을 금지하였다.
1869년 12월 8일 공의회 참석 자격이 있는 1,050명 의 교부들 중에서 774명이 성 베드로 대성전에 자리를 잡은 가운데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개회식이 성대히 거행 되었다. 참석 교부들의 3분의 2가 유럽인들이었고, 이들 중 3분의 1이 이탈리아인들이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와 같은 선교 지방에서 온 주교들도 유럽인이 었으며, 미국에서는 50명의 교부들이 참석하였다. 비오 9세 교황은 개막 연설에서 참석자들에게 삼위 일체 하느 님의 영광, 가톨릭 교회와 신앙의 고양과 증진, 그릇된 사상들의 일소(-掃), 성직자와 그리스도인의 쇄신, 인 류의 화합과 공동 평화와 같은 목표를 향해 공의회를 개 최하는 데 동의하느냐고 물었고, 교부들은 일제히 '찬 성' 이라고 외쳤다. 준비 위원회가 작성한 51개의 안건 중에서 6개 안건만이 제출되었는데, 여기에 교황의 무류 성은 포함되지 않았다.
1869년 12월 28일에는 '신앙 교리위원회' 가 마련한 가톨릭 신앙에 관한 헌장(憲章)에 대한 토의에 들어갔 다. 이 헌장은 창조주 · 삼위 일체 · 천주 강생 · 계시 · 신 앙 · 신앙과 이성과 같은 정통 교리를 제시하였고, 이러 한 교리를 거부하는 유물론 · 합리주의 · 범신론 · 이신
론 · 합리주의적 성서관 · 신앙주의 · 회의론 · 자유주의 신학과 같은 사상 을 오류로 단죄하였다. 이 문헌은 교 황이 공의회 개막 2일 전에 발표한 <신앙 오류표>(Syllabus errorum)를 기 초 자료로 하여 작성되었는데, 대부 분의 교부들은 헌장의 내용이 너무 길고 사목적 성격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하면서 다시 작성하도록 위원회 에 돌려보냈다. 1870년 1월 10일에 는 주교 · 공석(空席) 주교좌 · 성직 자의 윤리 생활 · 교리 문답서에 관한 문제 토의가 시작되었으나 교리 문답 서에 관한 의안을 제외하고는 결론에 이르지 못했고, 그 해 4월 24일에는 수정된 가톨릭 신앙에 관한 교의 헌 장 <하느님의 아들〉(Dei Filius)이 만 장 일치로 통과되었다.
이후 공의회에서는 무류성에 대한 의제 채택 문제가 제기되었다. 공의
회 교부들 중 5분의 4가 교황 지상주의자들이었지만, 교 부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 첫째는 극단적 교황 지상주의를 내세운 소수파로서, 이들은 교 황이 가르치는 내용은 모두 무류성을 지니고 있으며 교 황의 무류성은 교회의 무류성의 기원이라고 주장하였다. 둘째는 다수파로서 교황 무류성의 정의를 주요 관심으로 삼지 않고 있지만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기를 원하였고, 따라서 무류권의 선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을 보였 다. 셋째는 참석 교부의 5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소수 파로서 교황의 무류성 정의를 반대하였다. 이들은 공의 회가 정치 쟁점화될 것이고 그리스도교 일치에 걸림돌이 되며 교황 중앙 집권 체제는 초대 교회의 구조에 어긋난 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교황 무류성 옹호자들은 500 여 명의 교부들의 서명을 받아 공의회 의제로 제출하였 다. 이러한 청원에 반대하여 136명의 서명도 제출되었 지만, 심사위원회는 교황 무류성을 의제로 채택하였고, 교황은 이 의안을 교회에 관한 헌장에서 다루도록 지시 하였다. 4월 29일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의 정의를 담 은 헌장이 발표되고, 5월 13일부터 7월 13일까지의 격 렬한 찬반 논쟁을 거쳐 7월 13일 예비 투표에서 찬성 451명 반대 88명에 62명이 조건부 찬성을 하였다. 7월 17일 교황이 사회를 보는 회의에서 반대 의사를 표명하 기가 죄송스러워 최종 투표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편지를 제출한 61명의 교부들은, 교황의 허락을 받아 로마를 떠 났고, 다음날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헌장 <영원한 목 자>(Pastor Aeternus)가 533 대 2로 승인되었다.
7월 19일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1871)이 일 어나 8월 초에 교황령을 보호하던 프랑스 군대가 철수하 였고 8월 중순 이후 공의회를 개최하려는 시도가 있었 다. 그러나 120명의 교부들이 모인 89번째 마지막 총회 가 9월 1일에 있은 지 일주일 후에 이탈리아 군대가 교
황령을 침공하여, 9월 20일에 로마가 함락되고 교황령 이 붕괴되었다. 따라서 주교 · 공석 주교좌 · 교리 문답서 에 관한 의안은 토의 또는 승인받지 못한 채 교황은 공의 회를 중단하였고, 이후로 공의회는 속개되지 못하였다.
〔결 과〕 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최종 투표에 참가하지 않은 주교들은 헌장 <영원한 목자>에 대해 계속 불복하 지는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언론 · 성직자 · 평신도들이 이 헌장을 환영하였고, 무류성에 대해 반대하거나 찬성 에 주저하던 주교들은 교구 성직자들의 항의에 시달리자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 또는 교구민들에게 보내는 사목 교서나 헌장 공표문을 통해 공의회 결정에 승복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무류성을 반대한 주교들 이 교구에 도착한 후 곧 헌장을 공표한 반면, 어떤 주교 들은 공표를 주저하였다. 이들은 공의회가 곧 속개될 것 을 기대하고 있었거나 모든 주교들이 헌장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류성을 반대하였던 미국, 아일랜드, 헝가리, , 이탈리아의 주교들도 헌장에 모두 승복하는 의 사를 밝혔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반대하였던 주교들이 헌장에 승복 하였지만, 교구민들에게 헌장을 공표하는 데에는 어려움 을 겪었다. 공의회를 반대하는 운동이 이미 조직되어 있 던 독일에서는, 그 해 7월 말 가톨릭 평신도, 대학 교수, 고등학교 교사들이 공의회를 반대한다고 선언하였고, 8 월 25일에는 뮌헨 대학교 신학대학 학장인 될링거를 중 심으로 13명의 가톨릭 신학대학 교수들이 바티칸 공의 회를 인정하지 않고 무류성 정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선언문에 서명하였다. 무류성에 찬성하였거나 반대하였 거나 간에 17명의 주교들은, 독일 교회의 분열이라는 위 기 의식 속에서 9월 중순에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기 를 권고하는 사목 교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사목 교서
의 권고를 거부한 가톨릭 신자들은 '구가톨릭교' (Altka- tholizismus)를 조직하여, 교회로부터 파문을 받았다.
이렇게 공의회는 교회 분열이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내 었지만 긍정적인 결과도 있었다. <하느님의 아들〉은 18 세기 계몽 사상의 영향을 받아 종교 진리를 얻는 데 있어 하느님의 계시의 가치를 무시하고 인간의 이성만을 강조 하는 합리주의적 이신론(理神論, deism)을 반대하여 계 시의 참된 의미를 가르쳤다. 또한, 인간의 이성은 종교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신앙주의 (信仰主義, fideism)에 반대하여 이성이 그리스도교 신앙 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옹호하였으며, 20세기에 등장하는 근대주의(modernismus)의 교회 침입 을 저지할 수 있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목자>의 발표로 13세기부터 내려오던 '공의회 우위설' (conciliarismus)과 갈리아주의가 내세웠던 국교회 사상 (國敎會思想)이 가톨릭 교회 안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교황령의 붕괴와 함께 교황의 속권은 상실되었지만 교황 의 영적(靈的) 권위는 수위권과 무류성의 정의로 더욱 강화되었고, 교황은 세속 군주가 아니라 세계 안에서는 정신적 지도자로, 그리고 교회 안에서는 영적 지도자로 서의 자리를 굳혔다. → 구가톨릭교 ; 갈리아주의 ; 무 류성 ; 수위권)
: II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공의회의 준비] 1959년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 도 주간의 마지막 날인 1월 25일에 성 바오로 대성전에 서 미사를 봉헌한 교황 요한 23세는, 베네딕도회 성 바 오로 수도원을 방문하여 그곳에 있던 17명의 추기경들 에게 공의회 소집 의사를 밝혔다. 이러한 발표는 교황이
나중에 고백하였듯이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라 마음에 떠올라 이루어진 것으로, 그는 이러한 생각을 초자연적 영감으로 판단하였다. 교황은 가톨릭 교회를 쇄신하고 그리스도교 일치를 촉진하기 위한 세 단계의 계획, 즉 로 마교구를 위한 로마 교구 회의, 전 교회를 위한 전체 공 의회, 동방 전례 교회의 교회법 반포와 함께 서방 교회의 교회법 현대화 개정을 공표하였다. 교회 밖에서 영국 성 공회는 그리스도교 일치를 내세운 공의회를 환영하였고, 다른 프로테스탄트 단체들과 동방 교회들은 유보적인 태 도를 취하였다.
1959년 5월 17일 교황 요한 23세는 준비 위원회를 설치하여 위원장에 국무성 장관을 임명하고 10여 명의 교황청 고위 성직자들을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준비 위 원회는 지역 교회의 주교들과 교황청 부서들 그리고 가 톨릭계 대학의 신학자들과 교회법학자들의 자문을 구하 고, 공의회에서 다룰 주제들의 윤곽을 마련하며 공의회 를 준비하는 기구들을 조직하는 업무를 맡았다. 6월 29 일에는 회칙 <베드로좌>(Ad Petri Cathedram)를 통하여 공 의회의 세 가지 목적, 즉 가톨릭 신앙의 발전, 그리스도 인의 생활 쇄신, 교회 규율의 현대 적응화를 제시하면서 프로테스탄트와 동방 교회의 형제들에게 공의회의 성공 을 위해 기도를 요청하였다. 이러한 요청은 교황이 후에 갈라진 형제들을 공의회에 초청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 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1960년 6월에 들어서서 준비 위원회는 1년 동안 공의 회의 토의 안건들을 수집 · 정리하여 총 16권 9,920쪽에 이르는 문서를 발간하였으며, 6월 5일에는 자의 교서 <하느님의 드높으신 뜻>(Superno Dei nutu)을 통해 36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중앙위원회' 산하에 신학위원회, 주교 및 교구 행정위원회, 성직자와 그리스도인 규율위원회, 수도자위원회, 성사 규정위원회, 전례위원회, 교육 및 신 학교위원회, 동방 교회위원회, 선교위원회, 평신도 사도 직위원회를 조직하였고, 매스콤위원회, 그리스도인 일치 촉진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11월 12일에는 '의전 위원회' 가 설치되었다. '중앙위원회' 는 위원회들의 활동
을 조정하고, 활동 결과를 검토하여 종합된 초안을 교황 에게 제출하여 공의회의 토의 안건으로 결정하는 업무를 맡았다.
1961년 12월 25일 교황은 사도 헌장 <인간의 구원> (Humanae Salutis)을 통해서 1962년에 로마 성 베드로 대 성전에서 공의회가 소집된다고 공표하였다. 1962년 2월 2일 공의회 개회일을 10월 12일로 확정한 교황은 앞으 로 개최될 공의회에 관련된 문헌들을 계속하여 발표하였 는데, 1월 6일 성직자들에게 공의회의 성공을 지향하며 성무 일도를 바치도록 촉구하였고, 4월 15일에는 주교 들에게 경건한 생활 자세를 갖추도록 조언하였으며, 4월 28일에는 신자들에게 공의회가 좋은 결실을 거두기 위 해 묵주의 기도를 통해서 성모님께 간구하도록 요청하였 다. 아울러 공의회 동안에 하느님의 도우심과 비추심을 청함에 있어서 덕행의 생활을 실천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리고 1962년 8월 6일에는 자의 교서 <다가오는 공의 회>(Appropinquante Concilio)를 통해 공의회 진행에 관한 지침서를 발간하였다. 회의는 '총회' , '위원회' , '공개 회의' 로 구분되었다. 총회는 제출된 초안에 대한 채택 · 기각 · 수정을 결정하며, 총회의 사회는 교황이 임명한 10명의 추기경으로 구성된 의장단에서 맡았다. 위원회 는 초안을 작성하고 총회에서 부결된 초안을 수정하여 위원회에 제출하는 업무를 담당하며, 각 위원회의 24명 의 위원들 중에서 16명은 교부들이 선출하고 나머지 위 원과 위원장은 교황이 임명하였다. 총회에서 안건을 표 결할 때에는 '찬성' , '반대' , '조건부 찬성' 으로 표명할 수 있으며, 유효 표결에는 참석자 3분의 2 이상의 찬성 이 요구되었다. 공개 회의에서 교황은 통과된 안건을 선 포하는데, 이 회의에서는 라틴어가 사용되었고 발언 시 간은 10분으로 제한되었다.
〔진행 과정〕 제1 회기 : 1962년 10월 11일, 공의회에 참석할 수 있는 2,908명의 교부들 중에서 2,540명이 참 석하였는데, 이는 불행하게도 공산권 교회의 주교들은 공의회 참석에 제한을 받아 국가에 따라 모두 참석하지 못하였거나 일부만이 참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
톨릭 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동방 교회와 프로테스탄트의 17개 교파에서는 35명의 대표들이 참관인으로 초대받아 참석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개회 연설에서 보수적이 며 방어적 태도를 보여 왔던 교황청 성직자들을 겨냥한 듯 파괴밖에 보지 못하고 현대 사회를 나쁘게만 생각하 며 언제나 재난만을 예고하는 이들을 비판하면서, 이들 을 '불운의 예언자' 라고 불렀다. 마지막으로 교황은 세 가지 신비로운 일치, 즉 가톨릭 신자 사이의 일치, 가톨 릭 신자와 갈라진 그리스도인의 일치, 가톨릭 교회와 그 리스도교와 다른 신앙을 지닌 종교인의 일치를 이루느 것이 공의회의 임무라고 강조하였다.
10개 위원회의 위원을 선출하기 위한 10월 13일 총회 에서는 교황청에서 작성한 명단이 제출되었다. 그러나 즉시 선거에 들어가려는 교황청의 계획에 대해 후보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표결에 참가할 수 없다고 반대하며 선 거를 연기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 의견에 대다수 의 교부들은 박수로 동의하였고, 이러한 동의는 의장단 에 의해 받아들여져 10월 16일까지 미루어졌다. 따라서 제1차 총회는 20분 만에 끝났고, 이어서 교부들은 지역 별 주교 회의를 열어 그들의 후보자 명단을 작성하였다. 제2차 총회에서는 이탈리아 주교들의 숫자가 크게 줄어 든 반면, 다른 지역에서 적절한 비율로 위원들이 선출되 었다. 이 사건은 교부들이 독립된 주교단임을 자각하고, 공의회가 교황청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10월 22일 제4차 총회에서는 전례에 관한 문헌이 토 의 안건으로 제출되었다. 이 문헌을 토의하는 과정에서 소수의 보수파와 다수의 진보파가 나뉘어져 공의회의 모 든 회기 동안에 대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두 세력은 고정 된 그룹이 아니라 사안에 따라 구분되었다. 전례 문헌에 대해 교회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보수파는 어떠한 변화, 특히 전례에서 라틴어 대신에 모국어를 사용하는 변화를 반대하였고, 진보파는 '중앙위원회' 에서 승인된 문헌이 명백하게 함부로 바뀌어 제출된 데에 불만을 표시하였 다. 보수파의 대표 추기경이 진보파가 지지하는 공동 집 전 미사와 양형 영성체(兩形領聖體)를 반대하면서 공의 회의 혁명적 경향에 대해 불만을 표명하면서 발언 시간 을 초과하였을 때, 사회자가 마이크의 스위치를 끄자 다 수의 교부들은 박수를 쳤다.
11월 14일에는 신앙의 원천이 성서와 성전으로 명백 하게 구분된 계시에 관한 초안에 대한 반론이 일어났다. 프로테스탄트를 염두에 둔 진보파는 계시의 두 원천설 은 교회 일치적 시각에서 볼 때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반 론(反論)을 제기하면서 초안이 너무 일방적이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하며, '그리스도교 일치 촉진 사무국' 과 협 력하여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1월 20일에 초 안이 표결에 붙여졌는데 반대 1,386표 찬성 822표였다. 그러나 반대 표가 3분의 2가 되지 못하여 안건이 토의에 상정되었을 때, 다수가 반대하는 안건을 토의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한 교황은 '신학위원회' 와 '그리스도교 일 치 촉진 사무국' 이 합동 위원회를 설치하여 초안을 수정
하여 작성하도록 지시하였다.
11월 23일부터는 매스컴에 관련된 안건에 대한 토론 이 있었고, 11월 26일부터 5일 동안에는 동방 교회와의 일치에 관한 안건이 토의되었다. 그리고 12월 1일에 제 출된 교회에 관한 안건은 격렬한 논쟁에 휘말렸다. 진보 파는 제출된 안건이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로마 교회 조 직과 동일하게 묘사하고 있고, 하느님 백성과 주교단에 대한 설명이 없으며,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충분하 지 못하다고 불만과 아쉬움을 나타내면서 초안의 재작성 을 요구하였다. 교황은 안건을 표결에 붙이지 않고, 수정 하도록 지시하였다. 따라서 제1 회기 중에는 공의회에서 채택될 만한 초안이 하나도 없었다. 12월 5일 교황은 준 비 위원회가 작성한 초안들을 사목적 관점에서 다시 검 토하고 준비 위원회의 작업들을 지휘하는 '조정위원회' 를 설치하였고, 공의회는 휴회 기간에 들어갔다.
1962년 12월 8일 폐회 연설에서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바치는 행위,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는 행위, 하느님의 섭리를 따르려고 노력하 는 행위라고 정의하였다. 교황은 공의회 중에 보인 견해 의 차이는 놀랄 일이 아니며 견해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 서는 시간이 걸리고 논쟁은 좋은 결실을 맺는 데에 유익 하다고 하였다. 덧붙여 교황은 다음 회기까지 공의회의 작업은 계속되며 '조정위원회' 가 설립되어 공의회의 업 무를 조정하고 지도하며, 위원회들의 활동을 감독하는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개정된 초안들 은 주교들에게 보내져 평가를 받아 다음 회기에 다루어 질 수 있도록 위원회가 다시 수정하게 된다고 언급하였 다. 교황은 공의회에서 나올 구원의 결실을 가톨릭 신자 들뿐만 아니라 갈라진 형제들과 그리스도교와 다른 신앙 을 지닌 종교인들도 거두기를 희망하였다.
제2 회기 : 1963년 6월 3일 교황 요한 23세의 사망 으로 공의회의 활동은 중단되었으나 새 교황 바오로 6세
(1963~1978)는 공의회의 속개를 선언하고, 1963년 6월 29일에 제2 회기의 개회일을 그 해 9월 29일로 정하였 다. 조정위원회는 업무를 즉시 재개하였다. 교황은 제1 회기 때 나타난 공의회의 조직과 진행에 있어서의 단점 들을 고치기 위해 공의회 지침을 개정하여 의장단을 12 명으로 증원하였고, 총회에서 토론을 지도하는 조정자로 4명의 추기경을 임명하였다. 교황은 또한 총회에 평신도 가 방청할 수 있는 규정을 만들었으며, 토의 안건을 거부 하거나 연기하는 데에 필요한 다수를 50% +1로 줄이는 의사 진행법을 개정하였다. 교황은 제1 회기보다 더 많 은 프로테스탄트와 동방 교회의 참관인들을 초청하였고, 주교들에게는 교구 성직자와 신자들이 공의회 성공을 위 해 기도하도록 요청하였다.
1963년 9월 29일 교황은 제2 회기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진리를 잘 연구하고 정립하고 표현할 때가 도래하 여 교회를 중심 의제로 다루어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드 러내도록" 정의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공의회가 교 회 쇄신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가톨릭 교회의 바람직 하지 못한 모습을 인정하고, 본질적 전통과 단절하기 위 해서가 아니라 부적절한 형식을 제거하고 결실이 풍부한 것을 되찾음으로써 전통을 존중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리 고 가톨릭 교회는 갈라진 형제들과 분열의 책임을 함께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고백하면서 서로 용서하여 일치가 회복되기를 요청하였다. 마지막으로 교황은 공의회가 현 대 사회와 통하는 다리를 놓기를 기대하면서, 교회는 사 회에 대한 초연한 입장에서 벗어나 사회에 대한 관심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0월 29일 교부들은 교회 헌장의 수정된 초안을 다루 면서 마리아에 대한 의안을 교회 헌장의 마지막 부분에 삽입하여 다루기로 결정하였다. 아울러 제2 회기에서는 주교와 주교직, 그리스도인의 일치, 종교의 자유, 비그리 스도교인 특히 유대인에 대한 교회의 태도에 대해 토의 되었다. 마리아의 교회 안에서의 위상(位相)과 주교직과 주교단의 성격은 보수파와 진보파의 격렬한 논쟁점이 되 었다. 이 회기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주교단에 대한 교 리를 다루는 과정에서 진보파가 검사성성이 신학자를 다 루는 태도를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교황청의 개혁을 요구 하였을 때였다. 12월 4일에 교부들은 <전례 헌장>(Sacro- sanctum Concilium)과 <매스 미디어에 관한 교령〉(nter Mirifica)을 통과시켜 교황 바오로 6세가 이 두 문헌을 반 포한 데 이어, 폐회 연설에서 교황은 교부들이 보여 준 노고에 감사하며 다음 회기에서 나머지 안건이 완성되기 를 희망하였다.
제3 회기 : 1964년 9월 14일 새로운 전례에 따라 5 대륙을 상징하는 24명의 주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한 교황 바오로 6세는, 개회 연설에서 교회의 본질과 사명 을 분명하게 밝히고, 교계 제도와 주교직의 기원 · 본성 · 사명 · 권한을 고찰하는 것이 공의회의 중요한 업무라 고 규정하였다. 아울러 교회의 중앙 집권 체제와 교황권 의 강화가 주교단의 권한을 축소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 히 하였다. 교황청 중앙 집권 체제는 지배욕에 끌려 만들
어진 인위적인 제도가 아니라, 교계적 교회의 성격을 나 타내고 봉사를 위한 제도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교황은 방청인으로 초대된 평신도 대표단, 특히 여신도 대표에 게 환영의 말을 전하고, 갈라진 그리스도교 형제들에게 한마음 한뜻으로 일치를 방해하는 요소와 오해, 그리고 의심이 모두 없어지기를 기대하였다.
교황의 제2 회기 폐막 연설에서 공의회가 제3 회기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되었기 때문에 조정위원회는 안건을 준비하면서 중요한 문제들만 다루기로 결정하였다. 따라 서 공의회의 진행을 빠르게 진행하기 위해 지침에 발언 권을 까다롭게 제한한 규정을 추가하였다. 이러한 조치 는 교황청의 보수파가 몇 가지 안건들을 끝내지 않으려 고 회의를 서두려고 시도하지 않는가 하는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공의회는 교회, 주교의 사목 직무, 종교의 자 유, 유대교와 비그리스도교, 하느님의 계시, 평신도 사도 직, 가톨릭 동방 전례의 교회, 현대 사회 안에서의 교회, 사제, 그리스도교 일치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그리고 10월 6일에는 본당 사목을 수행하는 신부들의 대표로서 몇 명의 본당 신부를 총회에 참석하도록 초청하였다. 이 러한 토론 과정 속에서 공의회는 몇 차례 위기를 맞이하 였다. 10월 9일에 조정위원회가 종교의 자유에 관한 초 안 수정 작업을 새로운 위원회를 구성하여 다루고, 유대 교에 대한 초안은 교회론 안에 삽입한다는 지시를 내리 자, 교부들은 다수의 의견을 무시하고 회의의 자유를 위 태롭게 한다고 항의하여 이 지시는 취소되었다. 11월 19일에는 그리스도교 일치 촉진 사무국' 이 이미 다수 의 찬성으로 채택된 교회 일치에 관한 문헌이 '위로부 터' 지시가 있어 19개 부문을 수정하였다고 보고하자, 교부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는 소수파 보수주의자들 이 40개 부문의 수정을 요구하자 교황이 그리스도교 일 치 사무국' 과 의논하여 21건을 기각하고 19건을 의안에 삽입한 것이었다. 다수파는 새 의안 전체를 살리기 위해 서 타협을 인정하였다.
10월 23일에는, 안건을 다루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 요하다는 다수파들의 주장에 따라 공의회는 제4 회기를 가질 것을 결정하였고, 토의가 종결되지 못한 안건들은 제4 회기로 넘겨졌다. 11월 21일 교황 바오로 6세는 마 리아 성지(聖地)를 갖고 있는 24명의 주교들과 함께 미 사를 봉헌한 다음, 거의 만장 일치로 채택된 <일치 교령> (Unitatis Redintegratio) , <교회 헌장>(Lumen Gentium), <동 방 교회에 관한 교령>(Onietalium Ecclesiarum)을 반포하 였다. 폐회 연설에서 교황은 공의회에서 주교직의 품위 가 장엄하게 선언되고 임무와 기능이 명기(明記)된 것에 대해 기쁨을 표명한 데 이어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에 게 준 수위권이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에게 주어졌음을 알리고, 교황권이 확인될 때에 주교의 권위 문제가 해결 될 수 있음을 밝혔다. 또 <교회 헌장>에서 밝혀진 교회의 신비에 대한 가르침으로 교회의 참된 모습이 신자들이 뚜렷하게 이해되기를 기대하면서 끝으로 마리아를 신자 들과 사목자의 어머니로 선언하였다.
제4 회기 : 1965년 9월 14일 24명의 주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한 교황 바오로 6세는 개회 연설에서, 공의 회의 마지막 회기 동안 부과된 중대한 책임을 영적 자세 를 갖고 수행할 것을 교부들에게 요청하였다. 교황은 사 랑의 교류가 마지막 회기의 특색이어야 함을 강조하면 서, 공의회를 하느님에 대한 사랑, 교회에 대한 사랑, 인 류에 대한 사랑과 같은 삼중의 사랑의 행위로 특징지웠 다. 그리고 교황은 세 가지 유의 사항에 언급하였다. 첫 째로 그 동안 최종안을 작성하는 업무를 수행한 위원회 위원들의 노고에 감사의 뜻을 표명하였다. 둘째로 교황 은 필요에 따라, 즉 교회의 공동선(共同善)을 위해 교황 이 적당하다고 판단하여 지역 교회의 주교들의 자문과 협조를 얻기 위해 소집되는 '주교 대의원 회의' (Synodus Episcoporm)의 설립 예정을 밝혔다. 셋째로 교황은 유엔 창립 20주년을 맞아 유엔 본부를 방문하여 평화의 메시 지를 전달할 계획을 밝혔다.
10월 5일 유엔에서 로마로 돌아온 교황은, 공의회에 서 일부 교부들이 성직자의 독신 제도를 토의하자는 움 직임이 있자 의장단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 제도는 교회 의 전통 때문만이 아니라 현대 세계에서 절실하게 요구 되기 때문에 보존되어야 하며, 공개 토론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언급하면서 독신 생활에 관한 규율은 오히려 강화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 동안 교황은 금육재 와 단식재에 관한 법 개정에 관해 주교 회의에 문의하였 고, 성 바오로 대성전에서 갈라진 형제들과 일치의 기도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1965년 10월 28일 제7차 공개 회의에서 <주교들의 교회 사목직에 관한 교령>(Christus Dominus), <수도 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Perfec- tae Caritatis),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Optatam Totius) ,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 <그리스도교
적 교육에 관한 선언>(Gravissimum Educationis)이 반포되 었고, 11월 18일 제8차 공개 회의에서는 <계시 헌장> (Dei Verbum),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Apostolicam Actuositatem)이 선포되었다. 12월 7일 제9차 공개 회의 에서는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Dignitatis Humanae), <교 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Ad Gentes) <사제의 직무 와 생활에 관한 교령)(Presbyterorum Ordinis), <사목 헌장> (Gaudium et spes)이 반포되었다. 아울러 교황은 신자들이 공의회의 가르침을 잘 알고, 공의회 교령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였으며, 신자들이 개인 생활이나 사회 생활에서 영성 쇄신에 박차를 가하고 하느님께 공의회의 성과를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기를 희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원이 이루어지기 위해 1966년 1월 1일부터 5 월 29일까지를 특별 성년으로 반포하였다. 12월 8일 공 의회는 위정자, 지식인, 예술가, 여성, 노동자, 고통받는 이, 청소년에게 메시지를 발표하고, 교황은 성 베드로 대 성전 광장에서 열린 폐회식에서 공의회가 끝났음을 선포 하였다.
〔결 과〕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안팎으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일부에서는 비판의 소리도 있었다. 비판의 소리는 바티칸 공의회 이후 신학 의 다원주의가 가톨릭 신앙을 혼란에 빠뜨려 미사에 참 여하는 신자들의 숫자가 계속 감소되었고, 성소를 포기 하는 성직자와 수도자의 숫자는 심각하게 증가되었음을 지적하였다. 비판자들은 공의회의 정신에서 보이는 교 회의 민주화 현상으로 교황과 주교의 권위는 약화되고, 교회의 세계에 대한 영향력은 사라졌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공의회에서 나타난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대립 으로 교회가 분열된 모습을 드러냈고, 공의회가 내세운
종교 자유, 종교간 대화, 그리스도교 일치는 선교사들에 게 있어서 선교는 개인의 종교 자유를 침해하고 비그리 스도교인과 비가톨릭 그리스도인의 개종이 공의회의 정 신에 어긋나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을 지니게 하였으며, 종교 무분별주의로 이끄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강조하 였다.
그러나 진보적 견해를 가진 이들은 교황 요한 23세의 '아죠르나멘토' (aggiornamento)를 구현하기 위해 내적 동 요는 필요한 과정이라면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새로운 전례 생활에 있어서 모국어 사용으로 신자들은 미사에 적극적 자세로 참여하게 되었고, 하느님 백성의 교리는 성직자 중심의 교회에서 벗어나 교회의 민주화로 이끌어 현대 세계에서 교회의 사명을 이루는 데에 평신도의 광 범위한 협조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교회 일치 자세는 교파주의의 다툼을 진정시켰고, 반종교 개혁에 종지부를 찍었다. 종교의 자유는 교회가 다른 종교에 대 한 불관용의 비난에서 벗어나 종교 관용 원칙을 제시하 는 것이고, 종교간 대화는 다른 종교들이 지니고 있는 가 치를 존중하면서 이는 토착화 선교 방법의 출발점이 될 수 있었다. 이처럼 교회 일치, 종교 자유, 종교간 대화는
선교 활동을 저해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공의회 진행 과정 속에서 나타난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갈등은 교회 를 불확실성 시대로 이끄는 듯하였지 만, 공의회는 신성한 경쟁과 희망으 로 차 있었고 새로운 가능성을 약속 하는 시작과 움직임이 있었다. 공의 회에서 전통과 진보의 화해가 발견될 수 있고, 변화하는 세계 안에서 교회 의 위상이 유지되었으며, 격렬한 대 립과 긴장은 공의회와 교회의 자유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대립은 단순한 인신 공격과 당파적 대립이 아니라 개인의 건전한 양심과 확실한 신념을 토로한 거룩한 대립이었다. 미사로 시작되는 공의회의 모습을 볼 때, 그것은 전례적 성격을 띤 교회 활 동이고 단순한 의회가 아니었다. 모 든 주교들은 공의회를 통해서 직접 교황을 중심으로 주교단의 일치와 교 회의 일치, 그리고 교회의 세계화를 체험하였다.
예전에는 공의회의 결정을 실천하 는 책임을 추기경단이 담당하였지만 바티칸 공의회 이후는 위원회를 설치 하여 이러한 업무를 맡겼다. 1966년 1월 3일에 조정위원회가 설치되어 공 의회의 교령을 해석하는 업무를 맡았 는데, 이 위원회는 1967년 7월 11일 에 '공의회 교령 해석위원회' 로 이름
을 바꾸었다. 이외에도 공의회의 결정을 이행하기 위해 서 주교와 교구 행정위원회, 수도자위원회, 선교위원회, 그리스도교 교육위원회, 평신도 사도직위원회가 설치되 었고, 위원들은 공의회에서 활동했던 준비 위원들로 구 성되었다. 공의회 폐회 이전에 설립된 그리스도교 일치 촉진 사무국, 비그리스도교 사무국, 비신앙인 사무국, 교 회법 개정위원회, 전례 헌장 실시 평의회, 홍보위원회도 존속하여 공의회의 결정을 실천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교황청 개혁은 역대 교황들이 주도하였지만, 바티칸 공의회 이후는 현대 세계 안에서 의 교회에 관한 교령을 토의하는 과정 속에서 나온 요구 와 교황의 약속으로 교황청의 기구가 재조직되었다. 국 무성' 은 교황청 행정 부서의 업무를 조정하는 권한을 갖 고 있었고, 이제까지 교황청에서 최고의 자리를 누렸던 '검사성성' 은 공의회 진행 과정 속에서 요구되었던 대로 '신앙 교리성' 으로 바뀌어 국무성에 속하게 되었으며, 금서를 규정할 때에는 저자의 구두 및 서면을 통한 답변 과 저자가 속한 교구장의 의견을 들어야 했다. 그 외에도 여러 성(省)들의 이름이 바뀌었고, 특히 '평신도 평의 회' 가 신설되어 평신도의 교회 안에서의 위상이 드러났
다. 아울러 교황청의 행정 기구에 교구 주교들이 평위원 으로 임명됨으로써 교황청의 관료적인 모습을 벗게 되었 다.
〔의 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역사상 제일 큰 규모의 공의회였다. 공의회가 다룬 안건도 방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참석자들도 많고 다양하였다. 참석 교부들 은 2,908명 중에서 2,600명 이상이 참석하였으며, 신학 자와 전문가들을 포함하여 전체 참석 인원은 3,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공의회 참석 교부들 은 유럽인들이었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는 각국에 서 주교들이 참석하였다. 공의회 참석권을 지닌 주교들 중에서 유럽 교부가 1,089명, 라틴 아메리카에서 온 교 부가 573명, 북아메리카 교부가 404명, 아시아에서 온 교부가 374명, 아프리카 교부가 296명, 오세아니아에서 온 교부가 75명이었다. 제2 회기에 방청인으로 초대되 었던 11명의 평신도 대표가 제4 회기에 이르러서는 수 녀들을 포함하여 52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교부들과 의장단의 요청이 있을 때에는 자문에 응하고 보고 자료 를 준비하였다.
고대 동방 교회, 동방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의 대표 그리고 세계 교회 협의회, 루터교 세계 연맹, 영국 성공 회, 개혁 교회 세계 연맹, 세계 감리교회 협의회와 같은 프로테스탄트 국제 기구의 대표들이 참관인으로 참석하 였는데, 제4 회기에 프로테스탄트 참관인들은 80여 명 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제2 회기 중에 바오로 6세 교황 을 알현하였고 교부들을 만나면서 가톨릭 교회에 대한 오해를 씻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교부들도 회의 중에 갈라진 형제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 에 대한 편견을 버릴 수 있었다. 참관인들은 공의회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였는데, 그들은 발언권과 투표 권은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교 일치 촉진 사무 국' 을 통해 가톨릭 교회 신학자들과 만나서 토의 안건에 관한 문제들을 논의하였다. 제4 회기 중 바오로 6세 교
황은 형제적 사랑의 표시로 동방 교회에서 가장 추앙받 던 안드레아 사도의 유해를 사도가 순교한 곳으로 추정 되는 파트라스(Patas)로 보냈고, 공의회 폐회 전날인 12 월 7일에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함께 1054년에 내 려진 상호 파문을 철회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는 전기, 전화, 타자기 외에 통 신과 교통 수단들이 동원되었다. 미국 교회에서는 유엔 회의에서 사용하고 있는 기계와 비슷한 동시 번역 기구 를 제공하겠다는 제의를 하였지만, 라틴어를 공의회 언 어로 정한 교황청은 이를 사양하였다. 공의회에 관한 소 식은 전세계의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잡지를 가득 메 웠다. 물론 기자들은 회의 장소에 접근이 허락되지 않았 지만, 그들의 공식 취재원(取材源)은 매주 목요일 오후 정기 기자 회견에서 배부되는 보도 자료였고 아울러 그 들은 교부들과 전문가의 보고서에 의존하여 기사를 작성 하였다. 그러나 기자들이 공의회에 관한 기사를 편협한 국가주의에 빠져 정치적이며 세속적 문구를 사용하고 있 다고 교회로부터 자주 경고를 받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예전의 공의회들과 달리 교회 의 교리를 공격하거나 교회 일치를 저해하는 것을 다루 기 위해 소집되지 않았다. 교황 요한 23세는 개회 연설 에서 공의회의 목표는 교회의 주요 교리를 토의하며 전 통적 교리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면서 이러한 신 학 토론을 위한 것이라면 공의회는 필요없다고 역설하였 다. 아울러 교황은 공의회가 교회의 가르침을 손상시키 는 오류와 이단을 단죄하는 데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교황은 과거에 교회가 언제나 오류를 엄격 하게 정죄(定罪)하였으나 오늘날의 교회는 "자비의 약으 로 고치고 자신의 가르침을 제시하면서, 현대 요구에 응 답하는 것이 낫다"는 견해를 밝혔다. 교황은 공의회의 목적은 불화의 씨앗을 근절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평 화와 일치를 증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 공의회 헌 장 ; → <계시 헌장> ; <교회 헌장> ; <그리스도교 교육
선언> ; <동방 교회에 관한 교령> ; <매스 미디아에 관한 교령> ; 바오로 6세 ;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 <사목 헌장> ; <사제 양성에 관한 교 령> ; <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 〈선교 교령> ; <수도 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 ; 요한 23 세 ;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 <전 례 헌장> ;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 <주교들의 교회 사목직에 관한 교 령> ;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 참고문헌 J.L. Murphy, The General Councils of the Church, Milwakee, The Bruce Publishing Co., 1960/ H. Jedin, Ecumenical Coumcils ofthe Catholic Church, trans. by Ernest Graf from the German edition, Kleine Konziliengeshichte, 3rd imp., New York, Herder and Herder, 1960/ P. Hughes, The Church in Crisis : A History ofthe Twenty Great Councils, London, Burns & Oates, 1961/ E.I.
Watkin, The Church in Council, London, Darton, Longman & Todd, New York : Sheed & Ward, 1960/ F. Dvornik, The General Councils of the Church, London, Burns & Oates, 1961/ H. Daniel-Rops, The Second Vatican Coumcil : The Strory behind the Ecumenical Coumcil of Pope John XXIII, trans. by Alastair Guinan from the French edition, Vatican II : Le Concile de Jean XXIII, New York, Hawthorn Books, 1962/ C. Butler, The Vatican Coumci 1869~1870, edited by Christopher Butler, Westminster, Maryland, The Newman Press, 1962/ W. McDonald ed., The General Council : Special Studies in Doctrinal and Historical Background, Washington DC, Catholic Univ. of America, 1962/ J.H. Miller ed., Vatican II : An Interfaith and Appraisal, Notre Damme, Univ. of Notre Damme Press, 1966/ R. Aubert, The Second Vatican Council, The Christian Centuries Volune V The Church in a Secularised Society, edited by Roger Aubert, London, Darton, Longman and Todd, 1971, pp. 624~638/ -, The Vatican Council, History ofthe Church Volume VIII : The Church in the Industrial Age of Liberalism, edited by Hubert Jedin, trans. by Peter Becker from the German edition, Handbuch der Kirchengeschichcte, vol. 6-1 : Die Kiche in der Genwart : Die Kirche zwischen Revolution und Restauration, London, Burns & Oates, 1981, pp. 315~330/ H. Jedin, The Second Vatican Council, History of the Church Volume X : The Church in the Modem Age, edited by Hubert Jedin, trans. by Anselm Biggs from the German edition, Handbuch der Kirchengeschicherte, vol. 7 Die Weltkirche im 20 Jahrbundert, London, Burns & Oates, 1981, pp. 96~151/ A. Hastings ed., Modem Catholicism : Vatican II and After, London, Oxford Univ. Press, 1991/ R.P. McBrien, Catholicism, new ed., New York, Harper San Francisco, 1994/ 《가톨릭新聞 影印本》 1~3, 가톨릭新聞社, 1982/ Henry van Atraelen · Leo Elders · 瀆寬五郎, 현석호 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해설 총서》 1~6, 성바오로출판사, 1982~1993. 〔金聖泰〕
바티칸 공의회
公議會
[라]Concilium Vaticanum · [영]Vatican Counc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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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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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7월 18일의 제1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식 광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