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마르코. 아명은 동하(東 夏). 본관은 밀양(密陽). 1893년 4월 22일 경기도 양주 군 광적면 우고리(楊州郡 廣積面 遇古里)에서 박내원(朴 來元, 프란치스코)과 권(權) 아폴로니아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친의 영향을 받아 깊은 신 앙심을 가졌던 그는, 일찍이 신부가 될 것 을 결심하였다. 그의 부친은 황해도 장연 (長淵)의 배마당 공 소 회장으로 있던 중 1880년 태탄(苔灘) 앞바다에 도착한 뮈 텔(Mutel, 閔德孝) 신 부와 리우빌(Liouville, 柳達榮) 신부를 영접 하고 은신시켜 그들
에게 한국어와 풍습을 가르쳤으며, 이후에는 경기도로 이주하여 공소 회장을 맡는 등 평신도로서 매우 활발히 전교 활동을 하였던 인물이었다.
9세 때 양주군 회암면 회암리(檜巖面 檜巖里)로 이주 하여 서당에서 공부하다가 다시 화성군 봉담면 왕림리 (華城郡 峰潭面 旺林里)로 가족을 따라 이주한 박동헌 은, 16세 때인 1908년 9월 14일 왕림(일명 하갓등이) 본 당 소속으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여 철학 및 신학 과정을 이수한 후 1922년 6월 20일 부제품을 받고 사목 실습차 논산(論山, 현 부창동) 본당에 파견되었다. 이듬해 5월 20일 명동(明洞)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 은 후, 논산 본당으로 이임한 Gombert, 孔安世) 신부의 후임으로 부여 금사리(金寺里, 일명 소양리) 본당 2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공베르 신부의 보좌 자격으로 활동하던 그는 부여, 서천(舒川), 보령(保寧), 청양(靑陽), 예산(禮山), 홍성(洪城) 등지의 25개 공소 를 사목 관할하면서 신자들의 성체 신심 강화를 위해 '성체 조배회' 를 조직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러나 공베르 신부 및 본당 신자들과의 불화로 1년 만인 1924년 6월 미리내(美山里) 본당 강도영(姜道永, 마르 코) 신부의 보좌로 전임되었으며, 1925년 3월에는 충남 아산(牙山) 공세리(貢稅里) 본당의 드비즈(Devise, 成一 論) 신부가 휴양차 서울로 올라감에 따라 잠시 동안 임 시 주임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27년 9월 14일 남곡리(南谷里, 현 양지) 본당이 미리내 본당에서 분리되어 용인군 내사면(龍仁郡 內四面)에 설립되자 초대 주임으로 임명된 박동헌 신부 는, 부임 직후 은이(隱里) 공소의 낡은 강당을 허물고 남 곡리 벌터 '재박이' 에 16칸의 목조 성당을 신축하였으 며, 1930년에는 본당 묘지를 조성한 데 이어 이듬해에 는 성당 4칸을 증축하는 등 본당 발전을 위해 꾸준히 노 력하였다. 또 신자 재교육과 평신도 사도직 활성화를 위 해 본당 회장 및 공소 회장 피정을 자주 실시하였으며, 총 6개의 신심 단체를 조직하여 매일 교대로 회합을 갖 도록 적극 권장하였다. 그 밖에 지역 신자들을 위한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34년 8월에는 본당 내에 해
성의숙(海星義熟)을 개설하였고, 신자들의 교리 지식 향 상 및 신심 강화를 위해 교리 토론 시간도 자주 마련하였 다. 이러한 그의 적극적인 사목 활동에 힘입어 남곡리 본 당의 교세가 크게 증가하게 되자 1939년에는 다시 성당 을 40평 가량 증축하였다.
약 14년 동안 남곡리 본당에서 사목한 박동헌 신부는, 1941년 6월 25일 남곡리 본당 관할의 이천읍(利川邑) 공소가 이천 본당으로 승격되자 이천 본당 초대 주임으 로 부임하여 교세 확장에 진력하는 한편, 1943년 8월에 는 성당을 신축하는 등 활발한 사목 활동을 전개하여 그 해 말 본당 신자수가 1,00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 나 재임 7년 만인 1948년 3월 건강이 악화되어 경기도 광주군 도척면 상림리(都尺面 桑林里)의 사기소(沙器 所) 공소로 휴양을 떠났다. 그는 이곳에서도 새로 성당 을 건립하여 공소를 준본당으로 승격시키는 등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사목 활동을 하다가 건강을 회복하 지 못한 채, 그 해 9월 23일 56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남 곡리 본당 묘지에 묻혔다.
25년에 걸친 사제 생활의 대부분을 경기도 용인 및 이 천 일대에서 보낸 박동헌 신부는, 교세 신장 및 신심 강 화를 위해 관할 공소를 자주 순회 방문하면서 성사 집행 및 강론, 피정 지도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일제 강점기의 어려운 현실 속에서 교회사 및 한국사, 성 인전, 복자 약전(福者略傳) 호교론(護敎論) , 교리 문답, 성서 해설 등을 주제로 자주 강론함으로써 신자들에게 순교 정신과 민족 의식, 애국심을 고취시켜 주기 위해 많 은 노력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천주가사 (天主歌辭)의 수집과 보급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최양 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의 <선종가>를 비롯한 여러 편 의 천주 가사가 담긴 《박동헌 가첩》(朴東憲歌帖)을 남겼 다. (→ 박내원 ; 양지 본당 ; 이천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교회와 역사》 49호(1979. 9), 한국교 회사연구소, p. 6/ 《서울대교구 교구 총람》 부록, 가톨릭출판사, 1984/ 《한국인 성직자들의 서한》, 대전교구사 자료 제2집, 천주교 대전교 구, 1990/ 천주교 수원교구, 《수원교구 30년사》, 1993. 〔李裕林〕
박동헌 朴東憲(1893 ~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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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박동헌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