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 요한 제바스티안 Bach, Johann Sebastian(1685~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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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바흐.

독일의 작곡가. 수많은 종교 음악과 기악곡을 남긴 바 로크 시대의 위대한 작곡가. 1685년 3월 21일에 아이제 나흐(Eisenach)시(市)의 현악기 연주자였던 요한 암브로 시오(Johann Ambrosius, 1645~1695)와 엘리사벳(Elisabeth
Lämmerhirt, 1644~1694)의 네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나 음악 가문의 전통에 따라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현악기와 관악기를 배웠다. 10세 때 아버지마저 여읜 바흐는 오르 드루프(Ohrdruf)의 오르간 주자였던 형 요한 크리스토프 (Johann Christof)와 함께 살면서 그에게서 오르간을 배웠 다. 1700년부터 뤼네부르크(Lüneburg)의 미카엘 학교를 다녔지만 이미 오르간에 심취해 있었던 그는, 오르간에 대한 배움의 열정으로 여러 번 함부르크(Hamburg)로 갔 고, 1705년 10월에는 덴마크의 작곡가인 북스테후데(D. Buxtehude)의 저녁 음악회를 듣기 위하여 뤼베크(Lübeck) 까지 300km를 도보로 여행하기도 하였다. 음악가로서의 그의 삶은 흔히 그가 살던 지역을 따라 다음과 같이 크게 는 두 시대로 나뉘어진다.
제1기(1703~1722년) : 바흐가 중소 도시의 교회 오 르간 주자, 그리고 쾨텐(Cöthen)의 궁정 악장으로 활동하 던 때이다. 1703년 바이마르(Weimar) 궁정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같은 해 가을부터는 오르간 주자로 아른슈타 트(Arnstadt)에서 활동하였다. 이곳에서 1704년부터 작 곡을 시작한 바흐는, 1707년 뮐하우젠(Mühlhausen)으로 자리를 옮겨 그 해 10월 17일 그의 사촌 마리아 바르바 라(Maria Barbara Bach, 1684~1720)와 결혼하였다. 1708년 에는 바이마르 궁정에서 오르간 연주자 및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뮐하우젠에서 시작한 창작을 계속 하였다. 이때 작곡한 칸초네(canzone) , 칸타타(cantata) , 교회 콘체르토(concerto)를 포함한 많은 오르간곡과 교회 성악곡들은 매우 독창적이다. 특히 이 당시 그의 칸타타 는 성서 또는 코랄(chorale, 프로테스탄트 찬송가) 가사를 기 초로 하고 있다. 실내악 음악가(바이올린, 쳄발로)에 이어 합주단 악장으로 승진하였으나, 전 궁정 악장인 드레제 (J.S. Drese)가 사망한 후 실력이 부족한 그의 아들이 취임 하자 이에 분개한 바흐는 바이마르 궁정에 사임을 요청 하였다.
1717년 쾨텐으로 옮겨 그곳의 궁정 악장으로 임명된
바흐는 훗날, 쾨텐에서의 만족스러웠던 삶을 "나는 음악 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자비로운 군주를 만났고 그래서 그에게서 평생을 보낼 것으로 생각하였다" 고 회고하였다 (1730년의 편지). 1720년에 부인이 사망하고 그 이듬해 12월 3일 안나 막달레나(Anna Magdalena Wülcken, 1701~ 1760)와 재혼한 바흐는 이곳에서 건반 악기 교재 음악인 《인벤손》(Inventions, 1720),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Das Wohltemperierte Klavier) 제1권(1722) 등을 작곡하였으며, <브란덴부르크 협주곡>(Brandenburg Concertos, 1721)과 40 여 곡의 세속 칸타타 등 빼어난 세속 음악들을 작곡하였 다.
제2기(1723~1750년) : 라이프치히(Leipzig)의 칸톨 (cantor, 음악 교사) 시대로, 1740년을 기점으로 하여 다시 전기와 후기로 세분된다. 1722년 라이프치히의 시의회 는 오늘의 인문계 중등 학교에 해당되는 시내의 토마스 학교(Thomasschüle) 칸톨이자 중심 교회의 음악 감독이었 던 쿠나우(J. Kuhnau, 1660~1722)가 사망하자 후계자를 물 색하였다. 텔레만(G.P. Telemann, 1681~1767), 그라우프너 (C. Graupner, 1683~1760)에게 위촉하였지만, 이들의 거절 로 바흐가 차선책으로 선택되었다. 그는 궁정 악장에서 칸토르로 사회적 신분을 낮추어야 하는 것 때문에 크게 상심하였지만, 자신의 큰 꿈을 펴고 무엇보다 자식들의 교육을 위하여 대도시 라이프치히로 이전할 것을 결심하 였다.
① 라이프치히 전기(1723~1740) : 이 시기에 바흐는 칸톨로서 교회 음악의 창작에 혼신을 다했다. 그는 오라 토리오 4곡, 수난곡 2곡, 상투스(Sancus) 5곡, 크리스테 엘레이손(Christe eleison) 1곡, 마니피캇(Magnificat, 1723/ 1730) 1곡, 모테트 그리고 5년 간의 전례를 위한 300여 곡의 칸타타 등 많은 교회 성악 음악을 작곡하였다. 현재 200여 곡이 전하는 바흐의 칸타타의 가사는 성서나 찬 송가를 제외하고는 거의 바이마르의 프랑크, 함부르크의 노이마이스터, 라이프치히의 치글러 미망인, 라이프치히 의 우체국장 헨리치(일명 피칸데르)에 의하여 쓰여졌다. <요한 수난곡>(Passion according to St. John, 1723)과 <마태 오 수난곡>(St. Matthew Passion, 1729) 그리고 성탄 · 부활 · 예수 승천 · 성신 강림 대축일의 미사를 위한 칸타타풍 의 오라토리오들은 모두 이 시기에 쓰여진 것들인데, 이 가운데 <성신 강림 오라토리오〉는 분실되었다. <성탄 오 라토리오>(Chistmas Oratorio, 1734)는 4명의 독창자와 4 성부 혼성 합창 그리고 소규모 오케스트라로 편성되는데 성탄 당일에는 바순, 둘째 날에는 오르간, 그리고 셋째 날 에는 철로와 비올라가 계속 저음 악기로 사용된다. 코랄 은 바흐의 모든 칸타타 · 오라토리오 · 수난곡에서 교회 적 내용을 선언적으로 표현하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Mass in B Minor, 1733)은 루터교의 가 사를 사용했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가톨릭 전례 음 악에 속하지 않는다. 높은 예술성 때문에 자주 연주되는 이 미사곡은 24개의 합창, 아리아, 이중창을 갖춘 일종 의 칸타타 미사곡이다. 이 시기에 그는 오르간 음악과 세 속 음악도 작곡했는데, 세속 음악은 텔레만이 창설한 라
이프치히 대학의 콜레지움 무지쿰(Collegium musicum, 대 학생 아마추어 합창단)의 지휘를 맡게 된 1729년과 그 이 듬해부터이다. 바흐가 이 합창단을 위해 작곡한 합창곡 들에는 건반 악기 연습곡, 콘체르토 등의 기악 음악과 함 께 그의 탁월한 예술적 능력이 표현되어 있다. 이 작품들 과 더불어 바흐는 1736년에 을 작센의 선제후(選帝侯)에게 헌정하고 작센 왕가의 궁정 악장 칭 호를 받았다.
② 라이프치히 후기(1741~1750) : 이 시기는 바흐가 자기 예술의 완성을 향해 자신과 치열한 투쟁을 하던 때 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골드베르크 변주곡>(Gold- berg Variations, 1742),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제2권 (1742), <카논적 변주곡>(1746/1747)을 작곡하였으며, 1747년 5월 포츠담(Potsdam)을 방문한 폴란드의 왕 프 리드리히 2세(Friedrich Ⅱ)가 준 주제로 즉흥 연주한 것 을 <음악적 헌정>(Das musikalische Opfer, 1747)으로 완성 하였다. 또한, 을 완결시켰으며(1748), 4 개의 미사곡(1745~1747), 오르간 코랄, <푸가의 기법> (Die Kunst der Fuge, 1745~1750) 등 걸작들을 작곡하였다. 이 작품들은 한결같이 바흐의 음언어가 중세에서부터 르 네상스 시대를 거쳐 이어져 온 대위법적 폴리포니 전통 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바흐는 1747년 안질에 걸려 장님이 되었고, 그로 인 해 <푸가의 기법>을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시력을 잃은 그는 두 눈을 수술하였지만 실패하였고, 건강은 더욱 악 화되어 결국 1750년 6월 28일 라이프치히에서 사망하 였다. 사망한 후 50여 년 동안 그의 음악은 빛을 보지 못 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음언어에 과감한 반음계적 화성 을 추가하여 바로크 시대의 감정 이론과 음악 상징법을 표출함으로써 자연스러움을 지향하던 당시의 음악 사조 로부터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19년 멘델스존 (Mendelssohn, 1809~1847)의 <마태오 수난곡> 상연의 성공 에 힘입어 19세기에 들어와 그의 음악은 재평가되기 시 작하였다. 빼어난 오르간 주자이자 비범한 즉흥 연주가 였던 생전의 바흐를 탁월한 작곡가로 재평가하는 일은 바흐가 사망한 지 69년 만에, 이 작품이 쓰여진 지 90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평 가〕 바흐는 음악을 수공예적 예술로 이해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은 가르치고 배우며 모든 힘을 다하 여 노력함으로써 얻어지는 기술이었다. 그래서 바흐는 탁월한 교사로 가족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마리아 바 르바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일곱 자녀 가운데 빌헬름 프리데만(Wilhelm Friedemann, 1710~1874) , 칼 필립 엠마 누엘(Carl Philipp Emmanuel, 1714~1788) 그리고 안나 막달 레나에게서 태어난 일곱 딸과 여섯 아들 가운데 요한 크 리스토프 프리드리히(Johann Christoph Friedrich, 1732~ 1795)와 요한 크리스티안(Johann Christian, 1735~1782)을 훌륭한 음악가로 배출하였다. 그리고 《오르간 소곡집》 (Orgelbüchlein, 1717)과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1722/ 1744)은 가족의 음악 교육을 위한 교재들이었다. 한편, 음악을 천재의 작업으로 파악한 낭만주의자들과는 달리
완성을 지향하는 하느님의 포괄적 창조 사업의 지속적인 작업이라 생각한 바흐는, 1738년 바로크 음악을 성격 짓는 계속 저음(Basso continuo)의 연주법을 설명하는 자 리에서 "음악은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인간에게는 기 쁜 마음을 갖도록 한다.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마음을 신선하게 하는 힘을 부여하는 것은 모든 음악의 목적이 다"라고 피력하였다. 많은 바흐 연구가들은 그가 신심 깊은 음악가였고 그의 중심 장르가 교회 음악이라는 점 에 일치한다. 그러나 바흐의 교회 음악과 세속 음악은 대 립적이 아니고 같은 바탕 위에 있다. 동일한 의지에서 출 발해서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는 이 둘은 음악 양식적 측 면에서도 다르지 않다.
사실 바흐의 넘치는 음악적 상상력은 교회 음악과 세 속 음악의 두 범주를 오가고 필요에 따라 서로를 수용하 기도 하며 자유롭게 펼쳐진다. 예컨대 <성탄 오라토리 오〉의 많은 아리아와 합창곡들은 자신이 앞서 작곡한 세 속 칸타타들을 가사만 바꾸어 다시 사용한 것이다. 바흐 의 이러한 세속 음악의 교회 음악화 혹은 그 반대로의 현 상은 기존의 작품으로 가사를 바꾸어 더 큰 장르의 음악 안으로 재수용하는 것이 보편적인 당시의 상황에서 결코 놀라운 것은 아니다. 바흐의 천재성은 오히려 축하 칸타 타 등 일회성적 옛 세속 작품들을 교회 음악화하고 새로 운 큰 작품으로 묶어 교회의 전례력에 따라 매년 반복 연 주하도록 기획한 데서 돋보인다.
바흐 작품 전집은 1851~1899년에 라이프치히의 바 흐 협회(Bach-Gesellschaft)에서 46권으로 출판되었고, 새 전집은 괴팅겐의 바흐 연구소와 라이프치히의 바흐 자료 보관소 공동으로 1954년부터 출판되었다. 작품 번호는 슈미더의 작품 분류(라이프치히, 1950)에 따라 BWV(바흐 작품 번호)로 표기한다. (→ 가톨릭 음악 ; 오르간 ; 수난 곡)
※ 참고문헌  조선우 · 홍정수, <음악은이> 1~2, 세광음악출판사, 1990~1991, pp. 328f, 332f, 344~347, 362f/ F. Blume, 《MGG》 1, pp. 962~1047/ W. Emery · C. Wolff · R. Jones, 《NGDMM》 1, pp. 785~840/ W. Gurlitt ed., Riemann Musik Lexikon, Personenteil 1, Schott's Söhne, 1959, pp. 75~80/ W. Blankenbueg, 《TRE》5, pp. 90~94. 〔趙善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