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종 朴成鍾(1925 ~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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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종 신부.

박성종 신부.

서울대교구 신부. 한국 가톨릭 노동 청 년회(Jeunesse Ouvriere Chretienne, J.O.C.) 초 대 지도 신부. 세례명 은 프란치스코. 1925 년 5월 15일 경기도 개성(開城)에서 태어 나 1943년 경복중학 교를 졸업하고, 경도 연수학관(京都研修學 館), 개성 송도초등학 교 교사, 만주 만몽주 식회사(滿州滿蒙株式 會社) 사원 등을 거쳐
1948년에 고려대학교 영문학과를 수료했다. 같은 해 10 월 파리 생 쉴피스(St. Sulpice) 신학교에 입학하여 1954 년 6월 29일 졸업과 동시에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곧 이어 로마 그레고리오 신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1958년 3월 26일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귀국 후 성신 대학(聖神大學, 현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임하면서 J.O.C. 지도 신부를 맡았다. 이미 1957년에 서울대학병 원의 간호사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던 이 J.O.C. 운동 은, 이듬해 11월 국제 가톨릭 노동 청년회 창설자 카르 딘(J. Cardijin) 추기경의 내한을 계기로 한국 J.O.C.가 창 설되었는데, 이때 그는 정식 지도 신부로 임명되어 매우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J.O.C. 조직은 점차 각 본당과 직장으로 확산되었으며,
1961년 11월에는 가톨릭 평신도 사도직 단체로 한국 주 교 회의의 인준을 받았고, 브라질에서 개최된 제2차 국 제 가톨릭 노동 청년회 대회 때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하 였다.
이후 10여 년 동안 J.O.C. 지도 신부로서 보다 바람직 한 노동 운동이 한국 사회에 정착될 수 있도록 근본 정신 과 교육 사상 및 방법 등에 관한 이론 정립에 중점을 두 고 사목한 박성종 신부는,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노동 운 동을 위한 교본 및 교육 프로그램의 자체 개발을 적극 추 진하였으며, 특히 현장에서 근무하는 회원들과의 직접 면담을 시도함으로써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모색하였다. 즉 그는 노동자들에게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성을 일깨우 고 그들 개개인의 주체성을 인정해 주는 데 노력하였으 며, 노동자들이 스스로 문제를 의식하고 판단하여 결정 을 내리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각 자 고유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면서 직접 이 운동의 주 체자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도자 양성에도 많 은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박성종 신부는 노동 운동의 기틀 마련과 그 성과 를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동시에 군종 신부단 단장(1960. 7~1962.3) 이민회(移民會) 지도 신부(1962. 4~1963. 1), 한 국 청소년 문제 협의회 부위원장(1966. 3~1967.6) 등의 직 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69년 7월 J.O.C. 지도 신부를 사임하고, 도림동(道林洞) 본당 15대 주임(1970. 11~1974. 3), 후암동(厚岩洞) 본당 10대 주임(1974. 3~ 1979. 5) 등을 거쳐 1979년 6월 수색(水色) 본당 13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는데, 본당 재임 중에는 성서 모임, 전 례 교육 등에 큰 관심을 가져 신자들의 교리 지식 향상에 기여하였고, 신심 함양을 위한 성지 순례 및 성령 기도회 등도 자주 개최하였으며, 불우 이웃 돕기 및 성소 후원을 위한 사회 복지 후원회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59 세 때인 1983년 3월 14일 심근경색증으로 사망하여 용 산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가톨릭 신문> 535호(1966. 9. 18), 1 면 ; 1350호(1983. 4. 10), 8면. 〔李裕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