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 바오로. 1891년 7월 27일 경북 상주에서 박상만(朴相萬, 필립보)과 강 마리아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8~9세 무렵 부모를 따라 경기도 용인군 용인읍 해곡리(海谷里) 별미(別味)에 정착하였다. 그의 집안은 1827년 정해박해(丁亥迫害) 때 조모 이 데레사가 충주(忠州) 원당마루라는 곳에 은신해 있다가 체포되어 순교했을 정도로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그가 태어난 곳 역시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주하여 생활하던 화전(火田) 마을이었다. 이후 그의 집안은 보다 안전한 신앙 생활을 위해 충북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旺場里) 장호원(長湖院)과 진천군 백곡면(栢谷面) 배티 등지를 전전하였다. 이와 같이 어려서부터 신심 깊은 집안에서 성장하게 된 그는 일찍부터 사제가 될 것을 결심하고, 갓등이(현 왕림) 본당의 알릭스
(J.J.B. Alix, 韓若瑟) 신부와 미리내 본당의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신부에게서 공부한 후, 용산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 6월 12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서품 후 곧바로 평안북도 의주(義州) 본당 보좌로 임명되어 사목 활동을 시작한 박정열 신부는, 이듬해 신의주 초음동(初音洞)에 신설된 신의주 본당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어 1년 가량 사목하였다. 이어 1923년 10월에는 제물포(현 답동) 본당 보좌로 전임되었으며, 1925년 6월 25일에는 황해도 수안군 대오면(大梧面) 사창(社倉)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임시 성당을 건립하고, 관할 공소의 사목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등 약 3년 동안 사목하였다. 그러던 중 1928년 5월에 광산 개발 계획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곡산군 곡산(谷山) 읍내로 본당을 이전함으로써 사창 본당은 곡산 본당의 관할 공소로 전락하였다. 이후 그는 곡산 읍내 초입의 과수원을 매입하고 성당 및 사제관을 건립하여 같은 해 10월 3일 봉헌식을 가졌다.
사창과 곡산에서 6년 간 사목한 박정열 신부는 1931년에 개성(開城) 본당 주임, 1933년에는 사리원(沙里院) 본당 주임으로 활동하였으며, 1936년 5월 재령(載寧) 본당 주임으로 전임된 후에는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중등학교 과정의 사립 학교를 신설하였는데, 이때 강주희(姜周熙, 판크라시오) 신부 등이 그를 도와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밖에도 전문적인 원예 기술 및 지식을 습득하여 직접 과수원을 경영하기도 하였으며, 관할 구역 내 의료 기관의 필요성을 매우 절실히 느끼고 1940년 9월 1일 성심의원(聖心醫院)을 개설하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그 운영을 위임하였다. 이 병원 운영은 당시 지역 주민들에게 큰 호응을 받아 교세 신장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52세 때인 1942년 가을 공소 순방으로 인한 과로에다 심한 폐렴까지 겹쳐 많은 고생을 하게되었고, 결국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같은 해 12월 8일 사망하여 그곳 공동 묘지에 묻혔다. (→ 곡산 본당)
※ 참고문헌 《경향잡지》 954호(1943. 1), p. 5/ 《교회와 역사》 80호(1982. 3), 한국교회사연구소, p. 6/ 黃海道天主教會史刊行事業會 편, 《黃海道天主教會史》, 1984/ 《서울대교구 교구 총람》 부록, 가톨릭출판사, 1984. 〔李裕林〕
박정열 朴貞烈(1891~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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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박정열 신부와 재령 본당 여자 신자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