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우철 朴遇哲(1884~1956)

글자 크기
5
박우철 신부.

박우철 신부.

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바오로. 본관은 고령 (高靈). 1884년 강원도에서 박창배와 최 아나타시아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나 원주(현園洞) 본당 소속으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여, 1917년 9월 22일 졸업과 동시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즉시 충남 구합덕(舊合德) 본당에 파견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본국으로 소환된 크렘프(Krempff, 慶元善) 신부를 대신하여 임시 주임을 맡아 당진(唐津), 아산(牙山), 예산(禮山) 등지까지 사목 관할하였다. 그러던 중 크렘프 신부가 돌아오게 되자 1919년 10월에 평남 영유(永柔) 본당 주임으로 전임되었다. 이곳에서 박우철 신부는 폐교 위기에 놓인 영청학교(永淸學校)를 6년제 보통 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아 300명의 학생들을 수용하는 한편, 청년회 · 안나회(부인회) · 명도회(明道會) 등의 신심 단체를 조직하였고, 마산(馬山) 공소를 비롯한 각 공소의 체계적인 사목을 위해 공무회(共務會)를 결성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24년 1월에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평양 지목구의 전교 및 사목 활동을 맡게 됨에 따라 그 소속 선교사인 모리스(J. Morris, 睦怡世) 신부에게 영유 본당
의 사목을 이양하였다. 그리고 번(P. Byrne, 方溢恩) 신부를 돕기 위해 신의주(新義州)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여 본당 사목과 함께 평안도 지역의 사목 현황을 파악하는데 자문 역할을 하였다.
1926년 5월 경기도 행주(幸州) 본당 주임으로 전임된 박우철 신부는, 이어 개성(開城) 본당 주임(1931~1933)과 강원도 이천(伊川) 본당 주임(1933~1939) 등을 거쳐 1939년 7월 황해도 송화(松禾) 본당이 설립됨과 동시에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으며, 다시 장연(長淵) 본당 주임(1941.6~1942. 1)을 거쳐 1942년 1월에는 사리원(沙里院) 본당 주임으로 전임되었다. 그 후 6 · 25 한국 전쟁의 발발로 전덕표(全德杓, 안드레아) 보좌 신부와 함께 사리원 교외의 동아포로 피신하였으나, 그 해 10월 전덕표 신부가 북한 공산군에 피살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 · 4 후퇴 때 남하하여 부산(釜山)으로 피난을 갔다가 1952년 서울 가회동(嘉會洞) 본당 주임으로 임명 된 그는, 부임 직후 고령으로 사목 활동에 어려움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협력과 주한 미군 민간 원조단(A.F.A.K.)의 원조에 힘입어 폐허나 다름없는 성당 건물의 재건에 전력을 다하였다. 1954년 12월 3일에는 가회동 성당 축성식을 거행하였으며, 또한 각종 신심 단체를 구성하여 교세 신장 및 신자들의 신심 강화를 도모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사목 활동을 벌이다가 1956년 1월 17일 뇌졸증으로 사망하여 용산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 사리원 본당)
※ 참고문헌  《경향잡지》 1055호(1956. 2)/ <교회와 역사》 100호(1983. 10), 한국교회사연구소, p. 26/ 구합덕 본당 100년사 자료집 편찬위원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구합덕 본당 100년사 자료집》, 천주교 구합덕 교회, 1990/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편, 《황해도 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平壤教區史編纂委員會편, 《天主教平壤教區史》, 분도출판사, 1981.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