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실학자요 문인. 본관은 밀양(密陽). 초명은 제운(齊雲). 자는 재선(在先) · 차수(次修) · 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 · 정유(貞蕤) · 위항도인(葦杭道人). 북학파(北學派)의 한 사람으로 청나라의 선진 문물과 북경에 널리 전파되어 있던 서학(西學)을 이해하고 그 수용을 적극 주장하였으며,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바탕을 두고 조선의 정치 · 사회 · 경제 개혁을 강조하였다.
〔생애와 업적〕 1750년 11월 5일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낸 평(玶)의 서자로 태어나 12세 때 부친을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성장하면서, 17세 때까지 청교(靑橋) · 묵동(墨洞) · 필애(筆涯) 등으로 전전하며 어렵게 공부를 하였다. 19세 때인 1768년에 《초정시고》(楚亭詩稿)를 엮었는데, 이 무렵부터 박제가는 홍대용(洪大容) · 박지원(朴趾源)을 비롯하여 이덕무(李德懋) · 유득공(柳得恭) · 이서구(李書九) 등 북학파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이어 1772년에 《초정집》(楚亭集)을 편찬하였고, 1776년에는 박지원 · 이덕무의 시문을 한데 묶은 《백탑청연집》(白塔清緣集)을 이희경(李喜經)과 함께 간행하기도 하였다. 또 같은 해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라는 사가(四家) 공
동 한시집을 편찬하여 청나라에 소개하였으며, 1777년에는 청나라 문인들로부터 서문(序文)과 시평(詩評)을 받아 올 만큼 크게 문명(文名)을 떨쳤다.
29세 때인 1778년에는 사은사(謝恩使) 채제공(蔡濟恭)의 종사관으로 이덕무와 함께 연행(燕行) 사절을 따라가 이정원(李鼎元) 반정균(潘庭筠) 등 청나라 학자들과 서학에 대해 담론하는 한편, 천주당을 방문하고 선교사들로부터 서양 과학 기술에 대한 지식을 배우기도 하였다. 귀국 후에는 청나라의 여러 풍속과 문물, 각종 제도에 대한 견문(見聞) 등을 소개하고, 농업 기술 개량 및 외국과의 무역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2권 1책의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이용후생' 을 토대로 한 북학을 주장하였고, 현실 정치 · 사회의 여러 가지 모순을 비판하면서 사회 개혁을 요구하고 나서게 되었다.
한편 서얼(庶孼) 출신들의 불만을 무마하려는 목적에서 1777년부터 서얼 허통(許通) 정책을 펴기 시작한 정조(正祖)는, 1779년 3월 규장각에 검서관(檢書官)직을 설치하였는데 이에 따라 박제가도 이덕무 · 유득공 등과 함께 검서관으로 임명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했고, 1786년에는 왕명에 따라 구폐책(救弊策)을 올리기도 하였다. 1790년에는 정조의 지시에 따라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하였으며, 같은 해 5월 황인점(黃仁點)의 연행시에 부사 서호수(徐浩修)의 종사관으로 유득공과 함께 두 번째 연행길에 올랐으며, 9월 귀국 때에는 압록강에서 다시 왕명을 받고 동지사(冬至使) 일행을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었다. 이후 부여(扶餘) 현감으로 재직할 때인 1793년 1월에는 남공철(南公轍) · 이덕무 · 박제가 등이 비속한 문체를 쓰는 데 대해 왕으로부터 지적을 받게 되자, 이덕무의 권유로 <비옥희음송>(比屋希音頌)이라는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1794년 2월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796년에는 세 차례에 걸친 연행 견문을 <연경잡절일백사십수>(燕京雜絶一百四十首)라는 방대한 분량의 연작시로 표현하였다. 또 1798년에는 <응지농정소>(應旨農政疏)를 올렸고, 《진소본 북학의》(進疏本北學議)를 저술하였으며, 1801년 2월에 다시 사은사 윤행임(尹行恁)을 따라 유득공과 함께 네 번째로 연행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귀국한지 얼마 안되어 사돈 윤가기(尹可基)가 주모자로 지목된 동남성문(東南城門)의 흉서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북도 종성(鐘城)으로 유배되었다가 1804년 4월에 풀려 났으나, 이듬해 4월 25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시 · 그림 · 글씨에 모두 뛰어난 재질을 보였던 그는, <대련(對聯) 글씨>, <시고>(詩稿), <목우도>(牧牛圖), <의암관수도>(倚巖觀水圖), <어락도>(魚樂圖), <야치도>(野雉圖) 등의 작품들과, 《초정집》, 《북학의》를 비롯하여 《명농초고》(明農草稿), 《정유시고》, 《정유집》 등 여러 저서를 남겼다.
〔서학 사상〕 박제가는 네 차례의 연행을 통해 견문을 넓히는 동시에 청나라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이용후생' 에 필요한 선진 문물을 이해하고, 아울러 북경에 전파되어 있던 서양 문화의 우수성도 파악하게 되었다. 바로 그 과정에서 형성된 그의 북학론에는 서학 수용론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랑캐[夷]의 문화라고 하더라도 그 수용을 주저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었다. 이처럼 전통의 화이론(華夷論)을 극복하고, 북학의 선구자인 홍대용이 제시한 화이일야(華夷一也)의 세계관과 문화관을 갖게 된 박제가는 마침내 1786년에 이르러 해외 통상론과 서사 고빙책(西士顧聘策)을 정조에게 건의하였다.
그의 해외 통상론은 기존의 쇄국 정책을 포기하고, 일본 · 류큐 · 안남(安南)은 물론 서양과도 문호를 개방하여 그들의 선진 문화를 수용하자는 것이었다. 아울러 이를 위해서는 서사를 초빙하여 직접 그들의 과학 기술과 이용후생의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다만, 그의 이러한 서학 수용론은 천주교의 전파까지 허용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서사를 초빙하되 전교는 금지하자고 하였으며, 천주교의 중요한 교리인 천당 지옥설은 곧 불교의 교리와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 북학파)
※ 참고문헌 《정유집》/ 李成茂, <朴齊家의 北學議>, 《實學研究入門》, 일조각, 1973/ 金吉煥, <朴齊家의 生涯와 思想>, 《實學論叢》, 전남대학교 호남 문화 연구소, 1975/ 金龍德, <정유 박제가 연구>, 《朝鮮後期思想史研究》, 을유문화사, 1977/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 9,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89/ 姜在彥, 《조선의 西學史》, 민음사, 1990/ 李庚秀, <朴齊家論>, 《朝鮮後期漢文學作家論》, 集文堂, 1994. 〔車基眞〕
박제가 朴齊家(1750~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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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그림에도 뛰어난 재질을 보였던 박제가의 <의암관수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