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애주의 博愛主義 〔라〕philanthropia 〔영〕philanthro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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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애는 현재만이 아닌 미래까지 고려하여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넓은 의미의 이타적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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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애는 현재만이 아닌 미래까지 고려하여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넓은 의미의 이타적 행위이다.

인간의 존엄을 최고로 여기고 인종적 편견과 국가적 이기심 없이 인류 전체의 복지 증진을 위하여 전 인류가 평등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 '사해 동포주의' (四海同胞主義)라고도 한다.
〔어의와 개념〕 박애라는 말은 인류애(人類愛)를 뜻하는 그리스어 '필란트로피아' (Φιλανθρωπία)에서 유래하였다. 이 용어는 17세기경부터 다양한 윤리 · 종교적 체계들, 사상 조류들 그리고 사회적 맥락 속에서 사용되다가, 20세기 들어 시민 정신, 인도주의(人道主義) 등과 연결되면서 공공 목적을 위한 사적이고 자발적인 나눔의 뜻을 지니게 되었으며, 자선 사업이나 사회 사업의 근본 정신이 되었다.
박애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인류애의 정신으로 널리 자선(慈善)을 행하고 동정(同情)을 기울이는 것이지만, 자선이나 동정의 의미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자선이 개개인의 현재적 요구들을 충족시켜 주는 좁은 의미의 이타적(利他的) 행위라면, 박애는 현재만이 아닌 미래까지 고려하여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넓은 의미의 이타적 행위이다. 여기에는 서로 사랑하며 서로 돕고 사는 이상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포함되어 있다. 이와 함께 자연과 환경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현실을 감안할 때, 결국 박애란 인간에 대한 자선이나 동정을 포함하면서 그것을 넘어 자연계의 모든 피조물에까지 미치는 사랑의 행위이다.
〔고대 종교와 사상 안에서의 박애주의〕 인류학이나 민족학의 입장에서 볼 때, 이른바 박애의 실현은 인류가 하나의 이상으로 추구하였던 보편적인 현상 중의 하나이다. 19세기경 세계 각지를 여행한 사람들 또는 민족학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문자를 갖지 않은 종족이라도 오늘날 박애적 행동의 가장 기초라 할 수 있는 상호 부조(相互扶助)의 실례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종교적인 맥락에서 보면 구체적으로 가난한 자, 특히 이방인 · 과부 · 고아 등을 관대히 대하라는 명령과 같은 것은 여러 문명의 경전(經典)이나 윤리적 가르침들에서 잘 나타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자선 행위가 개인적인 덕으로 칭송되기도 하고, 신들을 즐겁게 해주는 종교적 의무로 명령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이집트의 《사자(死者)의서(書)》(Book of the Dead)에서는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는 사람,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는 사람,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는 사람, 배[船]가 없는 사람에게 배를 주는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여겼다. 그리고 이집트 비문에 의하면, 파라오들이 자선의 행위와 묘를 쓰는 행위를 신들을 즐겁게 해주는 수단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인도 : 힌두교 경전(經典)에 따르면 가난한 자들, 특별히 거룩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은 일종의 의무였으며, 미래에 보상을 받는 행위였다. 인도의 윤회적인 세계관에 따르면, 내생(來生)은 이승에서 행동한 것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세계관은 인도 종교 전반에 적용되었다.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는 이승에서 수행할 가장 중요한 의무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보살피는 것 역시 주요 실천 덕목이었다. 이러한 세계관이 윤리적으로 발전하면서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들인 불교, 자이나교(Jainism) 등에서는 불살생(不殺生)이 최고의 덕목으로 간주되었고,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존중하였다. 특히 부처의 가르침에서는 이웃에게 베푸는 보시(布施)를 인간의 덕목으로 확립시켰는데, 그것은 자기를 억제하고 남을 세우는, 인간이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행동이었다.
인도의 불교 역사에서 오늘날의 박애주의와 같은 것을 제도화시킨 사람은 아소카(Asoka, 기원전 268~232) 대왕이다. 그는 즉위한 지 12년쯤 되는 해부터 39년경까지 불교의 자비와 인애(仁愛)를 정치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살생 금지와 생명 애호에 노력을 기울였고, 과부 · 고아 · 노약자를 보호하였으며, 빈민에게 물질을 베풀고, 백성의 안녕과 안전을 장려하도록 하였다. 특별히 복지 사업 차원에서 병원을 건립하여 사람은 물론 다친 동물들도 치료해 주었으며, 가로수를 세우고 휴게소를 설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리에 우물을 파서 사람과 짐승에게 물을 제공하고, 각지에 요양원을 세웠다. 이와 같은 역사적 실례는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박애 사업이었다. 아소카 대왕은 부처의 박애적 가르침을 이론으로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데 힘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 박애라는 낱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저술가 아이스킬로스(Aischylos)이다. 물론 호메루스(Homerus), 헤시오두스(Hesiodus), 헤로도투스(Herodotus) 같은 그리스의 사상가들에게서도 가족이나 친구, 종족 중심적 한계를 넘어선 타인에 대한 자비 · 친절 · 환대 등 박애에 해당하는 개념들이 나타난다. 이들이 사용한 박애의 뜻을 종합하면, 종족 중심주의를 넘어선 '선한 시민 정신' 이나 '민주적이고 인도적인 경향' 등의 의미가 들어 있다. 가령 크세노폰(Xenophon)은 소크라테스(Socrates)를 '민주적이고 박애적인' 인류
의 친구라 불렀고,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는 법률에 대해 "법률은 민주적이고 박애적 정신에 따라야 한다" 고하였다. 더욱이 스토아 학파는 박애를 인류 공동체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동포에 대한 친절한 동정이라고 여겼다. 스토아 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로마의 세네카(Seneca)는 인간의 고귀한 가치를 '인간에 대해 거룩한 존재로서의 인간' (homo sacra res homini)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하였다.
인간을 높게 보는 이러한 정신은 그리스와 로마에서 싹트고 있었다. 이들의 박애 정신이 현대의 박애에 대한 정의와 크게 다를 바는 없으나, 그리스와 로마에서 사용되었던 박애라는 말은 현재과 같은 의미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된 것은 아니었다. 일부 정치가들이 정치적인 차원에서 가난한 이를 도와 주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개혁을 단행하기도 하였지만, 이것이 당시 기득권자들에 게 본받을 만한 미덕으로 작용하였던 것은 아니다. 국가의 주도로 일부 빈민 구제책이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이것 역시 부유한 개인들의 덕목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로마의 경우도 그리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국 : 중국 고전들에서도 박애와 관련된 사상이 나타난다. 물론 박애라는 낱말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에 버금가는 사례들은 많다. 공자(孔子)는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를 인격적 덕목[德]이라고 하였다. 그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에 기초해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적 존재인데, 사회는 인간의 상호 작용 그 이상의 것이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인습적인 관행들이 부도덕하고 해로운 것이라면 그것을 추종해서는 안된다. 사회의 질서는 예(禮)로써 유지되어야 하고, 그럼으로써 의(義)를 이루어야 한다. 예란 좁은 의미에서는 의식 절차를 말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절도와 질서를 가리킨다. 예란 의(義)이며 인(仁)이다. 의와 인을 실천하는 것이 진리, 즉 도(道)를 따르는 길이다. 도' 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며, 의(義)와 선(善)의 구체적인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도는 사람들이 넓혀 가는 것이다(《論語》, <衛靈公>, 28). 중국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하나인 당(唐)의 한유(韓愈)는 이 도를 일컬어 행동의 도, 즉 정의의 이념으로 흥기되고 만인에 대한 사랑으로 고무되어 행동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공자는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국가의 존재 이유가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가르쳤다. 그가 끊임없이 정치의 길에 들어서려고 노력하였던 것도 이와 같은 이념을 가장 효과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공자의 정치 입문은 실패로 끝난 셈이었지만, 그는 평생 백성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주체적으로 참여하고자 하였다.
박애와 관련하여 이보다 더 앞서간 사상가는 묵자(墨子)였다. 이른바 겸애(兼愛)를 주창한 묵자는 가족 중심주의적인 중국의 전통에 도전하였다. 그에 따르면 만인은 만인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 그는 "세상 사람 모두가 겸애하여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남을 사랑한다면 효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모두가 그의 부모 형제와 군왕(君王)을 자기 자신과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는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도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나서도 도둑과 강도가 있을까? 남의 집을 자기 집과 같이 생각한다면 누가 도둑질을 하겠는가?···온 천하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 온 천하가 평화와 질서를 누릴 것이다"(《墨子》, 〈兼愛〉, 상). 묵자는 통치자에게 백성을 위한 겸애의 실천을 독려하고 적극 권장하였는데, 그것이 통치자 자신에게도 유익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중국의 다른 사상가들과는 달리 오늘날의 평등 · 박애에 해당하는 개념을 일관되게 강조한 보기 드문 사상가였다.
유대교 : 성문화된 자료를 볼 때, 곤궁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고 개인적으로 봉사하여 이웃을 구제하는 행동은 고대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가장 잘 나타난다. 그리스-로마 문명에서는 가난한 이에 대한 책임이 주로 국가에 맡겨져 있었지만, 유대교에서는 자선을 각 개인에게 부과된 중대한 명령으로 생각하였다. 구약의 신명기 14장 22절에 따르면 수입의 10분의 1을 강제적으로
바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렇다고 하여 너희가 사는 땅에서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가 사는 땅에는 너희 동족으로서 억눌리고 가난한 사람이 어차피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너희 손을 뻗어 도와 주라고 이르는 것이다" (신명 15, 11)라고 하였다. 또한 유대인들에게는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누어 주고,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며,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는" 의무가 있었다(이사 58, 7). 따라서 유대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을 책무로 규정하여 자선(사랑)과 정의를 동일시하였고, 의무 · 책임 · 윤리적인 사랑을 강조했다. 아모스, 이사야, 미가 같은 예언자들은 강자에 의한 약자의 착취를 엄중히 경고하였고, 빈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혁신적 입장을 취했다. 특히 바빌론 포로기 이후 회당(synagogue)이 생기면서 이러한 유대인들의 책임과 의무는 비교적 조직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정신은 나라 없이 떠돌던 중세까지도 이어졌다. 가령 중세의 유대 사상가인 마이모니데스(Moses Maimonides, 1135~1204)는 가난한 사람에게 자금을 빌려 주거나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갖도록 도와 주고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을 최상의 자선 행위라고 하였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나누는 것이 가장 자비로운 행동이며, 요청하기 전에 주는 것이 요청한 후에 주는 것보다 바람직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상과 태도는 유대인의 독특한 역사와 맞물 리면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박애주의〕 유대교의 영향 아래서 그리스도교에서도 비교적 적극적으로 박애적 이념이 제기되고 행동으로 실천되었다. 가령 부자는 재물의 소유자가 아니라, 그 재물의 관리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사도 바오로의 봉사자관(奉仕者觀)은 유대교의 관점을 발전시킨 것이었다. "굶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내게 마시게 해주었다. 나그네 되었을
때에 나를 맞아들였고 헐벗었을 때에는 내게 입혀 주었다. 병들었을 때에 나를 찾아왔고”(마태 25, 35-36)라는 행동 지침 역시 유대교와 일치하거나 적어도 관련 있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신약성서에서는 유대교와는 다른 새로운 것이 강조되었는데, 그 하나는 자비의 요구를 완수했느냐 못했느냐에 따라 미래에 보상을 받느냐 형벌을 받느냐가 달려 있다는 보상의 개념이다. "진실히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주지 않았을 때마다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자들은 영원한 벌을 (받으러) 갈 것이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러) 갈 것입니다"(마태 25, 45-46).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실천하는 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은 바로 이러한 곳에서 구체화된다. 그래서 "여러분 중에 누가 그들에게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하고 배불리먹으시오' 하고 말하면서도 몸에 필요한 것을 대 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도 행함이 없다면 그 자체로서는 죽은 것입니다"(야고 2, 16-17)라고 언급하였던 것이다.
동정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 더 나아가 박애를 행하는 것이 신앙을 실천하는 길이며 하느님을 위한 행동이다. 그리고 그런 자가 하느님과 영적 친교를 더 가깝게 누리고 현세의 삶의 질을 높이는 사람이다. 이러한 성서의 강조는 초대 그리스도교로 이어지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선적 행동을 위한 계율과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노예를 한 형제로 여기고, 여자들의 위치를 높인 것(갈라 3, 28), 곤궁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 등 모두가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표현으로 간주되었다. 이에 따라 초대 교회에서는 나그네를 위한 숙박 시설 및 상호 부조와 집단 안전을 위한 시설이 등장하였다. 4세기 이후에는 자선 병원, 구호원 등과 같은 공공 병원이 등장하였으며, 이곳에서 병자 · 빈민 · 노인 · 고아 등을 돌보았다.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기관에 대해 재정적인 지원을 하면서 이 기관들이 유지되도록 감독하는 역할을 하였다.
신학적 입장 : 신학이 발전하면서 박애적 태도에 대한 이론적 탐구도 활성화되었다. 또한, '박애적 행동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인가? 이웃에 대한 자선은 그 원인이 중요한가, 아니면 결과가 중요한가? 부당하게 모은 재산으로 이웃을 돕는 것은 타당한가? 등의 의문들이 제기되었다. 13세기경에는 부당하게 모은 재물일지라도 법률적 권리가 증여자에게 있고 반환을 요구하는 당사자 가 없다면 그렇게 베풀어지는 나눔도 공덕(功德)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종교 개혁 이후 자선으로 사용된 부(富)가 어떤 식으로 획득된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 기준이 핵심 문제로 오랫동안 논란되었다. 20세기 프로테스탄트의 사회 복음주의 신학자인 글라덴(W. Gladden)은 록펠러 재단이 교회의 선교 활동과 다른 자선 사업에 지원한 것과 관련하여 교회는 그 증여자가 아무리 경건하고 증여 목적이 고귀하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부당한 이득을 얻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어디까지나 소수의 견해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보면, 특히 중세의 교회법학자들은 자선을 받는 이에게 생겨나는 결과를 중시하는 경향이었다. 어떤 재물인가, 어떤 사람인가보다는 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라는 명령을 실행하는 것
자체를 중시하였다. 이것은 자선 사업을 상당히 자기 중심적인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물론 이러한 방향성은 이미 초대 그리스도교 당시부터 있었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 대한 태도 여부에 따라 영원한 형벌, 영원한 생명이 결정된다고 하는 가르침은 오히려 가난한 이에 대한 자선을 상당히 계산적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심지어 어떤 행동에 어느 정도의 공덕이 있느냐에 따라 자선의 형태 와 내용이 결정되기도 하였다. 중세 시대 때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는 이러한 형태의 자선에 반대하면서 전적인 희생, 비이기적인 사랑, 참된 가난함이 박애에 가장 가치있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근대적 박애 사상으로의 이행〕 중세 이후 세속적 조건들이 바뀌었고 자선과 박애에 관한 전통적 사상들도 달라졌다. 근대 박애적 사상의 시작은 전통적인 태도 및 가치와 새로운 사회적 · 경제적 · 정치적 · 종교적 조건들과의 결합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 여러 조건들 중에는 봉건 제도의 쇠퇴, 도시와 중산 계급의 흥기, 공유지의 사유화 운동, 여타의 경제적 변화의 결과로 인한 인구의 변동, 민족 국가의 출현과 역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종교 개혁 등이 포함된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이 종교 개혁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선행에 의한 구원을 반대하고 신앙에 의한 구원을 설교하였는데, 그것은 전통적인 중세적 자선을 덜 중요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종교 개혁자 칼뱅(J. Calvin, 1509~1564)은 종교 개혁이 일어났던 제네바에서 가톨릭 교회에 의해 관리되던 복지 시설에 반대하면서 자발적인 나눔만이 성서적 보증을 지닌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자발적으로 나눈다고 해도 그것을 관리할 기관은 있어야 했다. 그로 인해 종교 개혁 이후에는 대체로 국가가 사적인 자선 행위를 관리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이것은 영국의 경우 특별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영국 튜더 왕가(House of Tudor)가 수도원을 해산한 이후에는 전반적으로 종교적 조직체가 옛날과 같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교회가 주로 담당하였던 자선 활동이 많은 경우 개인적인 의무로 바뀌어 갔다. 상인과 지주 계급은 튜더 왕조가 추구하였던 빈곤자 구제 정책, 학교 및 여타의 자선 시설의 발전에 대한 책임을 지방 및 사적 증여자들에게 이행시키는 정책을 받아들여 자신의 부(富)를 자선 제도와 교육 제도에 투입하였다. 이렇게 투입된 재산, 개인의 증여나 신탁은 공적으로 관리되었다. 공공 기관, 구체적으로 정부가 개인적인 박애주의를 관리 · 감독하면서 박애주의적 정신을 지닌 개인들을 보호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1601년 엘리자베스 시대에 만들어진 자선적 재화 사용에 관한 법규 안에 잘 드러나 있다. 이처럼 영국과 다른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는, 책임과 의무는 개인이 지고 관리나 감독은 공적으로 한다는 새로운 사고 방식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가톨릭 여러 국가에서의 자선 및 교육적 역할은 전반적으로 교회가 담당하였고, 국가는 최소한의 감독과 관리만을 맡는 경향이 유지되었다.
〔18세기의 박애 사업〕 18세기는 박애의 시대로 불릴만큼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던 시기였다. 이때 행해진 박애 활동은 중세의 교회가 펼쳤던 자선과는 달리 자발적으로 모여 구성된 기부자 집단, 즉 박애 협회(philanthropic association)에 의해 행해졌다는 점에서 일종의 공동 사업이었다. 이때 종교적 동기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이들이 벌인 박애 사업의 내용은 주로 아동 복지와 의료 사업 분야였다. 빈곤과 비행의 원인인 무지를 없애기 위해 빈민의 아동 교육을 중시하여 각종 자선 학교가 많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자선 병원을 설립하고 교도소 개혁을 벌여 죄수들의 비인간적 처우를 개선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이 협회에서는 성서를 인쇄하고 배포하였으며, 출소자들에 대한 인도와 보호, 금주(禁酒) 장려, 동물 학대 방지, 국제 평화와 원리의 보급 등과 같은 일을 벌이기도 하였다.
독일에서도 박애적 활동은 비교적 활발히 전개되었다. 18세기 후반 독일의 교육 개혁자 바제도(J.B. Basedow, 1723~1790)는 독일의 데사우(Dessau)에 이른바 박애 학교(philanthropinum)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인본주의적 세계관을 가르치고 공동의 이익을 깨닫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면서, 종교나 계급의 차이에 관계없이 부유한 학생이나 가난한 학생을 함께 교육시켰다. 또 바제도는 종교보다는 국가가 교육에 관여하고 관리하는 것을 옹호하였고, 교수 방식에서도 전통적 방식보다는 근대적이고 실용주의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는 학교를 즐겁고 흥미로운 곳으로 만들기 위해 체벌도 없앴다. 이러한 교육의 여파로 독일에서는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이른바 아동 문학도 탄생하였다. 박애 학교는 인근 스위스를 비롯하여 유럽의 여러 나라의 교육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 박애 사업은 사회적이고 대중적인 빈곤이나 실업에 대해서는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때 박애 사업의 지도자들은 주로 17~18세기 자본주의가 발달하던 당시 도시의 산업 자본을 장악하였던 시민 계급들로서, 노동자들의 반감을 완화하고 자신들의 계급적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선 사업을 벌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빈곤을 낳는 경제적 · 정치적 기구나 제도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그들의 특권적 지위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선행이나 자선을 베풀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박애주의는 서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노예제도 폐지 운동(1783경~1888)의 기본 이념을 확립하는데 영향을 미쳤고, 그 후 자유 · 평등 · 사유 재산의 불가침성 · 압제에 저항할 권리 등 시민의 기본권을 천명하며 일어난 프랑스 혁명(1787~1799)의 기본 이념에도 마찬가지로 작용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당시 프랑스에 살던 유대인들이 게토(ghetto)에서 해방되었고, 이어 영국, 독일, 그리고 다른 서유럽의 유대인들이 해방되는 데에도 박애주의는 숨은 공로자라고 할 수 있다.
〔현대적 의미〕 현대는 개인보다 관계를 중시한다. 물론 이때의 관계란 개인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을 전제한다. 아울러 사회적 구조를 중시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애주의는 단순히 자선 사업적인 성향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사회적 구조를 개혁함으로써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고취시키고 진정한 인간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전쟁을 종식시키고, 그 러한 전쟁을 낳을 수 있는 사회 구조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박애주의란 말 그대로 민족, 국가 이기주의에서 진정한 사해 동포주의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아울러 인간을 자연에서 떼어놓지 않고 생명 중심적인 태도에서 자연과 조화할 때에만 살 수 있는 자연의 일부로 보는 인간관, 세계관을 발전시키는 것이 오늘날에 어울리는 박애주의이다. (⇦ 사해 동포주의)
※ 참고문헌  M. Curti, Dictionary of the History of ldeas, vol. 3, pp. 483~493/ E. Grubb, 《ERE》 9, pp. 837~840/ H.S. Salt, Humanitarianism, 《ERE》 6, pp. 836~840/ M.M. Berman, 《EJ》 13, pp. 376~391/ D. Owen, English Philanthropy, Cambridge, Mass., 1964. 〔李贊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