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의 순교자. 회장. 세례명은 사도 요한. 일명 내호(來浩). 황해도 신천(信川)의 양반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충실하게 교육을 받았기에 천주교 교리를 들은 후 얼마 안되어 세례를 받았으며, 주위의 많은 외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다. 교우들과 함께 강당을 마련한 후 성사를 받기 위해 사제를 영접하였으나, 이를 시기한 몇몇 외교인들이 관가에 알려 그 고을 수령(守令)에게 추방당하였다. 이 사실을 안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해주 감영(海州監營)에 소송을 일으키도록 지시하자 박영래는 교우 60~70명을 모아 소송을 청하였으나, 판관으로부터 "이 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 모두 압송하여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는 판결을 받았다. 이 무렵 박영래는 천주교 교리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중요한 내용들을 직접 설교하였는데, 그들 모두가 교리 내용을 듣고는 "참으로 옳고 착한 도리이다" 라고 하면서 입교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는 외교인이었을 때에 다른 사람의 재물을 빌려 쓰고 갚지 않은 일이 있었는데, 영세한 후 그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이를 보속하려는 마음에서 3,000냥 가량의 가산을 정리하여 돈을 갚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전에 그에게 돈을 빌려 주었던 사람들은 모두 죽은 뒤였기 때문에 대신 그 자손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면서 "내가 전에 당신의 부형(父兄)들로부터 재물을 빌려 썼으나 미처 갚지 못하였다. 그런데 천주교를 믿고 난 후에 생각해 보니 그 일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아 이제 그것을 갚으려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이후 그는 매우 가난한 처지가 되었지만, 오히려 그의 신앙심은 더욱 굳어졌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아내와 딸을 데리고 상경하여 짚신 장사를 하면서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비밀리에 전교 활동을 하다가 배교자 이선이(李先伊)의 밀고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아내와 딸, 사위와 함께 피신하던 중 체포되어 혹형을 받은 박영래는, 신자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은 채 꿋꿋한 신앙을 지켰으며, 이듬해 10월 25일(음 9월 17일) 40여 세의 나이로, 양화진(楊花津)에서 김중은(金重殷)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下/ 《병인 치명 사적》/ 《치명일기》.〔편찬실〕
박영래 朴永來(?~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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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