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 세례명은 베드로. 1830년 서울 남문 밖의 전생서(典牲署, 현 용산구 厚岩洞)에서 순 교자 박(朴) 바오로와 김(金) 아가다 사이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의 신앙을 이어받으면서 성장하였다. 부 친 박 바오로는 일찍이 성 앵베르(Imbet, 范世亨) 주교,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 샤스탕(Chastan, 鄭牙各 伯) 신부 등이 1839년 9월 21일(음 8월 14일) 새남터에 서 순교한 뒤 몇몇 신자들과 함께 그 시신들을 찾아다 노 고산(老古山, 마포구 노고산동)에 안장하였으며, 1843년 에는 다시 그 유해를 발굴하여 박씨 집안의 선산인 삼성 산(三聖山, 관악구 신림동 57-1번지)으로 이장하였다. 그 리고 이 사실을 아들 박순집에게 전함으로써, 박해 후 삼 성산에서 그 위치를 확인하고 1901년 10월 21일 순교 자들의 시신을 발굴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 바오로는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1846년 9월 16일(음
7월 2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안성 미리내로 이장되기 에 앞서 다른 신자들과 함께 그 시신을 찾아내 와서(瓦 署, 용산구 한강로 3가의 왜고개)에 안장하였었다. 당시 17 세였던 박순집도 서소문과 당고개를 거쳐 새남터 형장으 로 끌려가는 김대건 신부를 본 적이 있었다.
박순집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난 뒤 제 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 브르트 니에르(de Bretenières, 白) · 볼리외(Beaulieu, 徐沒禮) · 도 리(Dorie, 金) ·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 푸르티에 (Pourthié, 申妖案) 신부와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등 이 3월 7일(음 1월 21일)과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할 때 군인으로서 이를 직접 목격하였다. 그리고 박순지(朴 順之, 요한)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3월 28일(음)에 시신 을 찾아내 새남터 부근에 임시로 묻었다가 4월 14일(음) 에 다시 와서로 이장하였다. 그러나 《우포도청등록》(右 捕盜廳謄錄)에 있는 박순지의 문초 기록에는 이장에 참 여한 사람들 중 박순집이란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또 박순집은 3월 7일과 9일에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 삼(南鍾三, 요한)과 최형(崔炯, 베드로)의 시신도 신자 들과 함께 찾아 와서에 안장하였으며, 3월 7일에 순교한 홍봉주(洪鳳周, 토마스), 3월 9일에 순교한 전장운(全長 雲, 요한), 3월 11일에 순교한 뒤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 진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회장의 시신은 훗날 노고산 에 안장하였다. 그 가운데 와서에 있던 7명의 유해는 1899년 10월 30일에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안장되었고, 1909년 5월 28일에는 남종삼과 최형의 시 신이 발굴되어 명동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한편 이 박해 때 박순집의 집안에서는 조카 바오로, 고 모 막달레나, 8촌 바오로 등이 순교하였을 뿐만 아니라
1868년의 무진박해(戊辰迫害) 때도 다시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는데, 부친 바오로와 백부 바오로, 형 요한과 손 바르바라 부부, 이모부 손 베드로와 손씨 부부 등이 3월 에 순교하였으며, 장모 홍 유스티나가 11월에 순교하였 다. 이후에도 그의 집안에서는 여러 명의 순교자가 탄생 하였으나 관찬 기록이나 여타의 증언록에는 나타나지 않 는다.
박해 후 박순집은 교회의 밀사 최지혁(崔智麻, 요한), 고종의 유모 박(朴) 마르타의 딸 원(元) 수산나 등과 협 력하여 1876년에 드게트(Deguette, 崔東鎮) 신부, 블랑 (Blanc, 白圭三) 신부 등을, 다음해에는 리델(Ridel, 李福 明) 주교,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 로베르(Robert, 金 保祿) 신부 등을 입국시켰다. 그리고 시복 수속 작업이 시작되자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교회 법정에서 진술하 였고,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던 곳과 자신의 집안과 다른 순교자들의 행적 등을 증언하였다. 그가 진술한 이 내용들은 시복 재판의 기록 서기를 맡았던 로베르 신부 가 필사하여 남긴 《박순집 증언록》(朴順集證言錄) 3책에 수록되어 현재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증언록 표지 뒷면에는 드브레(Devred, 俞世竣 보좌 주교 가 1923년 5월 1일자로 서명한 쪽지가 붙어 있는데, 여 기에 증언록 작성 과정이 약기되어 있다. 이를 보면 1888년에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Blanc, 白圭三) 주교 가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에게 조선 순교자들의 행 적을 조사하도록 하였고, 이에 프와넬 신부가 박순집을 불러 증언을 하도록 함과 동시에 서기 권 타대오에게 한 마디도 바꾸지 말고 기록하도록 하여 이 증언록을 작성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증언록에는 모두 153명의 순교자가 수록되어 있는 데, 1책 앞 부분에 있는 '장(베르뇌) 주교 일기' 와 백 (브르트니에르) 신부 일기' 를 제외하고는 순교자 개인 중심으로 각자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박순집은 먼저 위의 일기 두 편에서 베르뇌 주교 등 12명의 순교 행적 을, 이어 부친 박 바오로를 비롯하여 일가 친척으로 관련
이 있는 순교자 14명의 행적을 증언하였다. 그러나 1책 의 후반부에서부터 2~3책까지에 수록되어 있는 다른 순교자들의 행적은 그 자신이 직접 목격하거나 증언한 것이 아니므로 이 3책 모두를 "박순집 증언록" 으로 볼 수는 없다. 다만 이들 가운데 《치명일기》나 《병인박해 순 교자 증언록》 등에 나타나지 않는 순교자들이 많다는 점 에서, 또 다른 증언록에 비해 비교적 순교 사실이 풍부하 다는 점에서 중시할 만한 가치가 있다.
당시 박순집은 서울 홍제동(弘濟洞)에 살고 있었는데, 1888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자 셋 째 딸을 이 수녀회에 입회하도록 하였으니, 그가 곧 최초 의 한국인 수녀 가운데 한 사람인 박황월(朴黃月, 프란 치스코 사베리오)이다. 또 이 무렵에는 홍제동 자신의 집을 공소 집으로 내놓았다. 그러다가 1890년에는 제물 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전교에 힘썼으며, 말년에는 숙 골(현 인천시 도화동)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1911년 6월 27일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노고산 ; 박황월 ; 병인박해)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朴順集證言錄》(필사본), 3책, 절두 산 순교 기념관 소장/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경향잡지》 810호 (1935. 7)/ 《가톨릭 청년》, 1964. 4~7, 10/ 林忠信 역, 《信仰自由의 黎明 期》, 가톨릭출판사, 1966/ 金秉相 · 吳基先 편, 《聖地》, 東林文化社, 1981. 〔車基真〕
박순집 朴順集(1830~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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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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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집 베드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