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일명 흥원(興元) 1909년 경기도 광주군 도척면 상림리(廣州郡 都尺面 祥林里)에서 박병희(朴炳熙, 요한)의 아들로 태어나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수료한 후에 1936년 3월 28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황해도 장연(長淵)본당 보좌로 임명되어 첫 사목 활동을 시작한 박원영 신부는 2년 뒤인 1938년 5월 황해도 신천(信川) 본당 주임으로 전임되었는데, 전임 임충신(林忠信, 마티아) 신부가 본당 신축 부지(약 5,300평)로 매입해 둔 사직리(社稷里)로 부임 직후 본당을 이전하고, 그곳에 있던 기와집을 임시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 옆의 1,200평 대지에는 본당에서 운영하고 있던 미화(薇花)유치원 건물을 신축하였다. 아울러 박원영 신부는 신자들의 신심 함양을 위해 소년회 · 소녀회 · 명도회(明道會) 등의 신심 단체를 조직하였으나, 점차 냉담자가 증가하자 본당 신자들을 주축으로 '자원 희생대' 를 조직하고 기도회 등을 통한 냉담자 회두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41년 5월 충남 당진(唐津)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어 약 5년 8개월 동안 그곳에서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1947년 1월 18일 3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 신천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경향잡지》 983호(1947. 2), p. 92/ 《서울대교구 교구 총람》 부록, 가톨릭 출판사, 1984/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편, 《황해도 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편찬실〕
박원영 朴垣英(1909~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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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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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영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