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공소 회장. 자는 용진(龍鎭) . 세 례명은 프란치스코. 본관은 밀양(密陽) . 1860년 7월 5일 충 남 청양군 정산면 대 박리(青陽郡 定山面 大朴里, 일명 한박실) 에서 영동 현감(永同 縣監)을 지낸 양반 교 우 박상호(朴尙浩)의 9남매 중 여섯째 아들 로 태어났다.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그의 형과 형수가 해미(海美)에서 순교하였는데, 그 역시 박해를 피해 부친과 함께 여러 곳으로 피해 다니다 가 9세 때인 1868년 봄, 예산군 예산읍 대회리(禮山郡 禮山邑 大回里)의 형제고개에서 체포되어 심한 고문과 배교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감옥에 갇혀 6개월 동안 많 은 고생을 겪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의 집안은 사학(邪學)을 믿는다는 구실을 내세운 해미 현감에게 모 든 가산을 약탈당하였다.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집으 로 돌아온 박내원 부자는, 얼마 후 충북 영동군 양산면 봉곡리(永同郡 陽山面 鳳谷里, 일명 황새골)에 정착하였 으나, 부친은 그 해 12월 13일 노환으로 사망하고 말았 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약탈한 재산으로 공주(公州)에 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던 해미 현감은 박내원의 처 지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자신의 집에 데려다 양육하였으 나, 이듬해 소문을 듣고 찾아온 형들에 의해 집으로 돌아 오게 되었다.
20세 때인 1879년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의 집안으로 신심이 깊은 최원격(崔元格)의 수양딸 권(權) 아폴로니아와 결혼한 박내원은, 이듬해 황해도 장연(長 淵)의 배마당으로 이주하여 공소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만주를 거쳐 장연 태탄(苔灘) 앞바 다에 도착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뮈텔(G. Mutel, 閔 德孝) 신부와 리우빌(A. Liouville, 柳達榮) 신부를 영접하 여 2개월 동안 자신의 집에 은신하게 하면서 한국어와 풍습을 가르쳤다. 그러나 두 명의 선교사가 떠난 후 그들 을 숨겨 주었던 사실이 관가에 알려져 재산을 몰수당한 그는, 신변까지 위태롭게 되자 식솔들을 이끌고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우고리(楊州郡 廣積面 遇古里)로 이주하 였다가 다시 회암면 회암리(檜巖面 檜巖里)를 거쳐 화성 군 봉담면 왕림리(華城郡 峰潭面 旺林里)에 정착하여 왕 림(일명 하갓등이) 공소 회장직을 맡았다. 말년에는 수원 고색동(高索洞)으로 이주하여 역시 공소 회장으로서 활 발히 활동하다가 76세 때인 1935년 1월 26일 사망하여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南谷里, 현 양지) 본당 묘 지에 묻혔다.
어려서부터 극심한 박해 시기를 거치며 수많은 고초를 겪은 박내원은, 그로 인해 인내심과 굳은 의지를 길러 철 저하고도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실천함으로써 신자는 물 론 외교인들에게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다. 슬하에 2남 1 녀를 두었는데, 수원교구 소속으로 남곡리 본당에서 약 14년 동안 사목한 후 1948년에 사망한 박동헌(朴東憲, 마르코) 신부가 그의 둘째 아들이고, 서울대교구 소속으 로 가톨릭대학 의과대학장 · 가톨릭 의대 부속 성모병원 장 · 절두산 순교 기념관장 등을 역임한 후 1988년에 사 망한 박희봉(朴喜奉, 이시도로) 신부는 그의 손자로, 맏 아들 인하(寅夏)의 둘째 아들이다. (→ 박동헌 ; 박희봉)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가톨릭 청년》 23호(1935. 4), p. 42/ 《교회와 역사》 249호(1996. 2), 한국교회사연구소, pp. 10~12/ 한국교 회사연구소 편, 《황해도 천주교회사》,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 회, 1984, pp. 207~209/ 韓龍煥 · 徐相堯 編著, 《福音의 證人》, 한국천 주교중앙협의회, 1972, pp. 222~228/ 《서울대교구 교구 총람》 부록, 가톨릭출판사, 1984. 〔李裕林〕
박내원 朴來元(1860~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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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박내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