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래 朴秉來(1903~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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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병원 개원 당시의 직원들과 박병래 초대 병원장(라리보 주교의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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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병원 개원 당시의 직원들과 박병래 초대 병원장(라리보 주교의 오른쪽).

의학 박사. 성모병원 초대 및 3대 병원장. 가톨릭대학 교 의과대학 학장. 세례명은 요셉. 호는 수정(水晶). 본 관은 밀양(密陽) 1903년 충남 논산(論山)에서 태어나 훗날 동성(東星)상업학교 교장을 지낸 부친 박준호(朴準 鎬, 요한)를 따라 상경하여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 다. 양정학교(養正學校) 거쳐 1924년 4월 경성의학전 문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 병 원인 '이토(伊藤) 내과' 에서 활동한 그는, 1925년 5월 에는 의사 면허(제2370호)를 취득하였으며, 그 후 대학에 서 강의하였다. 서울교구에서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병원 신설을 계획하고 1935년 5
월 무라가미(村上) 병 원을 매입하자, 이때 그는 그 설립 준비 일 체를 일임받게 되었 다. 그리고 1936년 5 월 11일 성모병원 개 원과 함께 초대 병원 장으로 취임하여 이후 20여 년 동안 병원장 및 의사로 봉직하면서 환자 치료와 병원의 합리적 운영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가톨 릭 청년》, 《경향잡지》 등을 통해 대중 의학
상식을 전달하고 계몽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한편 일제 말기 총독부에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무 허가로 규정하고 폐쇄시키려는 책동을 부리자, 서울교구 장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는 신학교 건물에 성모 병원 분원(分院)을 개설하기로 결정하고 그 계획을 추진 하도록 박병래 원장에게 위임하였다. 그 결과 1943년부 터 시작된 분원 설립 공사는 이듬해 4월 중순에 완공되 어 4월 29일 노기남 주교에 의해 강복식이 거행되었으 며, 5월부터는 본원에 입원한 일부 환자들이 이곳으로 옮겨 치료를 받기 시작하였다.
해방 후 1947년 4월 14일 가톨릭 신자 의사들을 주축 으로 전교 및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하는 '방지거 사베 리오회' (한국 가톨릭 의사 협회의 전신)를 창설하여 초대 회 장을 지낸 박병래는,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얼 마 후 서울이 수복되자 가톨릭 의사 협회 회원들과 함께 '가톨릭 의료 봉사단' 을 조직하여 환자들을 위한 진료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진료가 어려 워지자 공군 군의관으로 입대하여 공군 부산 병원, 진해
요양소 겸 마산 병원, 공군 의무감 등을 역임한 후 1956년 3월 제대하 였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서울교구 의 요청에 따라 성모병원 제3대 병원 장 및 가톨릭대학 의학부장으로 취임 하였다. 이듬해 1월 8일자로 성모병 원장직을 사임한 그는 그 해 2월 종 로구 관철동에 '성 루가 병원' 을 개 원하였고, 1962년 5월에는 대한 내 과학회 회장, 1963년 5월에는 대한 결핵학회 회장, 같은 해 6월에는 서 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 교수, 1964 년 3월에는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외래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50년 동안 의료 활동에 힘쓴 가운데서도 평신도의 본분을 잃지 않 고 1954년에는 혜화동 본당 사목 위 원을 맡아 성당 신축을 위해 노력하
였으며, 프란치스코 성인의 수도 정신을 존중하여 프란 치스코회 재속 형제회에 입회하기도 하였다. 언제나 가 난한 환자들을 돌보는 봉사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던 박병래는 폐암에 걸려 71세 때인 1974년 5월 15일 사 망하였다. 이에 앞서 그는 1964년 4월 의사로서의 공적 을 인정받아 문화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사망하기 얼마 전인 1974년 5월에는 일제의 문화재 수탈을 방지할 목 적으로 그 동안 수집해 두었던 문화재 362점을 국립 중 앙 박물관에 기증한 공로로 국민 훈장 모란장을 수여받 았다. (→ 가톨릭 중앙 의료원 ; 박준호)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경향잡지》 830호(1936. 5)/ 가톨릭 중앙 의료원 50년사 편찬위원회 편, 《가톨릭 중앙 의료원 50년사》, 가톨릭출판사, 1988/ 《교회와 역사》 196호(1991. 9), pp. 24~26. 〔李裕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