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규 朴一圭(1897 ~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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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규 신부.

박일규 신부.

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안드레아. 아명은 규옥(圭玉). 본관은 순천(順川). 1897년 8월 9일 강원도 횡성군 풍수원(豊水院)에서 박덕필(朴德弼)과 조한강(曹漢江)의 외아들로 태어나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으며, 일찍부터 풍수원 본당 주임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수학하면서 복사로 활동하였다. 정규하 신부의 영향을 받아 사제가 될 것을 결심하고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1924년 6월 14일 졸업과 동시에 동료 양덕환(梁德煥, 안드레아) 신부와 함께 사제로 서품되어 황해도(黃海道) 장연(長淵) 본당 보좌로 첫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어 명동(明洞) 본당 보좌(1925. 8~1930. 11), 수원(水原, 현 북수동) 본당 주임(1930. 11~1931. 6), 대전(현 대흥동) 본당 주임(1931. 6~1932. 10)을 거쳐 1932년 10월 충북 청주(淸州, 현 서운동) 본당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부임하자마자 성당 신축 계획을 세워 1933년 초에 1,600평의 부지를 매입하고 즉시 성당 및 사제관 신축 공사에 착수한 박일규 신부는, 그해 12월 1일 성당을 완공하고 축성식을 가졌으며, 제천(堤川, 현 남천동) 본당 초대 주임(1940. 7~1942. 2)으로 사목할 당시에도 제천읍 부리 382-1번지의 한옥을 매입하여 성당으로 개조하였다. 원주(原州, 현 원동) 본당 주임(1942. 2~1945. 11)을 거쳐 1945년 11월 서울 영등포동(永登浦洞, 현 도림동)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그는, 수녀원을 신축한 데 이어 '대건상사' (大建商社)라는 천주교 복지 센터의 운영을 지원하는 등 본당 발전을 위해 여러가지로 노력하였다.
1950년 11월에는 미아동(彌阿洞, 현 길음동) 본당 주임으로 전임되었으나 한국 전쟁의 발발로 피난길에 올랐다가 전쟁이 끝난 뒤 본당에 복귀하여, 1953년 7월에 사제관을 마련하는 한편, 본당 부지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 1956년 9월 3일에는 성가 소비녀회(聖家小碑女會) 수녀들을 초청하였고, 이듬해 6월 19일에는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1958년 6월 9일 축성식을 가졌으며, 같은 해 8월 5일에는 옛 성당을 성가병원으로 개원한 후 성가 소비녀회에 그 운영을 위임하였다. 이외에도 1962년에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울대리(楊州郡 長興面 鬱垈里) 야산에 4만여 평의 본당 묘지를 조성하였으며, 당시 경기도 가평(加平)에 있던 전교사 양성 교육 기관인 정지신학원(貞智神學院, 현 가톨릭 교리 신학원)의 서울 이전을 추진하여 본당 내에 사무실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각 본당에서 많은 업적을 쌓아 온 박일규 신부는, 고령으로 성사를 집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아지자 70세 때인 1965년 12월 일선 사목에서 은퇴하여 미아동 본당 부근에 머물렀다. 1974년 6월 14일에는 사제 서품 금경축을 맞아 미아동 본당에서 축하식을 가졌으나, 은퇴 후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된 데다가 한 쪽 눈까지 실명하였고, 말년에는 위암까지 겹쳐 1979년 5월 25일 83세의 나이로 미아리 성가병원에서 사망하여 용산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 길음동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시보> 919호(1974. 6. 23), 3면 ; 1158호(1979. 6. 10), 1면/ 《교회와 역사》 58호(1980. 6), p. 5 ; 74호(1981. 10), p. 6/ 《吉音洞本堂 五十年史》, 천주교 길음동 교회, 1995/ 《서울대교구 교구총람》 부록, 가톨릭출판사, 1984/ 천주교 청주교구청, 《청주교구 연 감》, 1995/ 원주교구 30년사 편찬위원회, 《原州教區三十年史》, 천주교 원주교구, 1996. 〔李裕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