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미카엘. 본관은 밀양(密 陽). 1908년 8월 13일 전북 김제군 김제읍 순동리(金堤 郡 金堤邑 蓴洞里)에서 태어나 1924년 대구 성 유스티 노 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1935년 6월 15일 대구에서 드
망즈(Demange, 安世 華) 주교의 주례로 사 제 서품을 받았다. 곧 바로 되재(현 고산) 본 당 8대 주임으로 임명 되어 사목 활동을 시 작한 박문규 신부는, 전주 전동(殿洞) 본당 6대 주임(1940. 4~1941. 5), 전주교구 재정 담 당 신부(1941. 5~1942. 6)를 거쳐 1942년 6 월에는 함경남도 덕원 (德源)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 1년 동안 머무르면서 신비 신학을 연구했다. 다시 목포 산정동(山亭洞) 본당 10대 주임(1943~1944), 제주(현 중앙 주교좌) 본당 9대 주임(1944~1945. 5), 나주 (羅州) 본당 5대 주임(1945. 5~1949. 12) 등을 역임한 후, 1949년 12월 8일 남동(南洞) 본당이 설립됨과 동시에 초대 주임 신부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남동 본당에 부임 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1950년 7 월 23일 광주 지역이 함락되었는데, 이때 성당을 몰수당 하고 그는 다른 동료 성직자들과 함께 감금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뒤 남동 본당에 복귀한 박문규 신부는 황 폐해진 성당의 재건에 전력을 기울였다. 광주 지역에서 두 번째로 설립되었고 상업 및 학교, 주거 중심지에 위치 하고 있었던 남동 본당은, 그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많은
변모와 발전을 이루었다. 그 결과 본당의 교세가 급격히 증가하자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1952년 6월 11일 새 성당을 완공하고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1956년 9월 전남 화순군 화순면 교리 108번지의 목조 기와집을 매 입하여 화순(和順) 공소를 설립한 데 이어 이듬해 6월에 는 67평의 목조 성당을 신축하였는데, 이 공소는 이러한 박문규 신부의 노력에 힘입어 1958년 5월 31일 화순 본 당으로 승격되었다. 사제로 서품된 후 약 25년에 걸쳐 호남 지역의 여러 본당에서 사목하던 박문규 신부는 54 세 때인 1961년 1월 12일 목포(木浦) 골롬반 병원에서 폐디스토마로 사망하였다. (→ 남동 본당 ; 광주대교구 ; 전주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가톨릭 시보> 235호(1960. 6. 26), 4 면 ; 263호(1961. 1. 22), 3면/ 《경향잡지》 808호(1935. 7. 27) ; 1115호 (1961. 2)/ 천주교 광주대교구, 《광주대교구 50년사》, 빛고을출판사, 1990/ 김진소 편, 《천주교 전주교구사 연표》, 호남교회사연구소, 1993/ 전동 성당 100년사 편찬위원회 · 호남교회사연구소, 《전동 성 당 100년사》, 천주교 전주교구 전동 교회, 1996/ 《천주교 제주교구 100년사 출간을 위한 자료집》, 천주교 제주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 회, 1991. 〔李裕林〕
박문규 朴文奎(1908~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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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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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