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원 朴宗源(1793~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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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교우들을 옥바라지한 박종원 아우구스티노(탁회성 작).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교우들을 옥바라지한 박종원 아우구스티노(탁회성 작).

성인.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의 순교자. 성녀 고순이(高順伊, 바르바라)의 남편. 일명 이선.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축일은 9월 20일. 1793년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약방에서 거간 일을 하며 곤궁하게 생활하였으나 모친과 함께 언제나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심하였던 박종원은, 겸손하고 온화한 성격에 교리 지식이 깊었으며, 외교인들에게 열심 히 전교하였을 뿐만 아니라 죽을 위험에 처한 외교인 어린이들에게 대세를 주는 일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또한 일찍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순교할 원의를 품고 있었기에, 악습이나 과오에 빠진 교우들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데에도 열심하였다. 장성해서는 교우 고순이와 결혼하여 슬하에 3남매를 두었다.
1834년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에게 재능과 덕행을 인정받아 내포(內浦) 지방에 파견되어 교우들을 가르치게 된 그는, 1837년에 앵베르(lmbert, 范世亨) 주교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어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교회 일에 헌신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초에 일어난 기해박해로 인해 박종원은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나, 곧 은신처에서 나와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교우들과 연락을 취하였다. 뿔뿔이 흩어진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다가 그 해 10월 26일(음 9월 20일)에 체포되어 곧 포도청으로 압송된 그는, 이튿날 아내와 함께 포도청과 형조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꿋꿋한 신앙으로 이를 참아 내었다. 그러나 아내 고순이가 순교한 지 한 달째 되던 1840년 1월 31일(음 12월 27일)에 6명의 교우들과 함께 당고개(堂峴, 현용산구 원효로 2가 8번지)에서 참수형을 받아 48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고순이 ; 기해박해 ; 한국 성인)
※ 참고문헌  《기해일기》/ 《일성록》/ 《달레 교회사》 中/ 아드리앵로네, 안응렬 역, 《한국 七十九위 순교 복자전》, 가톨릭출판사, 1970/ Coreana beatificationis seu declarationis martyrii ven. sevorum dei Laurentii Imbert episcopi capsensis(79위 시복 조사 증거서), Roma, 1921. 〔편찬실〕