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수 朴在秀(1899~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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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수 신부.

박재수 신부.

대구대교구 신부. 대구대교구 부주교. 세례명은 요한. 1899년 5월 7일 경북 경주읍 성동리에서 태어나 1914년 10월 3일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26년 5월 29일 사제로 서품된 후 곧바로 전남 나주군 노안면 양천리의 계량(桂良, 현 노안)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어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1927년 12월 25일 벽돌로 사제관을 개조하여 서양식 성당을 준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한 데 이어 1933년 5월 21일에는 관할 북동(北洞) 공소를, 1935년 5월에는 나주(羅州) 공소를 각각 본당으로 승격시키는 등 약 11년 동안 적극적으로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1936년 6월 29일 함양(咸陽) 본당 주임으로 임명된 박재수 신부는, 1940년에 사목 관할 지역인 교산리 원교(元校) 마을에 성당 및 부속 시설 등을 건립하였다. 1943년 2월 26일에는 문산(文山) 본당 주임을 역임하였으며, 1944년 12월에는 계산동(桂山洞) 본당 주임 및 대구교구 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 후 마산 진영(進永) 본당 주임(1948. 8~1955. 5)으로 사목하면서 낡은 사제관을 신축하고 신자들의 신심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화원(花園) 본당 주임(1955. 5~1958. 10)으로 사목할 당시에는 지속적인 교세 신장에 따라 본당 분할을 모색하였는데, 1957년 9월 자신의 사재를 털어 부지를 매입하고 곧 이어 성당 건립을 추진함으로써, 1958년 10월 5일 월배(月背) 본당이 새로 설립됨과 동시에 초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1962년 7월에는 대구 남산동(南山洞) 본당 주임 및 교구 참사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68세 때인 1966년 12월 24일 고령으로 사목 활동에 어려움이 많게 되자 현직에서 은퇴하여 봉덕동(鳳德洞) 본당 사제관에서 거주하면서 프란치스코 재속 형제회 등의 지도 신부를 맡기도 하였다. 점차 노환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976년 부터는 대구 파티마 병원에서 요양하면서 오랜 투병 생활을 하였다. 고통 속에서도 언제나 신자 및 수도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는 등 성사 집행을 쉬지 않았던 박재수 부주교는, 1980년 10월부터 대구 가톨릭 병원으로 옮겨 입원하고 있다가 85세 때인 1983년 5월 5일 사망하여 대구 남산동에 있는 교구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 남산동 본당 ; 노안 본당 ; 대구대교구 ; 진영 본당 ; 함양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가톨릭 신문> 1011호(1976. 6. 6), 3면 ; 1355호(1983. 5. 15), 5면/ 대구대교구, 《이 땅에 빛 을》 2호(1983. 6), p. 38/ 대구대교구 가톨릭 저널리스트 클럽, 《대구대교구 연감》, 대구대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1982/ 天主教 馬山教區 進永敎會, 《진영 본당 50년사》, 1985/ 天主教大邱大教區史 編纂委員會 편, 《大邱本堂 百年史》, 대건출판사, 1986.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